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자기는 남의 말도 훔쳐 가면서 다른 사람은 자신의 울타리도 못 넘겨 보게 한다
1.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공항에 도착했던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공항에서 비를 보는 것 같았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필리핀도 우기였고 홍콩의 여름은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우기라고 해서 매일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온다고 해도 온종일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다.
이런데도 매번 다른 나라에 가서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마다 비가 오는 일은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공항에는 리코가 마중 나와 있었다.
리코는 지난번 봤을 때보다는 사업가 티가 조금씩 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직접 나오실 것까지는 없는데······. 다음부터는 사람을 보내십시오.”
“아닙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리코가 손짓하자 차 두 대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미리 경호원의 숫자를 알려 줬기 때문에 따로 떨어져 오는 일은 없었다.
앞 좌석에 랄 바하두르가 타고 나와 리코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 차에 타자마자 갑자기 빗줄기가 강해졌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비가 많이 오네요.”
“요즘이 우기가 절정인 시기죠.”
우리는 숙소로 가는 동안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머물렀던 주택에 도착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주택은 꽤 잘 관리되어 있었다.
잠시 후 리코가 사업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기업 업무 외주화(BPO)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인 인포시스에서 사용하는 직원 교육 시스템을 벤치마킹해서 실행하면서 보완하고 있습니다.”
리코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회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20년 전 인도에서 250달러로 창업한 인포시스는 지금은 인도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이자 세계 최고의 BPO 기업이었다.
닷컴 버블 때는 시가 총액이 300억 달러였을 때도 있었다.
비록 지금은 1년 전 주가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인도를 대표하는 기업 기업이었다.
인포시스의 인력 훈련 시스템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리코는 바로 그런 회사의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포시스 직원 교육 시스템은 어떻게 알고 준비한 것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인포시스는 회사 특성상 인력 교육과 관리가 기업의 경쟁력인 회사라서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하다고 하던데요.”
내 질문에 리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BPO를 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인도에 사람을 보내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인포시스 본사는 보안이 너무나 철저해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인포시스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통해서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겉핥기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교육 시스템을 필리핀 내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아서 독자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시범적으로 50명 정도를 교육하면서 내용을 보완해 나가고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칭찬이 저절로 나왔다.
리코가 인력 관리에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할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닙니다. 모두 에드릭 팀장님이 자금을 여유 있게 투자해 주신 덕분입니다.”
“교육이 끝나면 직원들이 일할 곳은 있나요?”
“유통기업체 하나와 서비스 계약이 성사 직전입니다. 다만 대기업 쪽은 아직 계약을 체결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대기업들, 특히 전자 통신 기업들이 대규모로 인력을 감축하고 있습니다. 이건 BPO 기업들로서는 큰 기회입니다. 그런 회사들의 계약을 따내려면 필리핀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고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기존 필리핀의 BPO 기업을 인수라도 하세요. 필요하면 자금은 더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최근 Financial Times나 Wall Street Journal 같은 경제지를 보면 매일 나오는 기사가 대규모 해고에 관한 내용이었다.
루슨트 테크놀러지나 휴렛팩커드 같은 미국 기업은 물론이고 어제는 일본 기업인 후지쓰가 인력의 10%를 감축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정리 해고되는 직원의 수가 1만 6천 명이 넘었다.
직원들을 해고하는 이유는 비용 감축.
그리고 저런 첨단 기술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바로 BPO, 외주였다.
BPO에 가장 앞서 있는 것은 인도의 기업들이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고급 인력 측면에서는 필리핀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이런 BPO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필리핀에서는 대학을 나오고 영어에 능숙한 우수한 인력들이 많습니다. 돈이 들더라도 되도록 우수한 인력을 채용하고 철저히 교육을 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대학을 중심으로 채용 설명회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리 지원자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약한 회사가 늘어나면 차츰 나아지리라 생각합니다.”
2.
내가 리코에게 BPO 사업을 시작하자는 제의를 한 것은 그가 사람을 관리하는 데 재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성과는 내리라고 생각했지만, 리코의 준비나 대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리코를 현지 정보원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이런 준비라면 그 자체로 꽤 전망이 있어 보였다.
“계약하는 회사를 늘리자면 우수한 인력만으로는 부족하겠죠?”
리코의 눈에 착잡하고 곤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자면 회사의 능력 그 이상이 필요하죠.”
물론 그 이상은 뇌물을 말하는 듯했다.
필리핀의 공무원은 뇌물을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건 일반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하면 뇌물이라도 써야죠. 지금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약한 회사를 빠르게 늘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뇌물을 쓰라는 내 말에 리코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뇌물까지 쓰라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리코가 대답했다.
CIA에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돈 때문에 미국의 정보를 파는 것을 가장 중대한 범죄로 보는 CIA지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이 바로 돈으로 정보를 빼내는 것이었다.
‘자기는 남의 말도 훔쳐 가면서 다른 사람은 자신의 울타리도 못 넘겨보게 한다.’는 말처럼 본래 누구나 자신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법이었다.
아마 리코에게서 뇌물을 받을 사람들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업을 하자면 경찰들의 도움도 많이 필요할 텐데······. 예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BPO 사업은 기본적으로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신경 써야 하는 사업이었다.
특히 회사와 직원들 사이, 직원들 사이, 마지막으로 직원들이 회사 밖에서 사고에 휘말렸을 때 경찰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전 직장 동료들과의 사이는 좋습니다. 이번에 일을 시작하면서 전 직장에서 알던 직원들 가족도 몇 명 채용했고요. 이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리코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점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그는 경찰을 퇴직했지만 나를 만나기 전에는 경찰 조직 밖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경찰 쪽 인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에요, 아무리 리코 씨가 경찰 출신이라도 해도 그런 인맥은 많을수록 좋죠. 혹시 경찰 고위직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번에 채용한 직원 중 두 명이 그 간부급의 딸입니다. 물론 간부의 딸이라고 그냥 채용한 것은 아니고 능력도 모두 뛰어난 직원들입니다.”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혹시 아는 정치인은 없습니까?”
“정치인요?”
리코가 되물었다.
“사업이 커지면 경찰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리코가 말을 흐렸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정치인과 접촉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BPO 회사는 대규모 인력을 고용하는 회사입니다. 그것도 여기 필리핀에서는 직원 대부분이 젊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이른바 여론 주도층이죠. 이런 회사를 운영하려면 리코 씨가 원하지 않더라도 정치인들이 먼저 접근해 올 겁니다. 그때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느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팀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낫겠군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혹시 아는 정치인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있기는 합니다만······.”
리코가 말을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게, 지금은 야당 소속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먼저 연락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야당이면 어떻습니까?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회사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자칫 팀장님께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어느 나라든 돈을 투자하겠다는 외국인 투자자, 그것도 직접투자하겠다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 나라는 없으니까요. 이야기해 보세요.”
리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3.
나는 속으로 리코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리코의 입에서 내가 생각했던 이름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판필로 락손(Panfilo Lacson) 상원 의원을 경찰 시절에 모신 적이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이름이 나왔다.
“판필로 락손 상원 의원이라면 경찰청장 출신 아닙니까?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분이고요.”
“맞습니다.”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필로 락손은 필리핀에서 내가 요청을 받은 작전의 대상이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작전의 대상으로 선택할 예정인 사람이었다.
예전에 리코에게서 그가 90년대 후반에 반범죄위원회 산하 조직에서 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작전 대상인 판필로 락손 상원 의원이 바로 그 반범죄위원회 특별수사대의 수장으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리코를 만나러 왔는데 운이 좋았다.
“비록 야당 의원이지만 판필로 락손 상원 의원 같은 거물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정계에서의 요구는 모두 거절할 수 있겠군요.”
내 말에 리코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판필로 락손 의원은 뇌물이 통하지 않는 분입니다. 경찰로 계실 때도 온갖 유혹에도 모든 뇌물을 거절하셨습니다.”
“뇌물을 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필리핀의 미래는 서비스업에 있고 BPO는 그중에서도 고용과 산업계 모두의 도움이 되는 사업입니다. 판필로 락손 의원에게 이런 점을 이야기하면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죠.”
리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코 씨가 언제 뵙고 BPO 사업의 취지를 설명해 주세요. 특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분명히 하시고요.”
“제가 말입니까? 투자하신 팀장님이 직접 만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그래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뇌물을 받는 것을 꺼리시는 분이 외국인 투자자를 만나려 하시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도 그렇겠군요.”
“그렇죠.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투자만 했을 뿐 사업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리코 씨입니다. 이 사업의 대표는 당연히 리코 씨죠. 대표도 아닌 제가 이 사업으로 만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업 아이디어나 방향도 제시해 주시고 투자까지 하신 분은 팀장님이신데, 제가 어떻게······.”
내 말에 리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감격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사업을 계속해서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두 달 만에 왔는데 뭘 하겠습니까, 리코 씨가 알아서 해 주세요. 대표로 있으시면서 회사 상황이나 여기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을 제게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코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작전 대상이 정해졌으니 엘만 지부장을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5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