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19화 (120/270)

#120.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본다

1.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오고 있었다.

8월의 홍콩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공항 출입구를 나오자 열기가 느껴졌다.

다시 돌아온 홍콩은 말 그대로 후덥지근했다.

오기 전 확인한 기온은 한국의 서울보다 낮았다.

하지만 체감온도는 더 높게 느껴졌다.

높은 습도 때문인 것 같았다.

이미 공항 입구에는 홍콩에서 저택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한 명 나와 있었다.

랄 바하두르와 함께 그 차에 올라탔다.

다른 경호원은 공항에 남아서 짐을 찾아서 나중에 올 것이다.

차 안에서 리안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 홍콩에 도착했어.”

-한국에서의 일은 잘 끝냈어?

“끝내고 말고 할 일이 뭐가 있어. 일을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일을 시작하기 전에 확인차 들린 거야.”

-조민에게 들으니 이번에 반도체 회사에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다던데?

“이미 지난주에 했던 투자했던 주식을 판 것뿐이야.”

-왜 이래, 다 들었는데. 폭락 직전에 팔아서 꽤 많은 돈 벌었다던데.

“뭐, 다른 놈들이 팔기 전에 먼저 팔아서 나쁘지는 않았어.”

-여기 홍콩에도 한국 개인 투자자들 털어먹으려던 회사 여럿 너 때문에 물 먹었다더라······.

내가 주식을 팔던 날 코스닥의 가이닉스 반도체 거래 금액은 무려 3,200억이 넘었다.

하지만 내가 팔던 시점의 가이닉스 반도체 주식 평가액은 6,200만 달러 정도였다.

장 팀장과 류오린은 나름 티 나지 않게 작업했다지만, 몇 시간 만에 이 정도 주식을 팔아 치웠다.

아무리 거래 대금이 크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의 주식 매각이라면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기회만 보고 있던 증권사 중 일부는 가지고 있던 가이닉스 주식을 파는 데 실패했다.

한 박자 빠른 매각으로 우리 팀은 거액을 벌어들였다.

투자액이 4천만 달러였으니 이번 거래로 2주 남짓한 시간에 우리 팀이 벌어들인 금액은 2,200만 달러가 넘었다.

한국에 세금으로 내야 할 세금과 각종 비용을 제외해도 2주 만에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었다.

하지만 주식은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 돈을 잃는 시장이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잘못된 정보로 가이닉스 주식을 산 한국의 개인 투자자나 기관투자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외국계 증권사 중에서도, 우리가 매각할 때 눈치를 채고 정리한 회사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도 많았다.

말한 것처럼 조금 더 오르기를 기다렸던 외국계 회사 중에는 제 때에 주식을 팔지 못한 곳도 있었다.

다음 날 가이닉스 주식이 폭락한 것을 생각하면 손해를 보거나, 손해는 아니더라도 큰 수익을 낼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으면 그 정도 각오를 해야지.”

전화기 너머에서 리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경호원 꼭 데리고 다녀라.

“그렇지 않아도 그러고 있어.”

-그럼 저녁에 네 집으로 찾아갈게.

집에 도착해 들고 있던 노트북이 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져놓고 그대로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어딘지 몸이 끈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냉방이 잘된 공항에서 차 안 그리고 집으로 이동했는데도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신체 반응도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았다.

2.

샤워하고 나와서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홍콩 집에 두고 갔던 블랙베리를 확인해 보니 아니라 다를까 문자가 꽤 여러 건 와 있었다.

나는 즉시 CIA 임무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메일을 열어 보았다.

임시 메일함에는 CIA 필리핀 지부에서 여러 건의 협조 요청 메일이 올라와 있었다.

정확하게는 처음 필리핀에서 일할 때 함께 만났던 조엘이라는 요원이었다.

메일에는 정확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외신 기사를 찾아보았다.

짐작했던 대로 이번에도 문제는 지난번 인질 사건을 벌였던 아부 사아프였다.

며칠 전 아바 사아프가 마을을 습격해서 32명의 인질을 끌어간 사건이 시작이었다.

관광객이 아니라 주민을 끌고 간 것으로 보아서는 돈을 목적으로 한 납치는 아니었다.

짐작하기로는 며칠 뒤에 있을 필리핀 정부와 모로 인민 해방 전선 사이의 휴전 협정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였다.

그 후 필리핀군은 아부 사아프를 공격해서 11명의 주민을 구출했다.

구출하는 도중에 아부 사아프 반군 다수를 사살했고 다음 날 아부 사아프는 주민 11명을 참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었다.

예전 필리핀에서 작전하는 도중에 아부 사아프에 방어 계획을 넘기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 납치극도 그때 넘긴 방어 계획 때문에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 노력했다.

이번 납치극이 설사 그때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그 책임은 나보다는 그 정보를 넘긴 필리핀군 간부와 방어 계획이 유출됐는데도 보완하지 않은 필리핀 정부에 더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이 조엘이라는 놈은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정신을 못 차리네. 도대체 내가 필리핀에 간다고 해도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총을 들고 반군을 찾아서 저격할 것도 아니고 가서도 할 일이 없었다.

필리핀 민다나오섬 산림에 숨어 있는 아부 사아프를 대상으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여론전과 정보전이었다.

숲속에 숨은 아부 사아프를 상대하는 일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최초 요청이 오고 5일이 지났다.

혹시라도 조엘이 나에게 책임을 미루는 일을 막아야 했다.

나는 정성 들여 CIA 본부에 보고서를 써서 보냈다.

내용은 한동안 에이전트 에스 팀 임무 때문에 지부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지부에서 팀에 직접 요청하는 일을 막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필리핀 지부의 요청을 거부한 명분으로는 충분했다.

나중에 에이전트 에스 팀의 임무가 무엇인지 보고해야 할 일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적당한 이유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체가 없는 조직이었고 당연히 예산이나 인력 지원도 없었다.

다른 공무원 조직처럼 CIA도 예산이 지원된 일이나 부서 중심으로 관리된다.

예산이 지원되지 않는 가상의 조직은 관리할 주체 자체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에이전트 에스 팀의 존재 자체가 잊힐 수도 있었다.

3.

저녁에 리안이 찾아왔다.

다음 투자 계획을 의논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내가 태국으로 한국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한 주가 지나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나를 본 순간 리안이 한 말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몇 시간이 되는 비행기 여행을 세 번이나 했다.

“그러게, 익숙해질 만도 한데 장거리 여행이 제일 피곤한 것 같아.”

“비행기에서는 별로 피곤했을 것 같지 않은데?”

“뭔 소리야. 몇 시간이 걸리는데.”

정색하며 말했다.

“너 이번에는 매번 1등석만 탔다면서? 1등석만 타고 매번 스위트룸에만 묶었으면서 여행이 피곤하다는 것은 좀 아니지 않아? 네가 그러면 비즈니스석이나 이코노미석에 탔던 사람들은 여행하고 나서 움직이지도 못해야 하잖아.”

리안의 말에 나는 잠시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그렇지 비행기 여행 자체는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다.

“몇 시간 안 되지만 시차도 있고 나라마다 미묘하게 날씨도 다르고 말이야. 사람 몸이 알게 모르게 그런 변화에 얼마나 지치는지 너도 알잖아.”

“그렇기야 하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라면 별일 아니었지만, 여행이 피곤하지 않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을 자주 하게 된 지금도 여행은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여행이 피곤하다는 사실을 부정당하는 것은 내가 여행을 하면서 하는 일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팀 분위기는 어때? 내가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

질문에 리안이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너 팀장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직원일 때 생각은 까맣게 잊은 것 같네.”

“그건 또 뭔 소리야?”

“상사가 자리에 없고 자리를 비우는 것을 누가 싫어하겠어.”

리안이 말했다.

리안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나름 내가 좋은 상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권위주의적으로 누구에게 강요한 적도 없었고 팀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주지 않는가.

리안은 물론이고 브레이크가 매번 받는 성과급을 합치면 임원급보다 많았다.

임원들도 연말에 우리 팀의 성과가 반영되면 꽤 많은 보너스를 받겠지만 그래도 그들보다 브레이크가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사무 보조인 카렌이나 얼마 전 합류한 조민은 아직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다음 투자부터 조민에게도 꽤 많은 투자금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면 조민도 꽤 많은 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나마 가장 적게 받는 카렌도 류오린에서 일하는 사무직원들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있었다.

“아니, 나 같은 상사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네가 잘하고 못하고와는 상관없어. 그냥 직장인에게 상사라는 존재가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야.”

리안이 말했다.

“그건 리안 너의 일방적인 생각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직장 생활을 한 게 몇 년인데. 상황과 관계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니까.”

“네 말대로라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나?”

리안이 되물었다.

“직원들 처지에서는 나보다는 오히려 네가 더 상사 같게 느껴질걸? 부팀장일 뿐 아니라 거의 자리를 비우는 나와는 달리 항상 사무실에 있잖아.”

“뭔 소리야, 나야말로 팀원들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하는데. 그리고 조민은 어릴 적부터 알던 동생이자······ 하여간 친한 사이고 브레이크는 몇 년 전부터 알던 친구야.”

“과연 브레이크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리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너 브레이크가 팀에 들어온 다음에 밖에서 따로 만나서 술이라도 마신 적 있어?”

“시간이 맞지 않는데 어떻게 술을 같이 마셔. 나는 낮에는 아시아 시장을 살펴보고 밤에는 나스닥 시장을 살펴봐야 했잖아. 브레이크는 그사이에 러시아 시장을 살펴야 하고 이러다 보면 우리 둘은 시간이 매번 어긋나. 그래서 못 만난 것뿐이야. 브레이크와 내 우정은 변함이 없어.”

“그럴까? 사람은 시간이 나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시간을 만드는 것 아닐까?”

“그래서 결론이 뭐야!”

리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뭐, 상사라는 자리가 문제라면 너나 나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거지.”

리안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런 일까지 지지 않으려고 한다니까. 너 무슨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 같아.”

리안의 말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나도 내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때로는 무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어떤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몇 번 문제가 생기고 난 후에 나는 이 문제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의사는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이 인정을 받기 위해 태양의 마차에 올라탔다가 파멸한 것처럼, 인정 욕구가 지나치면 위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돈을 주고 상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다음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인정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린 시절 받았던 인종차별 때문에 사람들의 무시를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여유를 가지고 목표를 정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 목표만 생각하라는 것이 의사의 처방이었다.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렇게 인정 욕구를 조절하는 일이 가능하면 왜 의사를 찾아왔겠는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해야 할 때였다.

“쓸데없는 대화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네. 일 이야기나 하자. 내일 투자 말인데······.”

일 이야기가 나오자 리안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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