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27화 (128/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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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손에 묻은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

1.

“죄송합니다, 락손 의원 쪽에서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전갈을 비서를 통해 받았습니다.”

리코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 있게 판필로 락손과의 접촉을 시도했던 그로서는 약속 취소에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인 아닌가요? 리코 씨 잘못도 아닌데요. 폭로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아무리 예전 부하라도 외부인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약속을 취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는 리코를 위로했다.

판필로 락손 상원 의원에 대한 빅터 코프루스의 폭로는 필리핀 정계를 혼란 속으로 몰고 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필로 락손 위원이 정말 돈을 받았을까요?”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는 판필로 락손 의원은 돈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마약상의 돈을 받았다고요?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리코가 말했다.

격앙된 목소리였다.

아마도 판필로 락손의 결백을 확신하는 듯했다.

“여론은 어떻습니까?”

“판필로 락손 의원이 경찰청장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번 폭로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래요?”

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그래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계획을 만든 것은 나였지만 이번 폭로를 실행한 사람은 빅터 코르푸스였다.

게릴라 활동과 첩보전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엘만 지부장에게 듣기로는 판필로 락손이 마약상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증거나 증인도 있었다.

조작되기는 했지만, 형식은 갖춘 셈이었다.

“경찰 자체를 불신하는 국민이 많다 보니 혹시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리코가 말했다.

이 정도면 작전은 성공한 셈이었다.

어차피 판필로 락손을 처벌을 받게 하거나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 시작한 폭로가 아니었다.

“야당이나 공무원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야당 쪽에서는 필리핀 정부의 탄압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분위기입니다.”

“그렇겠죠. 판필로 락손이 에스트라 측근 중 한 명이자 5월 초에 있었던 집회를 이끈 지도자였으니까요.”

“야당 쪽에서는 특히 이번 폭로가 경찰이나 검찰 쪽이 아니라 군 정보기관에서 나온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군부가 야당 인사를 사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일단 빅터 코르푸스 쪽에서는 아로요 대통령이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권력형 범죄 조사를 지시했다고 해명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이번 일이 군부 친위 쿠데타를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필리핀에서 군부 쿠데타는 아주 낯선 일은 아니었다.

마르코스 정부를 무너트리고 성립된 아키노 정부 시절에는 여러 번의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단순한 시도 수준이 아니라 당시 아키노 대통령의 아들이 총에 맞기도 했었다.

엘만 지부장도 지적했지만 현 대통령인 아로요는 권력의 지지 기반이 약했다.

장관들에 대한 인사권도 온전히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권력이 약한 상태에서 친위 군부 쿠데타는 효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입니다. 군부의 힘이 강하던 80년대도 실패한 일입니다. 필리핀의 가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군부 쿠데타를 지켜보겠습니까?”

리코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2.

필리핀은 알면 알수록 특이한 나라였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인데 사실상 거대 가문들이 지배하는 귀족정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조차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럼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리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걱정되는 부분요?”

“예. 지금 정황을 보면 군 정보부대가 판필로 락손 의원을 감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렇다면 자칫 이번 일로 사업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까 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

“정부 쪽에 락손 의원과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사업을 방해하고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그럼 일단 판필로 락손 의원과의 접촉은 무기한 연기하고 현 정부에서 적당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으로요. 특히 아로요 대통령 남편이 자금을 모은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알겠습니다.”

리코가 대답했다.

이로써 필리핀에 온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정보 세계의 비정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필리핀군이 시행하고 있는 무자비한 비합법적인 살인이나 그런 상황을 이용하는 CIA의 행동이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내가 어쩌다 현장 요원처럼 활동하고는 있지만, 현장 요원이 될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은, 이런 일에 나도 어느 정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스트라다와 아로요 누가 더 필리핀에 좋은 대통령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로요가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지금 필리핀군이 실행하고 있는 일은 비합법적인 살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필리핀군의 비합법적인 살인으로 희생될 것이다.

나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본티오 빌라도가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라면서 손을 씻어도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처럼······.

내 손에도 피가 묻은 셈이었다.

3.

“그러니까 현재 포지션을 계속 유지하라는 말이지?”

-맞아. 금리를 인하했는데도 떨어지면 답이 없는 거지. 당분간 그대로 유지해.

리안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난주는 금리의 마법사 엘런 그린스펀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한 주였다.

매번 적절한 금리 인하로 러시아 금융 위기와 닷컴 버블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벗어난 그린스펀이었다.

하지만 지난주에는 금리 인하를 했는데도 시장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뉴욕에서 금리 인하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다음 날 출근한 팀원들은 조금 동요했다.

포지션을 청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낸 사람도 있었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리안 본인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에드릭의 신도가 되어 버린 조민이나 러시아 지수 상승에 투자하고 있는 브레이크는 침착을 유지했다.

하지만 리안 자신은 연준 금리 인하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스닥에 투자하다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에드릭은 잠시 하루나 이틀 정도 더 기다려 보자고 이야기했다.

금리 인하에도 나스닥은 하락했다.

에드릭의 판단이 이번에도 정확했다.

“에드릭, 넌 지금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 선물과 옵션 모두 하락 포지션을 잡은 우리 팀으로서는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상황이 심각해. 당장 여기 홍콩에 진출한 미국과 유럽 기업 상당수가 구조 조정을 한다고 난리야.”

-잘됐네.

“잘됐다고?”

-그래. 카이 황 씨에게 말해서 이번 기회에 괜찮은 인력 좀 채용하라고 이야기해. 지금 실적이라면 괜찮은 인재를 영입할 수 있을 거야. 원래 진짜 부자는 이런 불황에 태어나는 거야. 지금부터 준비했다가 내년 독립하고 단단히 보여 주자고.

“자본가가 다 됐네. 남의 불행은 내 행복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우리 투자금이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5억 달러 넘었어. 경기는 몰라도 미국 주가 살아나려면 내후년인 2003년 상반기나 되어야 할 거야. 어쩔 수 없으면 따라야지.

에드릭의 이번 예상이 맞는다면 금융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번 겨울은 물론이고 내년에도 추운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리안도 만약 에드릭을 만나지 않았다면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경제적으로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가문을 일으키는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정신적으로는 꽤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2003년 장쩌민 주석이 물러나는 것을 기다리는 일에 꽤 지쳐 가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간다고?”

-그래야 할 것 같아.

“얼마나 있을 건데?”

-몰라. 이번 기회에 한국에서 몇 달 머물까 생각하고 있어.

“하······!”

리안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야,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리안은 전화를 끊었다.

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쪽을 바라보던 조민이 일어나 다가왔다.

“팀장님은 언제 귀국하세요?”

조민이 다짜고짜 물었다.

“몰라!”

조민의 질문에 리안이 딱 잘라 말하고는 덧붙였다.

“필리핀에서 바로 한국으로 간다고 했으니 귀국하려면 오래 걸리겠지.”

리안의 대답에 조민이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안은 그런 조민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드릭은 잠시 피하면 되리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착각이었다.

예전에는 리안도 피하면 될 줄 알았다.

경험자로서 예상하자면······.

조민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 고백한 이후 무려 10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다.

10년 전 열두 살이던 조민이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리안은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이제 막 들어간 애가 무슨 고백이냐고 핀잔을 주며 학교나 졸업한 이후에 오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러자 조민은 월반을 거듭해서 3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찾아왔다.

그제야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이후였다.

10년 동안 열두 살짜리 소녀는 스물두 살이 되었고 리안도 결국 얼마 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리안도 연애결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누리는 만큼 짊어져야 할 의무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조민은 나쁜 상대가 아니었다.

리안의 목표인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조민의 배경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에드릭은 알까?

지금 조민을 피하는 일을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4.

나는 필리핀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정윤호에게 지시했던 아버지 사건에 대한 조사에 듣기 위해서였다.

복수하기 전에 먼저 진상을 알아내는 일이 우선이었다.

문제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황당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간첩으로 몰려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미국으로 왔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가 간첩으로 체포됐었던 기록 자체가 없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간첩에 대한 사건은 국정원이나 경찰로서는 승진할 큰 기회였다.

기록이 있어야 훈장을 받고 승진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윤호가 당시 신문 기사까지 다 조사했지만, 아버지에 관한 기사나 기록 자체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나요?”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그래요?”

“팀장님 말씀대로라면 팀장님의 아버님이 간첩으로 몰려서 재산을 강탈당했던 것은 1970년입니다. 맞습니까?”

“대충 그 정도로 기억합니다.”

“아시겠지만 그때는 1971년 대선 직전입니다. 정부가 막대한 대선 자금을 모을 때죠.”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는 우연히 나에게 몇 명의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중에는 큰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은 물러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고 평가받은 정치인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선 자금과 관련된 일이라면 전혀 문제가 달라진다.

당시 대통령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지 오래였다.

“그럼 그 대선 자금 때문에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리고 재산을 강탈당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내 질문에 정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당시 대선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는 꽤 지저분한 방법이 여럿 동원됐습니다. 그 와중에 슬쩍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군요.”

“자세한 것은 조사를 더 해 봐야 합니다.”

“그럼 계속 조사해 주세요.”

쉬운 일이 없었다.

나는 정윤호를 돌려보내고 시선을 모니터로 향했다.

모니터에는 리젠트증권 주식이 모두 매각됐다는 창이 있었다.

참 돈 벌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젠트증권은 아침부터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호재는 메릴린치증권이 리젠트증권을 인수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메릴린치 미국 본사는 지금 구조 조정이 한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증권사를 인수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헛소문에 가격이 오르는 것이 한국 증시였다.

이런 시장이라면 굳이 홍콩에 매매를 맡길 필요도 없었다.

한국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돈이나 벌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복수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복수할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배승윤.

아버지의 차를 운전했다는 사람으로, 지금은 경기도에서 건설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도 조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배신한 인간이었다.

바닥까지 떨어져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면 어떨까?

뼈다귀만 물려 주면 꼬리를 흔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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