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고양이 가죽을 벗기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1.
투자 회의는 크게 의논할 것도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전망이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포지션은 하락 포지션뿐이었다.
그나마 고려할 부분이라면 리안이 S&P500 지수에 대한 투자를 미루고 일단 나스닥에 전념하기로 했다는 부분 정도였다.
주요 투자처인 미국 나스닥과 일본 닛케이 그리고 독일의 DAX 지수 모두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하락 포지션을 유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지난주에 하락 포지션을 잡았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보통 때라면 같은 하락 포지션이라도 일단 청산했다가 다시 포지션을 잡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 투자자들도 지수가 하락하리라 예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칫 선물이나 풋 포지션을 팔았다가는 다시 사지 못하거나 큰 비용이 들 수 있었다.
지난주에는 상승 포지션을 잡았던 신흥 시장도 러시아를 제외한 한국과 홍콩 모두 하락 포지션을 잡았다.
다른 시장과는 달리 러시아 주가가 상승할 것으로 보는 이유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러시아에 이익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으로 투자 회의를 끝내겠습니다.”
내가 회의를 끝내려고 하자 조민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잠시만요!”
나는 조민이 손을 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틀 전 리안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를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리안처럼 조민이 내게 가지는 관심이 이성적인 관심은 아닌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리안에게 보였던 행동을 생각하면 조민이 나를 투자자로서 존경하는 것 같다는 리안의 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조민 씨,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회의에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사실상 짧게는 보름 정도 길게는 한 달 정도 현재 투자를 유지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저는 일하고 싶습니다.”
조민이 말했다.
그녀는 나를 이글이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민은 얼마 전까지 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정확하게는 리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 무관심이 그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외모와 합쳐져서 거리감이 느껴졌었다.
그랬던 조민이 열정이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지금 상황에서 특별히 맡길 일이 없습니다. 조민 씨에게 일을 주기 위해서 수수료나 세금을 부담하면서 억지로 매매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팀장님은 한국 주식을 사고파시지 않습니까? 지난 한 주 동안 거의 20%의 수익률을 얻으셨고요.”
건설주가 대박을 내면서 코스피 시장에서 내 수익률은 20%가 넘었다.
그나마 이건 대형주 위주로 거래해서 적게 나온 수익률이었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거래량 자체가 아주 적었다.
지금 한국 증시 상황에서 내 투자금인 2,100만 달러는 분산한다고 해도 대형주 빼고는 살 주식이 없었다.
“그런데요?”
“그 거래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거래 수수료 중에서 제 몫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팀장님이 어떤 주식을 팔고 사는지 알고 싶습니다.”
조민이 말했다.
그녀는 마치 소년 만화의 열혈 소년 주인공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리안을 보며 눈짓을 보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알겠습니다, 한국 주식 거래를 조민 씨에게 맡기죠. 당연히 거래하면서 발생하는 수수료도 지급할 거고요.”
“감사합니다.”
조민이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를 보며 나는 얼른 홍콩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이 당할 때는 재미있었는데 내가 당하고 보니 이건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나에게는 열정적인 여자.
차라리 조민이 사귀는 상대라면 이런 점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나를 대하는 감정은 철저히 일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물론 조민은 영화 속 ‘애니 윌킨스’와는 다르다.
영화 속 애니 윌킨스 같은 과거도 없고 그 정도로 나에게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애니 윌킨스가 폴 셀던의 능력에 경외감을 가지고 집착을 하는 모습을 조민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자칫 리안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리안의 요즘 행동을 보면 조민과 잘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조민이 내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리안의 부인이 된다는 의미였다.
냉정하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나는 회의를 마치고 리안을 자리로 불렀다.
“한동안 홍콩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아.”
“조민 때문이야?”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겠네.”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마. 너를 존경해서 하는 행동이니까.”
“알지. 그래서 더 곤란해.”
내가 조민을 상당히 피곤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민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나쁜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자라서 그런 행동을 해도 말리는 사람도 문제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그런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도 조민이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거나 깔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과는 생각의 속도나 방향이 다르므로 대화가 안 통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악의가 없다고 해서 그게 상대에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장난이 어떤 이에게는 잔인한 행동이 될 수도 있었다.
여기에 조민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는 대신 자신과 친한 사람이나 인정하는 소수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리안에게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내게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면이었다.
이런 면도 상대로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잘 알지. 그래도 그냥 익숙해지면 처음 보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리안이 말했다.
“그래서 익숙해지는 동안 거리를 좀 두려고. 말했듯이 일단 홍콩을 떠나 있을 생각이야.”
리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시간 나면 같이 가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있어서 그건 힘들겠네.”
“나중에 내가 있는 곳으로 놀러와. 어차피 네 약혼자에게 자주 연락해야 하니까.”
“언제 오려고 나보고 오래?”
“글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음 달 초까지 직접 투자한 사업체 좀 둘러보려고······.”
“그렇게 알고 있을게. 전화하면 전화 꼭 받고!”
“알았어.”
리안과 대화를 마치고 나는 장샤오이를 회사 밖 찻집으로 불러냈다.
그녀에게 일종의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그녀에게 해외 거래를 이유로 전담 팀원까지 뽑으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한동안 2팀에 맡길 거래 자체가 없었다.
나는 장샤오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렇게 된 일입니다.”
내 설명을 듣던 장샤오이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샤오이의 입에서 분노에 찬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샤오이의 모습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게 저 정도로 화를 낼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맡길 일이 없는 것뿐이었다.
“아! 이건 팀장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났던 장샤오이가 당황한 모습으로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밖에서 한동안 장샤오이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돌아온 것은 2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장샤오이는 돌아오자마자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때문에 실례를 했네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심각한 일인 것 같은데요.”
내가 물었다.
나름의 직업병이었다.
스파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특히 장샤오이 같은 사람이 중요한 일 이야기를 하다가 흥분해 뛰쳐나가서 한동안 큰 소리를 낼 정도로 큰일이 뭔지 궁금했다.
내 질문에 장샤오이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운 일이라서 말하기 창피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죠.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정말 제가 큰 실수를 하게 되는 일이니까요.”
장샤오이가 정말 하기 싫은 듯 얼굴을 찡그린 상태로 말을 이었다.
“룽징 차 특상품을 주문했는데, 마셔 보니 명인이 만들기는 했는데 가짜 룽징 차더라고요.”
“가짜요?”
“룽징 차는 본국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룽징 차의 가짜를 팔다니요. 다른 곳도 아닌 외국인이 많이 오는 홍콩의 고급 찻집에서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장샤오이는 여전히 화가 많이 난 표정이었다.
장샤오이는 가짜 룽징 차에 분노하고 있지만 나는 가짜 룽징 차가 많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룽징 차는 중국을 대표하는 차였다.
당연히 차를 좋아하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차이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룽징 차를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중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겉치레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전에는 돈이 없어서 마시지 못했던 사람들이 룽징 차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렇지만 룽징 차라는 것은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시기에만 났다.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장샤오이가 주문한 상품의 룽징 차는 4월 5일에서 21일까지 단 2주만 생산된다.
이런 상품의 가격은 50g에 1,200달러나 됐다.
한정된 생산량, 높은 수요, 그리고 비싼 가격.
가짜가 나돌기에 충분한 세 가지 조건이 다 있었다.
특이하다면 이런 고급 찻집에서 가짜가 팔렸다는 점이랄까?
“주인도 속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내 말에 장샤오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참을 수 없는 일은 이런 찻집의 주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찻집을 하면서 가짜 룽징 차도 구분을 못 하면서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야기해 보니 주인은 진짜 차에 대해서 전혀 모르더라고요, 어이가 없는 일이에요. 종업원이 업자와 짜고 속인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더 화가 나는 일이죠.”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상품의 룽징 차는 나 같은 커피나 홍차를 마시는 사람도 마셔 보면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찻집의 주인이 모르는 것은 절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가짜 룽징 차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버젓이 팔릴 줄은 몰랐어요.”
장샤오이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장샤오이에게서 가짜 룽징 차의 위험성을 들어야만 했다.
한참 후에 우리는 다시 화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3팀에서는 주요 증시가 한동안 약세를 보일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경제 지표가 너무 나쁘다 보니 약세를 벗어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런 정보는 내가 장샤오이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장샤오이는 내가 류오린에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독립하는 과정 그리고 독립한 이후에도 꽤 오래갈 수도 있는 사이였다.
개인적인 친분이 아니라 업무적인 관계라면 서로의 관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내 말에 장샤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아직 좀 더 옥석 구분을 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장샤오이는 흔쾌히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이제 홍콩에서 대충 일이 끝났으니 떠날 시간이었다.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CIA 지부에서 온 요청도 들어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