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25화 (126/270)

#126. 오월에 태어난 닭은 제대로 울지 못한다

1.

접선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CIA 요원인 조엘이었다.

그와는 내가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나에게 인질 관련 사건으로 계속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내가 다시 필리핀에 왔을 때는 CIA 필리핀 지부장인 엘만과 함께 일을 했다.

엘만 지부장과 함께 일을 하면서는 한동안 조엘은 보지 못했다.

나중에 엘만 지부장에게 듣기로는 조엘은 민다나오섬에서 필리핀 군 첩보부와 임무를 수행이라고 들었다.

내가 조엘의 행동에 불만을 털어놓은 영향이었다.

나는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하며 말했다.

“조엘 씨 아닙니까? 오랜만입니다. 어디 갔다 오셨나 보네요!”

내 질문에 조엘은 한동안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엘은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생 좀 했죠.”

조엘이 말했다.

다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엘이 말을 이었다.

“이제 수이진 씨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렇게 불러 주시면 됩니다.”

“지부장님은 일이 있으셔서 조금 늦으실 것 같습니다. 저에게 먼저 가서 수이진 씨에게 양해를 구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알겠습니다. 기다리죠.”

나는 조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조엘을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다.

반대편에서는 조엘이 나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아마도 나 때문에 민다나오섬에서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더구나 자신을 겨우 이런 일로 나에게 보내서 사과하는 것도 못마땅한 듯했다.

그래 봐야 조엘 자신의 손해였다.

조엘은 지금도 엘만 지부장이 자신을 나에게 보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엘만 지부장이 굳이 조엘을 보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했다.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엘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컸다.

엘만 지부장이 조엘이 내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더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뜻일 경고!

지부장에 약속 시각에 늦은 것으로 사과할 정도로 내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조엘에게 확인해 준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었다.

조엘이 바보가 아니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닫겠지만, 그때는 이미 엘만 지부장의 신뢰를 완전히 잃은 다음일 것이다.

조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나는 오면서 산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2.

엘만 지부장이 온 것은 1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엘만 지부장은 들어오면서 사과부터 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급자인 제가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사람을 보내서 양해를 구하면서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이러시면 많이 부담됩니다.”

“눈치챘나? 하하······. 자네가 부담 가지라고 한 일이네. 자네 한 번 보기가 좀 어려워야지.”

엘만 지부장이 그동안 내가 요청을 거부한 것을 지적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팀의 임무가 우선이라서요.”

내가 사과했다. 사과의 형식으로 취한 변명이었다.

“아니네, 팀의 임무를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지. 오히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요청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필리핀으로 제일 먼저 달려와 준 것이 고맙네. 그래, 에이전트 에스 팀의 임무는 끝난 건가?”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여전히 임무 때문에 정신이 없죠. 하지만 마침 필리핀에 올 일이 있어서 지부장님의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지부장님이 지난번에 잘해 주신 것도 있고 이번 일은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임무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임무가 완전히 끝났다고 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임무를 떠맡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운이 좋았군. 그래, 방법이 있겠나?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을 보니 좋은 계획이 있을 것 같은데.”

엘만 지부장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적당한 시점에 아로요 대통령을 저격할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엘만 지부장의 요구는 아로요 대통령을 저격할 적당한 인물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로요 대통령을 저격할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진짜로 총으로 저격할 사람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CIA가 찾는 저격수는 아로요 대통령을 적당한 시점에 공격해서 재선을 막을 수 있는 폭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저격수를 의미했다.

“그러네. 아로요 대통령이 친미파이기는 한데 우리는 필리핀이 조금 더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네. 어느 정도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야 중국을 견제할 텐데,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답이 없거든······. 아로요 현 대통령은 선거가 아니라 탄핵을 통해서 대통령을 물려받아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한마디로 현재의 아로요 대통령은 5월에 태

어난 닭이라고 할 수 있지. 힘이 없어.”

‘오월에 태어난 닭은 제대로 울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약하게 태어나면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지도자가 정통성을 가지고 집권하지 못할 때는 강하게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선거를 통해서 당선되는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서 검증됐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알다시피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쫓겨나면서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로요 대통령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대통령과 많은 점이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전 대통령의 딸로 부통령이었다가 대통령이 쫓겨나면서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렇지만 실제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의 권력은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대통령보다 훨씬 취약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아버지인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국부인 것에 비해 아로요 대통령의 아버지인 필리핀의 마스파갈 대통령은 그 정도 위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수하르토의 독재를 끝낸 투쟁을 이끈 정치 지도자였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같은 역할을 한 아키노 대통령의 측근일 뿐이었다.

물론 아로요 대통령도 부통령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하지만 부통령으로 선출된 것과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지도자는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한다.

선거에서 표를 준 유권자는 자신이 선출한 대통령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과정을 통해서 대통령직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피플파워라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제2차 피플파워의 지도자 중 한 명일 뿐으로 그녀 외에도 다른 계파가 함께 이뤄 낸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아로요 대통령의 주요 공직 상당수는 아로요 대통령에게 충성한다기보다는 지난번 제2차 피플파워를 주도했던 세력들이 나눠 가졌다.

아로요 대통령의 권력은 대단히 취약했다.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게다가 한때 동지였던 아키노 가문과 사이도 좋지 않아. 재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전망이 그리 밝지 않네. 어차피 필리핀을 거대 가문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다음 대통령이라도 조금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판단이네.”

필리핀은 대통령이 재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로요는 전임자인 에스트라다가 탄핵을 당하면서 대통령이 된 것이기 때문에 다음 대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아로요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 나올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CIA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아로요를 끌어낼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 아니 CIA가 다음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군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내가 물었다.

“라울 로코, 현 교육부 장관이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서 미국에 꽤 호의적이네. 무엇보다 1998년 대선에서 무소속 후보인데도 꽤 좋은 성적을 거뒀지. 다음 대선에서 제대로 된 지원만 있다면 다음 대통령이 될 가장 큰 후보 중 하나라고 생각하네.”

“예상했던 이름이군요.”

라울 로코는 필리핀에서도 알아주는 천재였다.

열 살에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4세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18세에는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다시 법학을 공부하기 학교를 다시 다녔다.

법학도 시절에는 필리핀 전국 대학생 연합회의 회장이면서 필리핀에서 가장 뛰어난 열 명의 학생 중 하나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런 로코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40대에는 변호사협회 회장으로 베니그노 아키노의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변호사를 활동하면서도 영화를 만들어 그해 필리핀의 영화상을 휩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천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현재 라울 로코는 필리핀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교육부 장관으로 있는 지금은 여러 가지 개혁적 조치로 행정력까지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필리핀의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라고 할 수 있었다.

3.

“라울 로코를 차기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제가 저격수로 적당한 사람을 찾은 것 같네요.”

이때 옆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찾은 사람이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엘만 지부장의 옆을 지키던 조엘이었다.

나는 조엘을 잠시 바라보고는 엘만 지부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판필로 락손(Panfilo Lacson) 상원 의원 어떻습니까? 아로요 대통령을 공격하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 같은데요.”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락손 상원 의원? 너무 거물 아닌가?”

판필로 락손은 에스트라다 대통령 재임 시절 경찰청장으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였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쫓겨난 직후 경찰청장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는 아로요 대통령을 쫓아내기 위해 모였던 3차 피플파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제3차 피플파워 집회는 실패했지만, 판필로 락손은 5월 중간선거에서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말 그대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측근이자 아로요 반대 진영의 거물이었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폭로해도 아로요 대통령에게 타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판필로 락손은 경찰청장 시절부터 공무원 사회에 만연된 부패와 싸우는 이미지도 있으니 가장 딱 맞는 인물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엘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판필로 락손 상원 의원이 직접 나서겠나? 판필로 락손은 야망이 의외로 큰 인물이네. 아로요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는 있지만 대신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일이야.”

그의 말대로 대통령을 공격하는 저격수는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거물이 직접 폭로하는 경우는 어느 나라나 적었다.

아무리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라고 해도 대통령이 될 정도라면 지지층과 정치적 기반이 확고했다.

판필로 락손이 아로요 대통령을 공격하는 일은 자기 지지층에서는 환호를 받을 수 있지만, 아로요 대통령 지지자들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판필로 락손이 그 일을 하게 해야죠. 아시겠지만 판필로 락손이 대권 후보를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경찰청장 시절 가지고 있던 개혁적 이미지 때문입니다. 라울 로코 장관과 어느 정도 이미지가 겹치는 부분이 있죠. 라울 로코 장관을 진짜로 대통령으로 밀 생각이 있으면 판필로 락손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같은 이미지의 두 정치인이 있다면 그중 한 사람이 낙마해야 다른 정치인이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알지만 문제는 판필로 락손을 어떻게 그 일에 나서게 하느냐는 것 아닌가?”

판필로 락손은 에스트라다 지지자들에게서 잠재적 대권 후보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굳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없었다.

엘만 지부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는 로요 대통령과 판필로 락손에게 타격을 줄 만한 작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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