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17화 (118/270)

#118. 집을 세 번 이상 이사하는 것은 화재를 당하는 것과 같다

1.

정윤호는 로비에 앉아서 공항 로비를 둘러보았다.

올 초 3월에 개장한 공항답게 깔끔했다.

굳이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새로운 공항이 인천에 있다 보니 예전 김포에 있을 때보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마 곧 익숙해질 것이다.

시간은 많은 일을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정윤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윤호는 지금 자신이 기다리는 새로운 상사와의 관계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상사.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정윤호는 몇 년 전까지 한국의 안기부, 아니 국정원의 요원이었다.

국정원 요원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공무원이었다.

정치권의 낙하산이나 변호사나 회계사같이 특채 형식으로 입사하는 예도 있기는 하지만 요원 대부분은 공채를 통해 입사했다.

입사 연차에 따라서 철저한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선배나 상사는 대부분 나이가 많았고 후배는 대부분 나이가 적었다.

그런데 이번에 오는 상사는 열 살 이상 어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어린 상사를 모시게 되는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설사 있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자신의 나이가 많아졌을 때나 있을 줄 알았다.

그렇다고 에드릭이라는 상사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카센터에서 죽어가던 자신에게 기회를 준 은인이었다.

공항 전광판에 방콕에서 출발한 타이 항공편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올라왔다.

정윤호는 일어나 출국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고 에드릭이 나왔다. 그의 뒤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전화했을 때 말했던 경호원인 듯했다.

경호원 두 명은 에드릭보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전직 국정원 요원인 정윤호의 눈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저런 경호원을 두 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니 새롭게 모시게 된 상사는 생각보다 돈이 더 많은 듯했다.

정윤호는 에드릭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Welcome to Korea. How was the flight?”

한국에 온 것을 환영하고 여행 어땠느냐는 일상적인 인사를 건넸다.

“좀 피곤하네요. 바로 호텔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에드릭이 대답했다.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말씀하신 대로 힐튼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정윤호가 앞장섰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정윤호는 지난 한국에서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쓸 빌딩 계약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 달이면 매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집은 보아 둔 것이 있습니다만 마음에 드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드릭의 질문에 정윤호는 살짝 긴장되었다.

“말씀하신 조건대로 조용하고 보안이 잘된 아파트가 있기는 한데······. 내년에나 입주가 가능합니다. 다른 아파트는 그 아파트에 비하면 보안에서 조금 부족합니다.”

“내년이라······. 일단 거기도 알아봐 주세요. 집이 꼭 한 채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른 곳은요?”

“주택가는 성북동이나 한남동이 보안이 괜찮습니다.”

“성북동은 알겠는데 한남동은 어딥니까?”

에드릭이 물었다.

한남동이 어디냐고 묻는 에드릭의 질문에, 그가 한국말을 아무리 유창하게 해도 외국인은 외국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그것도 에드릭처럼 돈이 많은 한국인이라면 한남동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태원동은 아시죠? 한국에서 외국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는 곳인데요.”

“알고 있습니다.”

“한남동은 이태원에서 한강 쪽으로 인접한 곳인데, 주변에 대사관도 있고 사성 일가가 근처에 살아서 보안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입니다. 홍콩에서 사시는 저택보다는 못하겠지만 서울의 주택가 중에서는 전망도 괜찮습니다.”

전망을 이야기한 것은 에드릭이 홍콩에서 사는 집이 산 정상인 ‘더 피크’라는 점 때문이었다.

정윤호의 생각에 그나마 서울에서 더 피크에 가장 가까운 곳이 한남동이었다.

물론 서울의 한남동은 홍콩의 더 피크에 비하면 훨씬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보안이나 전망이나 그나마 비슷한 곳이었다.

“그럼 일단 한남동 주택도 알아봐 주세요.”

“한남동 쪽은 집을 구매하면 나중에 팔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번 집을 사면 살지 않더라도 팔 생각이 없으니까요. 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했듯이 세 번 이상 이사하는 것은 미친 짓이죠.”

에드릭이 말했다.

그의 말에 정윤호는 부자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는 이사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지만 자신 같은 서민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한국 기준으로는 중류층 중에서도 상류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가족도 결혼 생활 동안 꽤 여러 번 이사했다.

정윤호가 한국에 없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이사를 결정한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출장을 갔다 와서 이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국정원에 있을 때는 잦은 출장 때문에 면목이 없어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정윤호의 부인은 이사할 때마다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정윤호가 국정원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주식에서 날린 이후에 카센터를 차린 돈이 바로 그런 이사를 통해 번 돈이었다.

힐튼 호텔에 도착한 정윤호는 하루 숙박비가 몇백만 원이라는 프레지덴셜 스위트까지 에드릭을 안내했다.

“내일 아침 찾아뵙겠습니다.”

호텔을 나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하지만 정윤호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제대로 된 보고를 하려면 오늘 이야기한 주택을 구매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특히 내년에 입주하는 아파트의 경우는 구매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어린 상사는 홍콩에서도 최고급 주택 단지에 살았다.

아마도 아파트에서도 최고층을 구매하려고 할 것이다.

내년에 입주할 아파트의 경우 다른 층은 미분양이었지만 정작 최고층 30채는 구매가 쉽지 않았다.

아파트를 건설한 회사 경영진 차원에서 입주민을 까다롭게 선정한다는 소문이었다.

다행히 정윤호는 그 회사 간부들과 인연이 있었다.

“나야, 지난번에 이야기한 아파트 말인데······.”

2.

아침에 일어난 나는 간단히 샤워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밖으로 남산이 보였다.

전망이 좋았다.

스위트룸에 머물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혼자 머물기에는 너무 컸다.

특히 오늘 머문 스위트룸은 2층까지 있어서 그런지 천장이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저 방이 크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어쩌면 혼자서 이런 방에 머무는 일은 낭비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난번 리안과 대화를 한 이후부터는 1등석을 타고 스위트룸에 묶었다.

내가 이렇게 여행과 숙박에 돈을 쓰는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리안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이렇게 쓰지 않으면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이게 내가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치였다.

돈을 많이 벌지만, 딱히 쓸 곳도 쓸 시간도 없었다.

본래도 활자 중독일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데, 최근 반년 동안은 그나마 있던 책을 읽을 여유시간도 없었다.

투자하기 위해 매주 바뀌는 정치 경제 상황을 조사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은 CIA에서 내려오는 임무였다.

한 번 임무가 떨어지면 최소 일주일에서 몇 주간 그 일을 매달려야 했다.

당연히 CIA 임무를 할 때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추적을 당할 수 있는 카드는 당연히 안 됐고 현금도 일정 금액 이상을 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다.

원하지 않게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옷을 입은 나는 전화를 들어 룸서비스로 아침을 주문했다.

내 식사를 주문하면서 경호원들의 식사도 함께 주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후 정윤호가 찾아왔다.

그의 옆에서는 랄 바하두르가 있었다.

VIP가 주로 묶는 스위트룸답게 경호원이 묶은 객실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집에서 먹고 왔습니다.”

“그러면 일 이야기를 하죠.”

우리는 사무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윤호는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게 제가 어제 이야기한 주택들의 정보입니다.”

서류에는 서울시 지도에서 해당 건물들의 위치와 주변 사진 그리고 각종 정보가 들어 있었다.

“꽤 상세한 내용까지 나와 있네요.”

“아무래도 지금 한국 경제 상황에서 그런 고가의 주택을 구매할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구매를 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한 번 구매하면 어지간하면 이사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이사할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이사하기 어렵다는 말이 맞았다.

한국에서 집을 사게 되면 홍콩에 있는 집처럼 비밀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추가로 보안장치나 감시 장비까지 설치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비밀 공간이나 보안장치를 새로 설치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사를 하면 살고 있던 집에 기존에 설치된 공간을 다시 원상복구해야 하는데······.

그러느니 기존의 집을 놓아둔 채 새로운 집을 사는 것이 나았다.

“당연하죠. 이런 고가의 집을 사는데 직접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정윤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여기 있는 집들은 몇 년 안에 지금 가격보다 몇 배는 오를 겁니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집을 사는 것을 망설이지만 한두 달에서 반년만 지나도 한국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뛸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윤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정부는 작년까지 벤처 투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직격탄을 맞았죠. 미래에 대한 희망이 꺾인 이상 사람들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투자하려고 할 겁니다. 마침 정부도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시행하면서 부동산에 대한 규제를 대폭 풀었더군요.”

희망을 좇던 사람들이 희망이 헛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현실을 좇는 법이었다.

이건 단지 부동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작년부터 한국 주식시장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주식은 실적주라고 불리는 한 회사의 주식이었다.

작년에는 1만 원도 안 되던 그 회사의 주가는 닷컴 버블이라는 광풍이 몰아치던 와중에도 일곱 배나 올랐다.

희망이 주가를 지배하던 시대에는 외면받던 실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었다.

미국이나 유럽도 닷컴 버블에서 시작된 경기 침체 중에 서서히 부동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택한 것이다.

골드만삭스도 2000년대 주요 투자처로 기술 기업들이 아니라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같은 자원 부국을 브릭스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서 투자를 집중하고 있었다.

3.

내 말에 정윤호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부동산 사업이 전망이 좋겠군요.”

“부동산 사업요?”

정윤호의 말에 내가 되물었다.

나는 부동산 투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W&R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은 리안에게서 현물 투자 받은 것이었다.

“예. 그렇지 않아도 투자하신 돈으로 빌딩을 구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봤습니다. 알아보니 지금은 건물을 사면 80%에서 90%를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부동산 가격이 그렇게 뛴다면 지금 대출을 받아서 건물을 사들이고 다시 건물을 계속해서 사들인다면 몇 년 안에 꽤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부동산 투자라······.”

나는 혼잣말을 해 보았다.

“혹시 부동산 투자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내가 앞으로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것을 알면서도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주식과는 달리 유동성도 낮아서 위기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게 한국이라면 문제는 달랐다.

정부가 알아서 대출을 권장하는 상황이었다.

부동산에 투자하고 대출을 통해서 투자 상당 부분을 회수할 수 있었다.

물론 돈을 위해서라면 굳이 부동산에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수익률이라면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 복수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영향력이 필요했다.

내가 파악한 인물 중에는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특정 주식을 일정 지분 이상 소유해서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어도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부동산은 조금 달랐다.

부동산, 그리고 건설은 한국에서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엮이는 분야였다.

그건 부동산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 가지 문제는 주식과는 달리 부동산은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부분이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빠르게 상승할 것이다.

주식이나 지수 선물처럼 부동산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재투자를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돈을 빌리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복수가 그렇게 중요하냐였다.

대출은 당연히 위험이 따른다.

아버지의 복수가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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