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133. 일을 열심히 해라. 그러면 그 일이 너를 지켜 줄 것이다
1.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뉴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아니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뉴스를 통해서 나오는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본토가, 그것도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의 상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졌다.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이렇게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 리안이 카이 황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다.
리안이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네. 어떤 상태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어. 너도 이런 일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안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이런 일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번 테러를 벌인 사람들이거나 이번 테러를 같이 공모한 자들뿐이겠지.”
고개를 끄덕인 리안이 카이 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요?”
“현재 미국은 비상 상황입니다. 모든 항공기 이륙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국경이 봉쇄되었고 주식시장도 무기한 폐쇄된 상태라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 엄청난 돈을 벌기는 하겠네.”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리안의 말을 들으니 나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미 벌어진 테러였다.
충격적인 일이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투자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CIA를 그만두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안 좋은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나는 CIA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일한 지 4년밖에 안 되는 직원이었다.
그중에서도 실제 근무한 시간은 CIA 본부에서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한 2년이 전부였다.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위험에 내몰리는 것은 바로 나 같은 하급 직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지난 반년 동안 내가 쌓은 CIA의 인맥과 내가 가진 그리고 가질 재력이었다.
나는 카이 황을 보며 물었다.
“우리 선물 말고 하락 포지션에 투자한 옵션 비중이 얼마나 되죠?”
“조금 차이는 있는데 적게는 5분의 1에서 2분의 1 정도입니다? 옵션 비중이 가장 큰 곳이 독일과 일본이고 미국이나 홍콩 한국은 적은 편입니다.”
내가 일본과 독일이 옵션 비중을 크게 늘린 이유는 두 나라의 미군 기지가 테러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착각이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폐쇄된 미국의 주식시장은 바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열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테러로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일 것이다.
이미 구매해 놓은 풋 옵션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시장은 지금 열려 있는 시장이었다.
2.
“지금 홍콩이 11시니까, 프랑크푸르트는 오후 5시. 아직 DAX 선물 옵션 시장은 아직 열려 있을 시간입니다. 지금 즉시 회사에 연락해서 DAX 풋 옵션을 모두 매각해 달라고 하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카이 황에게 지시를 내린 나는 이번에는 리안을 바라보았다.
“너도 조민에게 내일 장이 열리자마자 닛케이 225 풋 옵션과 코스피 풋 옵션을 모두 팔라고 이야기해 줘.”
“알았어.”
나는 전화를 걸고 있는 카이 황을 향해 덧붙였다.
“카이 황 씨도 항센 지수 옵션을 내일 모두 처리해 주세요.”
리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세웠던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는 거야? 테러의 목표와 형태 그리고 규모가 모두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는데?”
“계획은 그대로 진행해.”
내가 말했다.
나도 설마 미국을, 그것도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노린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테러의 규모가 상상 이상인 만큼 주가 하락 폭도 클 것이다.
선물 하락 포지션과 풋 옵션에 투자한 우리의 수익이 예상보다 클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주식시장에 주는 영향은 비슷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때 위기 대응 시나리오가, 미국을 노린 테러가 발생했을 때 가지고 있는 풋 옵션은 장이 열리자마자 다 처분하고 선물은 마감일에 따라서 처분하자는 거였지?”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리안의 질문에 대답하자 이번에는 카이 황이 물었다.
“풋 옵션을 곧바로 처분하시는 것은 이 정도 규모의 테러에도 여전히 주가 하락이 계속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나는 카이 황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습니다. 심리적으로는 큰 충격이기는 하지만 테러 같은 단기적 사건은 그 영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적인 불황으로 이미 주가가 너무 많이 내린 상태이기도 하고요.”
이번 테러로 주가가 계속해서 급격한 내림세를 보인다면 풋 옵션을 바로 팔 이유가 없었다.
내가 풋 옵션을 테러가 일어난 직후에 팔려고 하는 이유는 테러가 주가에 주는 영향력이 채 한 달을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예전 계획대로 시행하면 되겠군요.”
나는 카이 황을 보며 말했다.
“예. 첫 번째로 되도록 옵션은 빨리 처분하고 두 번째로 이번 주가 선물 마감인 아시아 선물은 이번 주에 그리고 세 번째로 다음 주가 선물 마감인 미국이나 유럽 선물은 다음 주에 처분하시면 됩니다.”
3.
“그나저나 너는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네 말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은 같은데······?”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라.”
“전쟁이 안 일어난다는 말이야?”
리안이 되물었다.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그 끝은 완전히 다르겠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이야?”
“내가 예상한 전쟁은 걸프전 정도의 단기전이야. 미국이 이라크군을 거의 섬멸시켰지만 후세인 정권을 유지해 준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큰 타격을 주는 정도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어.”
내가 말했다.
전쟁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내가 예상한 전쟁은 말한 것처럼 딱 걸프전 정도였다.
미국이 세계 유일한 패권 국가라는 것을 세계에 인식시키는 정도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심장부를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국민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럼 너는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할 거로 생각해?”
“사실 나도 이번 일이 어디에서 끝날지 쉽게 예상이 가지 않아. 하지만 예전 미국이 비슷한 경우를 당한 적이 있지. 그 경우와 비슷하지 않겠어?”
“미국이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고? 이런 테러가 일어난 것은 처음 아니야?”
“2차 대전 때 일본의 진주만 공격 말이야. 이번 일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은 결국 일본과 전쟁에 나섰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본 본토에 핵폭탄을 그렇게 여러 번 투하하지는 못했겠지.”
“핵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핵이 아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번 일의 배후를 찾아서 응징하려고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휴······. 쉽게 짐작도 안 가네.”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리안이나 카이 황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후의 일이 진주만 공격처럼 흐르는 것이었다.
내가 예상한 전쟁은 미국의 힘을 보여 주는 정도의 단기전이었다.
하지만 이런 테러를 당한 이상 단기전으로 일이 끝날 리가 없었다.
리안에게 말한 것처럼 미국은 이번 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책임을 물으려고 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정권을 무너트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을 무너트리는 일과 탈레반이 숨기고 있는 빈 라덴을 잡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더구나 아무리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서 막나간다고 해도 핵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핵을 사용하는 순간 수십 년간 핵 확산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해 왔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핵이 확산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이었다.
절대적인 재래식 무기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이었다.
비대칭 전력인 핵의 확산은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핵을 사용하는 일은 말 그대로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형을 생각하면 핵이 그렇게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럼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말 그대로 강대국의 무덤이었다.
소련의 군사력이 최정점일 때도 아프가니스탄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다.
일단 시작하면 한두 해에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처럼 흐를 가능성이 컸다.
4.
다음 날인 12일.
나는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고 서재에 앉아 있었다.
내 책상에는 블랙베리가 놓여 있었고 내 시선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CIA에서 무슨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CIA 본부에서 교육을 중지하고 나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이렇다 보니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오히려 초조했다.
커피를 마셔도 쓴맛만이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뉴스를 찾아보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전 세계 증시는 폭락했다.
미국은 연준은 급하게 은행에 382억 달러를 지원했다.
평소 은행에 지원하는 금액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일본 중앙은행은 800억 불을 시장에 공급했다.
일본 중앙은행이 이런 거액을 시장에 공급한 이유는 911 테러 때문만이 아니었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일본 정부는 2분기 일본 경제 성장률이 ?0.8%라고 발표했다.
911 테러의 영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대로라면 3.2% GDP가 축소된다는 의미였다.
일본이 불황에 들어갔다는 발표에 이어서 싱가포르도 경제가 불황이라는 발표를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국가인 중계무역으로 성장한 국가였다.
일본, 중국, 한국, 대만이 모두 수출 부진에 빠져 있는데 싱가포르의 경제가 불황인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중국의 WTO 가입 협상이 사실상 끝났다는 발표 정도였다.
나는 이번에는 보안 회선을 통해서 CIA 통신망에 접속했다.
외부 통신망이라서 CIA 본 통신망과는 차단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외부 통신망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는 있었다.
올라온 글을 봐서는 뉴스처럼 이번 테러의 배후를 알 카에다의 빈 라덴으로 거의 확신하는 듯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테러가 일어나기 전 들어왔다는 첩보가 아니더라도 미국을 향해 이런 대규모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테러 단체는 알 카에다뿐이었다.
글을 찾아보니 오사마 빈 라덴은 어느 정도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이번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영웅으로 판지시르의 사자라고 불리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테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9월 9일 자살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는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내가 최근까지 확인한 정보에 의하면 그가 이끄는 북부 동맹은 수도 카불 근처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벨기에 기자로 위장한 사람들에 의해 자살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알 카에다의 짓인 듯했다.
테러가 일으키기 전에 이미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미국을 도울 사람을 제거한 셈이었다.
북부 연맹을 통한 대리전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미군의 지상군 파병을 통한 전쟁은 필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