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급하다고 다른 사람의 소를 몰려고 해서는 안 된다
1.
꽤 오랫동안 정윤호의 제안을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눈에 정윤호가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부동산 투자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나? 이왕이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전에 거액을 투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면 돈을 빌려야 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부동산 투자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온갖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내 말에 정윤호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돈을 빌리신다고요?”
“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한국에 투자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출까지 받아서 복수할 가치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정윤호는 내 말이 이어질수록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그렇게까지 하자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출을 하면서까지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생각은 포기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도 아니고 혹시 모를 위험 때문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내 말에 안심한 표정을 짓던 정윤호가 물었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복수를 서두를 때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죠.”
“그런데 아버님의 복수를 위해서 돈을 빌릴 생각을 하시다니 친하셨나 봅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요.”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정윤호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주 집을 비웠다.
집에 있을 때도 나나 동생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 성적이 어떤지를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풋볼 주 대회에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놀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풋볼을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심지어 내가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학교에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인종차별을 당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인종차별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본인 책임인데도 항의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아버지와 내 사이는 완전히 갈라졌다.
그나마 해 준 것이 있다면 본인의 몸은 본인이 지켜야 한다고 지금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로 호신술 훈련을 강요한 것뿐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족에게는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항상 친절했고 사회봉사에도 굉장히 열심이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아버지가 더 싫었다.
가족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이 무슨 봉사라는 말인가?
아버지에게 고마워하는 거의 유일한 것은 뛰어난 능력을 물려줬다는 점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복수하려고 하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게 만들어서 내가 어린 시절 끔찍한 인종차별을 당하게 한 일에 대한 복수였다.
2.
정윤호의 안내를 받아서 회사가 입주할 건물을 보러 나갔다.
건물 앞에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호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던 사내는 나를 보고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내가 경호원을 두 명이나 데리고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란 듯했다.
“제 대학교 후배인 강태우입니다. 이번에 부동산 관련해서 큰 도움을 줬습니다.”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나는 먼저 정윤호의 후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태우입니다. 선배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홍콩에서 투자업을 크게 하신다고요?”
“그냥 주식 조금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젊으신데 이런 건물을 사실 정도면 성공하신 거죠.”
강태우가 자신의 뒤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한 건물은 조금 오래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관리가 잘된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건물이 들어선 곳이 대로와 인접해서 교통편이 좋았다.
“괜찮네요. 그런데 부지가 좋아서 꽤 비싸 보이는데요?”
건물은 조금 낡기는 했지만, 위치가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윤호가 이야기한 금액으로 이 정도 입지의 건물을 사들였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 주인이 사정이 있어서 급하게 내놓은 것을 알고 제가 선배님께 권했습니다.”
강태우가 대답했다.
이야기를 듣고도 뭔가 이상했다.
이유가 없이 싸게 나오는 건물은 없었다.
아니 그런 건물이나 땅이 있더라도 그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에나 가능했다.
아무리 봐도 나름 서울에서는 중심지라고 하는 강남에 있는 빌딩이었다.
그런 건물이 정윤호가 건물을 구하려고 하자 마침 싸게 나왔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정보 요원과 사기꾼은 말 그대로 그 행동을 하는 목적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사기꾼이 사기를 당하는 것처럼 정보 요원이라고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 요원의 직업상 만나는 사람이 한정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퇴직 요원들이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나중에 찾아서 응징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봐야 돈을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정윤호를 바라보았다.
정윤호도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알아봤는데 주인이 싸게 팔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서 이미 해결한 상태입니다. 그걸 고마워한 전주인이 원래보다 더 싸게 건물을 넘겨주었습니다.”
정윤호의 대답에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정윤호가 쓸 건물이었다.
부동산 구매를 맡겨 놓고 바로 간섭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았다.
한동안 더 건물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설립이 끝나는 대로 바로 건물을 넘겨받을 생각입니다.”
“그 회사를 통해서 건물을 관리하신다는 말이죠?”
“예. 그게 재산 관리 측면이나 세금 측면에서 훨씬 이익입니다.”
“직원들은 구하셨나요?”
“제게 한국에서 일할 사람을 알아서 하라고 하셔서 중요한 일을 할 직원들은 이미 구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여기 있는 제 후배입니다. 시설 관리 쪽을 맡길 생각입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강태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강태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깍듯하게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은 나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선배의 상사라고 해도 나이 차이가 있는 나에게 강태우의 태도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건설 쪽 관련 일을 해서, 능력은 믿을 만한 친구입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의 일은 알아서 하십시오. 법적인 문제는 제가 보낸 변호사와 상의를 하시면 됩니다.”
정윤호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주기는 했지만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한국에 계속 머물 수는 없으니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는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다.
홍콩에서 거래하는 법률사무소를 통해서 알게 된 한국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를 보내서 통제할 생각이었다.
3.
대충 들러본 우리는 임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사람도 없고 책상과 의자도 몇 개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강태우가 책상 하나로 가더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임시로 사용하고 있어서 어수선합니다. 건물을 정식으로 인도받으면 관리 회사 사무실도 함께 넘겨받을 예정입니다.”
강태우가 급하게 변명을 했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보니 지적도였다.
“지적도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아, 예.”
내 질문에 강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적도란 토지 상황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지도였다.
예를 들어 토지의 위치나 소유 관계 등등 같은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이런 지도를 강태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정윤호가 제안했던 부동산 사업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혹시 정윤호 씨를 통해서 부동산 사업을 제안한 것이 강태우 씨입니까?”
내 질문에 강태우가 정윤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윤호가 강태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자금만 풍부하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습니다.”
강태우가 말했다.
“말만이 아니라 준비도 이미 하는 것 같은데요?”
“혹시 보고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나중에 정윤호 씨에게 듣겠지만 당분간 추가로 회사에 투자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강태우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기존에 투자한 자금을 부동산 투자에 쓰는 것은 막지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담보로 자금을 대출받아서 투자에 사용한다든가 하는 일이요.”
“정말입니까?”
강태우가 물었다.
그는 지금은 기대에 부푼 눈빛이었다.
부동산 투자 사업을 꽤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예. 여기에 더해서 집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던 자금도 사용하셔도 됩니다. 얼마 머물지도 않을 집보다는 사업이 우선이니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집 구매까지 포기한다는 내 말에 정윤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태우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다만 내년까지 성과가 없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강태우 씨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정윤호 씨까지요.”
강태우가 놀란 눈으로 정윤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까지요······? 그건······.”
정윤호가 손을 들어 강태우의 말을 막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한 번 믿어 주십시오. 하시려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런 정윤호의 모습에 강태우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약간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신파를 찍나?
잠시 후 강태우에게서 그가 수익성이 평가한 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반년이나 1년간 한국의 경제 전망이나 주가지수, 부동산 가격, 전망에 관해서는 관심도 있고 할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건물이 어떤 이유로 수익성이 좋다거나 공실률이니 개보수를 통해서 가치를 증가시키느니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도 부동산에 관심이 있었지만, 건물의 방문객 숫자나 유동 인구 같은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그만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재빨리 말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화요일까지는 서울에 머물 생각입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있는 정윤호 씨를 통해서 듣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강태우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4.
다음 날 나는 한국의 주가, 그중에서도 가이닉스의 주가를 살폈다.
지난 며칠 동안 꽤 올랐는데도 가이닉스의 주가는 오늘도 상승하고 있었다.
정윤호를 통해서 가이닉스 주가가 오르는 이유를 알아본 나는 홍콩으로 전화를 걸었다.
“장 팀장님, 오늘 오후 장이 시작되자마자 가이닉스 주식을 전부 처분해 주십시오.”
-전부요?
2팀장이 되물었다.
“예.”
-지금 확인해 보니 주가 흐름은 괜찮은데요?
“가이닉스에 투자한 다른 투자자들이 팔기 전에 처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계신다더니 무슨 들은 이야기라도 있나요?
2팀장이 다시 물었다.
“지금 한국 시장에서 살러먼브라더스증권에서 가이닉스 반도체를 추천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더군요. 저도 확인해 봤는데 사실이고요.”
-살러먼브라더스가 추천했는데 파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홍콩이나 여기 한국시각으로 오늘 밤에 미국 인텔의 2분기 실적 발표가 있습니다. 지금 다른 전자정보통신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인텔의 실적이 좋을 리가 없고요.”
-살러먼브라더스가 가지고 있는 가이닉스 주식을 팔려고 추천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살러먼브라더스면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기업인데 그런 수를 쓸까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주에 아마존을 추천한 골드만삭스가 소송을 당했는데요?
“한국에서는 그런 소송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 한국에서는 그런 소송에서 거의 무조건 기업 편을 들어 줄 뿐 아니라 설사 이긴다고 해도 징벌적 배상이 없어서 가이닉스 주식을 팔아서 버는 돈에 비하면 소액입니다.”
-알겠어요. 가이닉스 주식을 팔면 그 돈은 그럼 어떻게 할까요?
2팀장이 물었다.
나는 문득 강태우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의 말대로라면 한국 정부가 경기 부양책으로 건설과 부동산에 대한 경기 부양책을 다시 발표할 예정이었다.
부동산을 살 생각은 없지만, 건설 회사의 주식을 살 수는 있었다.
“건설 회사 주식을 사 주십시오.”
-건설 회사 주식.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나는 2팀장과의 전화를 끊은 후 다시 조민에게도 연락해서 2팀장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그날도 가이닉스 주식은 10% 이상 올랐다.
외국인, 즉 외국계 회사들이 대거 판 주식을 사들인 것은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이었다.
그날 밤······.
인텔의 2분기 실적이 기대보다 훨씬 낮다는 소식에 미국 증시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리고 다음 날 가이닉스의 주식은 장이 시작하자 폭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