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29화 (13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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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평판이 틀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1.

따로 사무실을 구하겠다는 말에도 하성철은 여전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런 하성철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하성철이 준비를 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서 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구한 사무실 이야기를 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리안은 나에게 하성철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설명해 주었다.

제도권에 있는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사무실을 회사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하성철처럼 30대 후반일 때 특히 민감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리안의 말에 따르면 투자회사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은 일반적인 직원들이 버틸 수 있는 한계였다.

하성철의 나이대에 금융회사에서 위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회사를 나가서 개인 투자자가 되거나 다른 일을 하느냐가 결정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성철로서는 이제 밀려나면 다시 제도권 금융회사로 들어오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사무실을 잡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난 몰랐지.”

-잘해 봐. 내가 생각해 봐도 한국 쪽 일을 맡기기에 그 사람보다 적임자가 없어 보이니까. 네 실력을 보면 아마 그 제러미 하도 어지간한 제안은 다 받아들일 거야.

“알았어, 수고해라.”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하성철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할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물론 리안의 말대로라면 하성철이 선택할 길은 별로 없었다.

내가 억지로 강요하면 하성철은 한국 일을 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나서서 맡는 것과 억지로 맡은 것은 결과가 아주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성철이 내 제안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한국에 남는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면 된다.

생각하면 뭔가 구차해 보이기는 했다.

내가 따지고 보면 고용주인데 직원인 하성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니.

홍콩이나 한국에서 다른 사람을 구할까 하는 생각들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은 하성철을 설득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내가 하성철에게 한국 일을 맡겨도 되는지를 검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정윤호와 상호 견제 할 사람이 필요했다.

CIA 직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첩보원과 사기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하는 일은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리 정윤호가 신뢰가 있어 보여도 그를 견제할 사람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나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홍콩보다 더 중요한 거점이었다.

투자는 홍콩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의 일은 아니었다.

하성철은 나름 검증된 인재였다.

이미 카이 황에게 확인도 마쳤다.

새로운 사람을 구하고 또 지켜보는 일은 피곤한 일이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CIA에서 언제 강제로 임무가 떨어질지 몰랐다.

언제 지금처럼 여유 있게 지켜보면서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또 나올지 몰랐다.

2.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한국에서 투자 방향을 이야기했다.

“팀장님은 정윤호라는 분이 모아서 전해 준 투자 정보 중에서 적당한 주식을 사들여서 단기간 이익을 나면 파신다는 말씀이죠?”

“정윤호 씨가 보낸 정보만 보고 투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정보를 보면서 정윤호 씨가 보내온 이른바 찌라시를 참고하는 것이죠.”

한국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경제 상황도 그렇게 좋지 않아서 장기간 보유하는 일은 아직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투자 기간은 하루나 이틀 정도였다.

류오린에서 하던 투자보다 훨씬 단기간이었다.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어느 주식을 사면 됩니까?”

“이미 지난주에 아진차 주식을 매입해 두었습니다. 그걸 최대한 비싼 가격에 매각하시면 됩니다.”

나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아진차요?”

“예. 하성철 씨도 아진차에 대해서는 아실 겁니다. 지금은 대현자동차에 인수된 자동차 회사죠.”

아진자동차는 외환 위기 때 부도 위기에 빠져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가 대현자동차를 소유한 대현 그룹에 인수된 회사였다.

대현자동차와 아진자동차의 시장 점유율을 합하면 거의 한국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웠다.

당연히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인수였다.

하지만 외환 위기라는 특별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였다.

“특별히 아진차 주식을 사신 이유가 있는 겁니까?”

“주식을 사들이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는 거죠. 지난주에 아진차 수출 실적이 예상을 뛰어넘어 크게 성장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주 발표라면 이미 주가에 반영된 것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하성철이 물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실적 발표가 어느 정도 반영됐지만,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 아진자동차는 외환 위기 때 무너진 기업이라는 기억이 생생한 기업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정부가 IMF에서 빌렸던 196억 달러 중 남은 금액을 전액 상환한다는 발표를 한다고 하더군요. 공식적으로 외환 위기가 끝났다는 선포를 하는 거죠. 지지율이 20%까지 떨어진 현 정부로서는 중요한 일이지요.”

한국 정부의 지지율은 현재 최악이었다.

집권 초 71%까지 올라갔던 지지율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작년 중반에는 30%대까지 떨어졌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잠시 반등하기도 했지만, 올해 초부터는 20%대로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떨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평화적 정권 교체라는 상징성은 있었지만 취임 초기부터 시행한 개혁 정책이 국민적 동의를 얻어 내지도 못하고 성과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의약분업 같은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정책을 제대로 된 여론 수렴 과정 없이 밀어붙이기도 했다.

여기에 작년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경제까지 나쁘니 지지율이 높게 나올 리가 없었다.

“지금 한국 정부가 내세우는 정책 목표 두 가지가 있다면 이른바 햇볕 정책이라는 이름의 북한 정책과 IMF 극복입니다. 햇볕 정책의 구체적인 성과가 작년 남북 정상회담이었다면 IMF 차관 상환은 바로 IMF 극복의 상징이죠. 그리고 아진자동차는 바로 그 외환 위기의 상징이고요.”

“정부에서 기관투자가라도 동원해서 아진자동차 주식을 매입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까?”

하성철이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윤호 씨 말로는 그런 말이 돌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장이 열려 봐야 알겠죠. 그리고 굳이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 증시를 움직이는 것은 개인 투자자들입니다. 어느 나라나 개인 투자자들은 정확한 분석보다는 이미지나 상징성에 따라 투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진자동차 외에도 오늘 오를 것으로 예상한 회사는 여러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움직이는 투자금은 시가총액이 적거나 거래량이 적은 회사에 투자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렇다고 여러 회사로 분산해서 투자하는 것은 혼자서 하기에는 번거로운 일이었다.

내가 한국 증시에서 운용하는 투자금을 한 번에 투자할 수 있으면서 상승 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아진자동차 정도였다.

이제 하성철이 합류했으니 그에게 다른 회사 주식을 맡길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익률은 어느 정도나?”

“지난주 대비 5% 정도 수익이 나면 매각하세요.”

한국 증시의 15%라는 상한가 제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진자동차 정도 규모의 기업이 상징성만으로 상한가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심지어 지금은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기였다.

어느 정도 수익이 났을 때 팔고 다음 주식을 사는 것이 현명했다.

3.

그 후 며칠 동안 한국 증시에서의 투자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나는 초고속 통신망이 깔린 상태에서도 번번이 매매 타이밍을 놓쳤지만, 하성철은 반대였다.

“굉장히 손이 빠르시네요.”

내 말에 하성철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카이 황에게 듣기로는 그는 외환시장이 전문이었다.

초단타 매매인 스캘핑이 그에게는 일상이었다는 의미였다.

30대 후반이라면 외환시장에서 스캘핑을 하기에는 조금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한국 증시에서 개인 투자자들이 아무리 손이 빠르다고 해도 전문적인 외환시장에서 단련된 하성철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손이 약간 느려서 매매 타이밍을 놓쳐도 외환시장에서처럼 큰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편하면 여유도 생기는 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정윤호의 정보력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에서 그린벨트가 해제된다는 소식을 하루 먼저 알려 준 일도 있었다.

그가 산 땅이 그 그린벨트 해제 지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곧바로 건설주를 매입해서 10% 이상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어떤 회사의 신용 등급이 올라간다거나 어떤 기업의 법정 관리가 해제된다거나 하는 정보를 전해 준 일도 있었다.

당연히 정윤호가 전해 준 정보 전부가 사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증시에서 어떤 정보의 사실 여부는 때로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인 정보라고 해서 주가가 꼭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주가를 조작하기 위한 정보도 있었다.

그런 정보는 하성철이 대부분 알아챘다.

이렇게 닷새 동안의 거래를 통해 우리는 이런저런 비용을 제외하고도 20% 정도의 수익률을 올렸다.

금액으로는 70억 정도였다.

“이렇게 결산하고 보니 대단하네요.”

하성철이 말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W&R은 이보다 많은 금액을 한 주에 벌어들이고 있었다.

수익률만 따져도 20%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선물이나 옵션에서 올린 수익률이지 개별 주식으로 이 정도 수익률을 올린 적은 없었다.

더욱이 한국의 코스피는 내가 거래는 내내 전반적으로 약세였다.

그런데도 이 정도 수익률을 올린 것이다.

하성철을 한국에 남게 하려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정보를 분석하기는 했지만, 워낙 한국, 아니 전 세계적인 증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렇게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CIA를 나와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재능을 가지고 지금처럼 사는 것은 재능 낭비였다.

4.

그날 밤.

하성철과 나 그리고 정윤호는 술집에서 다시 모였다.

잠시 지난 한 주 동안 서로가 한 일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을 주고받았다.

“어떻습니까? 이제 대답을 들을 차례인 것 같은데요.”

나는 하성철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물음에 하성철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하성철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한국에 계속 머무시지는 않겠죠?”

“제가 한국에 계속 머물 생각이면 뭐 하러 제러미 하 씨에게 한국 사무소를 맡아 달라는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역시······.”

고개를 끄덕이던 하성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한국에 남더라도 이번 주 정도의 수익률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 있는 정윤호 씨의 정보도 정보지만······. 그 정보 중에서 돈이 될 만한 정보를 팀장님이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정도까지 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성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제러미 하 씨가 저처럼 할 수 있다면 여기 남으시면 안 되죠. 당장 독립해서 회사를 차려서 돈을 버셔야죠.”

내 이야기에 하성철은 물론이고 정윤호까지 당황했다.

이런 시점에서 내가 자화자찬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나중에 계속 이런 수익률을 낼 자신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바로 독립하도록 돕고 바로 자금을 투자해 드리죠.”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하성철이 나 정도 투자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를 독립시키고 투자할 생각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투자를 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투자에 뛰어난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투자 분석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감각의 영역이고 재능의 영역이었다.

하성철이 나 정도의 재능에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능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성철 나이에 평판과 다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마 하성철이 한국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정도로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국 일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도 이 이상 그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마지막 제안입니다. 한국에 남으실 생각이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한국에 남겼습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정윤호 씨와 함께 앞으로 수고해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직원 선발은 제러미 하 씨에게 전권을 맡기겠습니다.”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한국 일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한국에서 하성철을 설득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을 암살하는 일을 계속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보복 폭탄 테러를 일으켰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도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이 아이 장난감에 폭탄을 설치해서 아이가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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