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26화 (12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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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계략을 연속으로 사용해서 정확한 의도를 모르게 한다.

1.

“판필로 락손 의원이 아로요 대통령이 먼저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끼게 해야죠.”

“방법이 있겠나?”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판필로 락손 의원이 나서고 싶지 않아도 대통령이 자신을 계속 공격한다고 생각하면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 대한 공격과 대통령의 부패에 대한 폭로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까요.”

“쉽지 않게 들리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뭔가?”

“우선 적당한 정부 관계자가 판필로 락손 의원이 경찰청장 시절 갱이나 마약상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믿겠나? 판필로 락손은 경찰청장 시절부터 그런 문제에 관한 한 깨끗한 것으로 알려져 있네.”

엘만 지부장이 다시 물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 필리핀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정부는 다 썩었다고 생각합니다. 덜 썩은 놈과 더 썩은 놈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죠. 판필로 락손에 대한 폭로가 나오면 아마 필리핀 국민은 저놈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살면서 깨끗한 경찰보다는 부패한 경찰을 보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나중에 판필로 락손에 대한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때는 사람들에게 판필로 락손 하면 마약상에게 돈을 받은 경찰청장 출신으로 먼저 기억될 겁니다.”

“그다음은?”

“이 폭로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때가 되면 내년쯤에 또 다른 의혹을 폭로해야죠. 괴벨스가 말했듯이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되는 법이죠.”

“그렇게 공격받으면 아무리 판필로 락손이라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군. 경찰청장 출신이니 아로요 대통령 쪽 비리도 쉽게 찾을 수 있을 테고 말이야.”

“그렇게 서로 공격하게 만다는 것이 작전의 목적입니다. 이 방법은 사용하면 아로요 대통령과 판필로 락손을 서로 공격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마리 개가 뼈 하나를 가지고 싸우면, 다른 개가 그 뼈를 얻는 법이죠. 바로 그 다른 개는 라울 로코 현 교육부장관이 되어야 하고요.”

“좋군. 좋은 계획이네.”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 작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2.

“문제가 있다고? 그게 뭔가?”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판필로 락손이 갱이나 마약상에게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알다시피 판필로 락손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저런 비밀을 알아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 비리를 폭로해야 합니다. 물론 아로요의 측근이라고 생각될 만한 정부 쪽 인물로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적당한 사람이 있으니까.”

엘만 지부장이 너무 쉽게 대답했다.

의외였다.

어제 나도 생각해 봤지만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몇몇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폭로를 시킬 방법이 없었다.

“있습니까?”

“있네. 지금 군 정보기관을 이끄는 빅터 코르푸스(Victor Corpus)라면 어떤가?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 아닌가?”

엘만 지부장의 이름에서 나오는 이름에 나는 저절로 입을 벌어졌다.

그 정도로 빅터 코르푸스는 충격적인 이름이었다.

“허······ 빅터 코르푸스요? 그 사람이야말로 거물 아닙니까?”

“자네도 알고 있나 보군.”

엘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핀 군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름 아닙니까? 필리핀을 조사하면서 그가 쓴 《소리 없는 전쟁》(Silent war)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빅터 코르푸스는 아주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필리핀 육군 사관학교를 나온 엘리트 특수전 장교였던 빅터 코르푸스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 필리핀 공산 반군으로 전향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한때 사관학교 무기 창고를 습격하기도 하는 등 꽤 큰 성과를 거뒀다.

이런 활약으로 공산 반군 내에서 빅터 코르푸스의 지위는 최고 지도부까지 올라갔었다.

코르푸스가 다시 전향한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전향한 이후 그는 쭉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 그가 풀려난 것은 제1차 피플파워가 성공한 직후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빅터 코르푸스는 다시 군대에 재입대했다.

군 정보기관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공산 반군과 이슬람 반군에 대한 비정규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올해 초 아로요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군 정보부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계급은 대령이지만 아무도 그를 일개 대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상 필리핀 정보 분야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엘만은 그런 인물을 이런 일에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3.

“코르푸스는 우리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네. 우리가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얼마 전 잡았거든.”

“약점이라니요?”

내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약점이기에 필리핀의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를 폭로에 이용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어제 일어난 호텔 화재 사건을 알고 있나?”

나는 엘만이 오기 전 봤던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70명이 사망한 호텔 화재 사고 말입니까?”

어제 마닐라 싸구려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묵고 있던 70명이 사망했다.

필리핀에서 5년 만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였다.

“그래, 바로 그 화재 말이야. 그 화재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설마 그게 필리핀군 정보기관에서 벌인 일이라는 말씀입니까?”

내 질문에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올해 들어서 필리핀군은 공산 반군들을 처리하고 있지. 일종의 비합법적 처형이지.”

엘만 지부장이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CIA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작전의 이름이었다.

“설마 피닉스 프로그램의 필리핀 버전입니까?”

피닉스 프로그램은 CIA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작전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CIA가 벌인 작전으로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을 섬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피닉스 프로그램은 크게 보면 두 부분이었다.

첫 번째는 첩보 요원을 몰래 잠입시키거나 혹은 베트콩 포로 혹은 납치한 공산주의자를 고문이나 회유 협박해서 정보를 빼내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정보 수집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에게 협조적인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베트콩의 지도부 혹은 주요 구성원으로 이뤄진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이 첫 번째 작전의 최종 단계였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블랙리스트 명단을 토대로 암살 또는 비합법적인 살인을 하는 과정이었다.

피닉스 프로그램을 통해 CIA는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른바 ‘교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최소 2만 명에서 많게는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암살 또는 살해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닉스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군.”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진짜 이 작전이 필리핀군이 생각해 낸 것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베트남에서의 피닉스 프로그램에는 미군도 참여했지만 실제로 수행한 것은 베트남의 민간인이 주축이 된 병력이었다.

어쩌면 에스트라다를 쫓아내고 아로요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유가 바로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 반란을 주도하고 있는 국민민주전선(NDF)는 주로 빈민가를 중심으로 암약하고 있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필리핀 하층민과 빈민이 그의 지지기반이었다.

만약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이었다면 피닉스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비합법적 살인이 시행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의심이 갔지만, 엘만 지부장에게 묻지는 않았다.

내가 알 필요도 없지만, 굳이 진실을 알아서 마음의 부담을 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70명이나 되는 사람을 화재로 죽이는 것은 좀 심한 일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내 나름의 작은 항의라고 할 수 있었다.

“70명이나 사망한 일은 사고라고 하더군. 비정규 작전에서 희생이 어느 정도 용인된다고 해도 70명을 한 번에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렇습니까?”

“NDF의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자를 처형하고 화재로 위장했는데 호텔 쪽에서 비상구를 막은 것을 몰랐던 거지.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고······.”

“그 작전을 실행한 것이 필리핀군 정보부대라는 말이군요.”

내가 말했다.

“맞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리 빅터 코르푸스가 대단해도, 아로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도 처벌을 면하지 못하지.”

엘만 지부장이 미소를 지었다.

4.

사람이 70명이나 죽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약점을 잡았다면서 미소를 짓다니······.

요원이라는 것이 참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문득 나는 정말 70명이 사망한 일이 정말 실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파악한 빅터 코르푸스는 전략에 밝은 인물이었다.

단순히 이론만 밝은 것이 아니라 공산 반군을 지휘할 때는 게릴라전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빅터 코르푸스가 단순한 변절자였다면 군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책에서 손자병법 같은 동양의 병법을 자주 인용했었다.

클라우제비츠로 상징되는 서구의 전술이 물리적이고 양적인 직접적 행동이라면, 동양적 전술은 간접적이고 전략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힘을 파괴하는 것은 언제나 최상이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이 수단 외에 다른 수단들은 없어도 된다.’고 그의 책에서 말했다.

반면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싸울 때마다 이기는 것은 최고의 방법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도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전술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합법적 살인을 감추기 위해서 호텔에 화재를 발생시키는 것 자체가 이런 동양적 전술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화재로 70명이나 사망한 것이 작전 중에 발생한 불행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CIA가 설마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 70명을 죽일 수 있는 조직이냐고?

당연히 그런 조직이었다.

상대는 필리핀의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빅터 코르푸스였다.

그가 언제까지 군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에서 퇴역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필리핀 정보기관을 간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필리핀 70명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 조직이 CIA였다.

이것은 필리핀군이 지금 실행하고 있다는 비합법적 살인의 원형인 피닉스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닉스 프로그램이 실행된 시간은 단 3년이었다.

그동안 직접 살해된 사람만 4만 명이었다.

매일 40명 이상을 살해한 것이다.

극도의 직접적인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였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이런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행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일로 제 계획의 빠진 톱니바퀴가 완성된 셈이네요. 빅터 코르푸스라면 이보다 더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라면 판필로 락손을 공격하기에 적임자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필로 락손도 경찰청장을 하기는 했지만, 본래는 빅터 코르푸스와 마찬가지로 필리핀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이니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아주 좋은 계획이야.”

이로써 아로요 대통령이 임명한 빅터 코르푸스가 판필로 락손을 공격하고, 그 판필로 락손이 다시 아로요 대통령을 공격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서 라울 로코가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나는 애초에 엘만 지부장이 라울 로코 장관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로요 대통령이 5월에 태어난 닭처럼 지지 기반이 약해서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미국에 나쁜 상황이냐?

전혀 아니었다.

CIA에 빚을 지고 있는 지지기반이 약한 외국 정상!

이보다 CIA가 활약하기에 좋은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울 로코를 지지한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라울 로코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보다는 그를 통해 아로요 대통령을 흔들려는 목적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울 로코가 아로요 대통령에게 위협적이면 위협적일수록 아로요 대통령은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몸담은 CIA는 그런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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