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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8월에 내리는 비는 와인과 꿀을 풍성하게 만든다
1.
정윤호에게 아버지의 운전기사였다는 배승윤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나는 다시 내 본업으로 돌아왔다.
본업은 당연히 투자였다.
이틀 정도 해 보고, 나는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투자 종목 선택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처음 주식 투자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가격에 주식을 사고파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데 비까지 내리니 더 짜증이 났다.
가는 곳마다 내리는 비가 이제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8월에 내리는 비가 와인과 꿀을 풍성하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나는 농부가 아니었다.
나는 결국 도와줄 사람을 홍콩에서 불러들였다.
지난번 외환 투자 때 만났던 제러미 하, 하성철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성철이 내가 내민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들으셨죠?”
내가 물었다.
“카이 황 대표님께 잠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잘됐네요. 들으셨으면 알겠지만, 저도 W&R의 주주 중 한 명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W&R의 사람 중에는 카이 황 대표님뿐입니다. 제가 왜 사실을 숨긴지는 짐작하시고 있겠죠?”
“이해 충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자신이 주주인 회사를 투자금을 직접 관리하는 일은 최근 들어 세계 금융 당국에서 강하게 단속하는 일 중 하나였다.
류오린은 고객들에게 투자 정보를 서비스하면서 특정 회사 주식을 추천하거나 특정한 투자를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직원 중 한 명이 고객 중 하나와 유착이 된다면 이해가 충돌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니더라도 류오린 직원이 W&R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한 추천서를 쓰거나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그렇게 W&R이 주식을 판 후에 떨어지면 고객은 의심할 수 있었다.
류오린이 직원이 소유한 회사를 위해서 잘못된 보고서를 쓰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었다.
나는 이런 이해 충돌을 피하고자 다른 고객을 받지 않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주가가 내려가는 시기에 손해를 본 사람들은 원망하거나 비난할 대상을 찾게 마련이었다.
W&R은 그렇지 않아도 선물거래로 막대한 돈을 벌어서 홍콩 금융계에서 미움을 받고 있었다.
“만약 제가 W&R의 주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해 충돌을 이유로 우리 거래 명세를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이 분명 나타날 것입니다.”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저라도 W&R의 거래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명세를 확인하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관여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높은 수익률을 얻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니까요. 저 같은 W&R의 내부자도 그런데 외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하성철이 말했다.
상당히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 오신 것이 좋은 기회겠네요.”
하성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하성철 씨가 여기 W&R 한국 사무소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예?”
내 말을 들은 하성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무소를 맡으라고요? 잠시 팀장님의 일을 돕는 게 아니라요?”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국에는 지속해서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직원이 계속 머무는 것이 좋다는 판단입니다.”
“대표님께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만······?”
하성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하성철 씨가 승낙하시면 제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성철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홍콩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다.
그런 홍콩에서 한국으로······.
지사도 아니고 사무소라는 형태로 오는 일이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바로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절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불이익 때문일 것이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한국에서 저를 도와서 일을 같이하면서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감사합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내가 굳이 하성철에게 서울 사무소를 맡기려고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한국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예전에 근무했던 페레그린증권은 한국에도 자회사가 있었다.
한국의 기업과 합작 형태였던 이스트 페레그린증권이었다.
이스트 페레그린증권은 설립한 지 5년도 안 되어 한국 최고 증권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이스트 페레그린은 전성기에는 한국 재벌 기업 중 하나로 상대로 인수 합병을 시도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른 재벌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 인수는 성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잘나가던 한국의 이스트 페레그린증권은 인수 합병의 실패와 모기업인 홍콩의 페레그린증권이 도산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 금융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이스트 페레그린은 사라졌지만, 그 회사 출신 직원들은 여전히 한국 금융계 곳곳에서 잘나가고 있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하성철이 비록 홍콩 페레그린 출신이지만 한국 쪽에도 나름의 인맥이 있었다.
홍콩의 누구보다 한국에서 일하기에 유리한 부분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니 오늘은 호텔에 가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출근하십시오.”
2.
하성철은 미리 잡아 놓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침대에 앉아서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을 정리해 보았다.
오늘 아침 갑자기 자신을 부른 대표는 다짜고짜 서울 출장을 명령했다.
서울에 가서 예전 한 번 본 적이 있는 에드릭 손이라는 류오린 팀장을 도우라는 지시였다.
그러면서 카이 황 대표는 에드릭 손이 근무하고 있는 W&R의 대주주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성철도 에드릭 손이 단순한 증권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한 증권회사의 직원이라고 하기에는 처음 봤을 때 대표와 함께 있던 모습이 특별했다.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증권회사 직원은 하성철 같은 투자회사 직원으로서는 손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투자를 결정하면 그 투자를 그대로 따르는 손발.
당연히 둘 중의 갑은 투자회사의 직원이었다.
심지어 카이 황 대표는 몇 달 사이 홍콩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투자회사의 대표였다.
그에 비해 에드릭 손은 팀장이라고 해도 W&R의 지시를 받아 거래를 수행하는 증권회사 직원일 뿐이었다.
류오린이 다른 홍콩의 증권사와는 달리 조금 특별한 곳이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직원은 대부분 중국 본토 출신이라는 사실을 하성철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릭 손은 미국인, 그것도 중국계도 아니고 홍콩 출신도 아닌 한국계 교포 2세였다.
차라리 동남아 화교 출신이라면 모르겠지만 중국계 투자회사에서 한국계 미국인은 한계가 분명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홍콩에서 가장 성공했던 투자자가 바로 예전 하성철과 함께 일했던 제임스 리였다.
페레그린증권의 실세라고 불리며 채권팀을 이끌었던 홍콩 금융계의 풍운아······.
하지만 그는 한 번의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었다.
페레그린 파산 이후 모든 책임을 지고 홍콩 금융계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제임스 리가 만약 홍콩인, 아니 화교이기만 했어도 재기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홍콩에서 한국계 외국인이 가진 한계였다.
그런데 이 에드릭 손이라는 어린 팀장은 아무리 봐도 대표인 카이 황과 대등한 관계로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이 황 대표는 굉장히 체면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카이 황 대표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그것도 자신에 비하면 을인 사람을 저렇게 대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만남 이후 카이 황 대표는 하성철 자신을 자주 대표실로 불러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외환 거래에서 꽤 큰 성과를 낸 다음이었기에 처음에는 자신을 특별히 생각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질문 대부분이 일보다는 하성철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개인적인 질문으로 포장된, 한국계 미국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카이 황 대표가 하성철 자신에 대해 특별히 궁금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에드릭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는 질문인 듯했다.
나중에 하성철은 에드릭 손이라는 팀장이 카이 황이 모시던 리안이라는 홍콩 부호의 아들과 친구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어느 정도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안이 W&R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사실은 홍콩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늘 그 실질적인 주인의 친구 역시 회사의 주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자체는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한국 출장 명령도 모자라서,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들은 한국 사무소에서 일하라는 지시에는 많이 놀랐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보면 에드릭 손이 가진 주식이 생각보다 많은 듯했다.
지시가 아니라 제안이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강제성이 없는 제안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고민이 되는 제안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하고 난 후에 받을 불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레그린증권이 파산하고 몇 년 동안 하성철은 꽤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창 잘나갈 때 거액을 주고 구매한 홍콩의 아파트 가격은 폭락해서 팔 수가 없었다.
처분하려면 대출을 갚아야 하는데, 당시 하성철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홍콩에 남아야 했다.
회사가 파산하는 과정에서 홍콩 내 인맥 상당 부분이 날아갔다.
더구나 한국계 미국인을 채용해 주겠다는 홍콩의 금융기관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년간 작은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겨우 들어온 곳이 W&R이었다.
W&R은 보수도 좋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도 쫓겨나면 그때는 홍콩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가격은 많이 회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불경기였다.
특히 미국의 월가는 구조 조정이 한창이었다.
변변한 추천서 하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 봐야 직장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동료들은 하성철이 카이 황 대표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대표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에드릭 손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W&R에서 성공하려면 에드릭 손 라인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사도 아닌 사무소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성철은 일주일 동안 에드릭 손을 잘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홀로 한국 사무소로 발령 나는 일은 막아야 했다.
3.
월요일 출근한 하성철을 데리고 나는 여의도에 따로 얻은 사무실로 향했다.
주식 투자를 하기 위해 새롭게 얻은 사무실이었다.
내가 여기에 사무실을 얻은 이유는 다른 것이 없었다.
한국의 인터넷 속도가 빠른 편이지만 이 빌딩은 그중에서도 더 빨랐다.
몇 번 간발의 차로 거래를 놓친 나로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리안보다 매매에 서투르다고 해도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보다 늦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되도록 가장 거래소와 가깝고 인터넷 속도도 빠른 이 빌딩에 사무실을 구한 것이었다.
듣자 하니 빌딩의 다른 사무실도 우리 말고도 주식거래를 하는 이른바 ‘부티크’가 모여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크지는 않지만, 홍콩에 있는 3팀 사무실과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사무실에는 이미 미리 지시한 대로 주식거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커피 머신이나 냉장고 같은 것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성철을 돌아보았다.
하성철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어딘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성철 씨 자리는 저기입니다.”
하성철은 멍한 표정으로 내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차례차례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콩 류오린과 연결된 한국 증권회사에 계좌를 열어 두었습니다.”
하성철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하성철이 입을 열었다.
“설마 여기가 W&R 한국 사무소는 아니겠죠?”
하성철이 말했다.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보며 여기가 사무소가 맞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니죠. 직원을 구하는 동안만 잠깐 쓸 곳입니다. 하성철 씨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직원을 뽑고 새로 사무실을 구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여기는 내 개인 사무실로 써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