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양이 도살되는 시기는 8월이다
1.
테러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지나갔다.
나는 낮에는 팀원들에게 분배하고 남은 2,100만 달러를 이용해서 한국 증시에 대한 투자를 이어 나갔다.
지난주에 매입을 지시했던 건설주는 그동안 꽤 많이 올랐다.
13일에는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대현건설이 다른 건설주와 마찬가지로 무섭게 오르고 있었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 리안이 나를 찾아왔다.
“뉴스 봤어?”
“무슨 뉴스?”
“오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는데?”
“그래? 정말 찾아갔네.”
“응. 찾아갔더라고.”
고이즈미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올 때부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한국이나 중국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고이즈미로서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친중파로 분류되던 하시모토 류타로와 차별화를 하는 데 성공한 공약이었다.
“뭐 이미 예전부터 한 이야기잖아. 그래도 15일에 참석하지는 않았네.”
“그게 전부야? 너도 한국계잖아.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니야?”
화가 나느냐고?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도 어려운 것이······.
비록 CIA의 지시를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고이즈미가 저런 공약을 내세운 것을 알면서도 그의 당선을 위해 작전에 참여했다.
내가 한 작전 때문에 고이즈미가 당선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고이즈미 당선의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의 구태 정치에 대해 일본 국민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에게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신사 방문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나라 반응은 어때?”
나는 말을 돌렸다.
“당연히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크게 반발하지.”
“그래? 일본 반응은?”
“안 찾아봤는데?”
리안의 말을 들은 나는 직접 일본 기사를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정작 일본은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방문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일본 뉴스에서는 너무나도 나빠진 경제 상황을 비판하는 기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 반응은 어떤데?”
옆에서 지켜보던 리안이 물었다.
“잠시만! 뭐 좀 확인해 보고······.”
나는 차트를 띄워서 고이즈미가 총리로 취임한 4월 말부터 지난 4개월 동안 주가 차이를 확인해 보았다.
“이건 심한데······!”
“뭐가 심하다는 거야?”
리안의 질문에 나는 모니터에서 지난 4개월 동안의 닛케이 지수 차트를 확대해 보여 줬다.
“여기 보면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한 이후 일본 닛케이 지수가 20% 이상 떨어졌잖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일본 닛케이 지수에 투자하면서도 매번 그때그때 주가 흐름만 좇다 보니 이 정도까지 떨어졌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네.”
고이즈미가 나쁜 경제 상황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얼마 전 상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공약대로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정치를 바꿀 것이라고 일본 국민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혁을 위해서는 현재의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고이즈미는 항상 이야기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이야기가 먹혔었다.
하지만 닛케이 지수 차트를 본 순간 나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지지율이 높아도 몇 달 사이에 주가가 20% 이상 떨어지면 문제는 다르지. 아무래도 일본 정부에서 조만간 뭔가 발표할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잖아.”
“그야 그랬지만 이 정도 상황에서는 아니지. 이대로라면 닛케이 지수가 1만 포인트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어. 한 번 정도 뭔가 정책을 내놓을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일본 내 비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 닛케이 선물 포지션을 정리하자고?”
“그럴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난 별로야.”
리안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나는 의외의 답에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 제안을 반대하고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응. 너 며칠 동안 이런저런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한동안 나스닥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독일 그리고 일본까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주가가 내림세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잖아.”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지.”
“그럼 일본에서 무슨 정책을 발표해도 그게 반짝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지속되겠어, 경제 상황 자체가 나쁜데.”
“그렇기야 하지.”
“그렇다면 굳이 확실하지도 않은 경기 부양책을 기대하고 포지션을 청산하는 게 바보짓 아니야?”
리안이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 리안!”
“내 이름은 왜 계속해서 부르는 거야?”
리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 언제 이렇게 시장 흐름까지 보게 된 거야? 차트만 볼 줄 알던 리안이 이렇게 변하다니······. 내가 보람을 느낀다.”
“나 참······.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리안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올 초만 해도 주식 매매도 못 했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내가 너보다 몇 년은 일찍 투자를 시작했거든!”
2.
우리가 서로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조민이었다.
조민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리안은 그런 한기를 느끼지도 못하는지 우리가 나눴던 일본에 관해 나눴던 이야기를 조민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되는 대응 시나리오 같은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리안의 이야기를 듣던 조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닛케이 255 선물과 옵션의 포지션을 일단 정리해야겠네요.”
조민의 말에 나와 리안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들 놀라세요?”
조민의 말에 리안이 말을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분명 우리는 정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는데······.”
리안의 말에 조민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저에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제가 관리하는 투자금 운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준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조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미리 팀장님이나 부팀장님께 동의를 얻으면 도중에도 매매할 수 있다고 하셨죠. 그 재량권을 지금 쓰려고요.”
“지금 그 재량권을 쓰겠다는 말인가요?”
“팀장님은 일본 정부에서 뭔가 경기 부양책을 발표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잖아요. 부팀장님도 굳이 청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그렇지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시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조민 씨 판단에 맡기죠.”
나는 조민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민의 말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조민에게 재량권을 줬다고 하지만 결국 나나 리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직 그녀의 실력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물 거래를 맡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한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한 번 포지션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리안이었다.
분명히 리안이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조민이 포지션을 정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3.
조민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나는 리안을 보며 물었다.
“너 싸웠냐?”
내가 물었다.
“싸우기는 뭘 싸워.”
“그런데 왜 저렇게 나오는데?”
리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일을 구분하나 보지.”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조민이 애초에 우리 팀에 들어온 것은 리안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리안에 대한 감정과 일은 구분한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리안이 어쩔 수 없다는 입을 열었다.
“일요일에 마카오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마카오에 같이 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니 둘이 놀러 가기로 했었던 모양이었다.
요 며칠 대책을 의논하느라 우리 집에 모였던 일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 넌 그런 일이 있으면 이야기를 했어야지. 너 때문에 괜히 나까지 미움받게 생겼네.”
“그건 또 뭔 소리야! 집에서 모이자고 한 것은 바로 너였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조민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을 노려보고 있는 조민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얼른 돌려 리안을 노려보았다.
“약속이 있다고 했으면 회의를 미루거나 너 빼고 만났겠지.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꼭 그날 모일 필요도 없었고······. 생각해 보니 너 지난번 모였을 때 갑자기 조민 이야기를 꺼낸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수상한데?”
내 말에 리안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이왕이면 같이 보면 좋았을 거로 생각한 거지.”
“진작 말했어야지. 약속 이야기나 조민에 관한 이야기를 미리 했으면 좀 다르게 대응했을 거잖아. 무엇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나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인제 와서 굳이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내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리안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다는 거야?”
“본인 앞에서 말하기 좀 그런 이야기인데······ 꼭 듣고 싶어?”
“그럼 너라면 이 상황에서 듣고 싶지 않겠냐?”
나는 대화를 멈추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리안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나는 이 정도면 시간을 끌 만큼 끌었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말해 주지, 별말은 아니야. 대책 회의는 리안 네가 없어도 카이 황 씨만 참석해도 충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뭐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나저나 얼음공주님께서 기분이 많이 상했으니 이걸 어쩐다······. 이거 나한테까지 피해가 오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까지 피해가 가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네가 더 많이 각오하는 것이 좋을걸.”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내가 너와의 회의 때문에 일요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이야기했어.”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나는 리안을 노려보았다.
“그럼 뭐라고 해? 약속을 당일 아침에 어기게 됐는데. 일요일 아침에 약속 못 지키게 됐다고 이야기했더니 조민이 먼저 묻더라고, 어제 너희 집에서 세 사람이 모인 일과 관련이 있냐고.”
“그건 어떻게 알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들었나 보지. 카이 황 아저씨가 집사직을 그만두고 나가신 후에 기강이 좀 해이해졌거든.”
리안이 너무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저 정도면 스토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리안이 조민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데?”
“사실대로 말했지. 의논할 일이 있어서 만나는데, 네가 참석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무슨 의논을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손이 저절로 머리로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기 때문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몇 번 누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 전 그게 나한테 보여 주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말이야?”
“네 말을 들으니 아마도 그런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낮에 따로 만났을 때 너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듯 보이더라고······.”
“미치겠네.”
리안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조민은 너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 인정받겠다면서 열심이니 아마 각오해야 할 거야.”
리안의 미소는 아마도 너도 당해 봐라, 뭐 이런 심정인 듯했다.
조금 전 나를 스토킹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을 한 것이 후회되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조민을 바라보았다.
조민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조민은 아주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리안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내가 없는 동안 무작정 팀에 들어온 그녀가 아닌가?
나는 차라리 내 예상이 빗나가서 일본 정부가 아무런 대책도 발표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일본 정부는 아무런 발표도 하지 않았다.
경기 활성화 대책을 발표한 것은 일본 중앙은행이었다.
일본 중앙은행은 전격적으로 통화 정책 완화를 발표하면서 시장에 대규모로 돈을 풀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날 닛케이 225 지수는 4%나 급등했다.
나는 갑자기 엄습하듯이 덮쳐 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지금은 8월 중순 한여름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양털 깎는 계절’이란 늦봄을 말한다.
그렇게 털이 깎인 양은 8월에 도축을 당한다.
지금 내 심정이 바로 그 도축되기를 기다리는 양이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