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134.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1.
12일 저녁.
리안이 다시 집을 찾아왔을 때 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국가안보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만, 이것만 보고 이야기하자.”
나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리안의 말을 막고 계속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계속 지켜보았다.
부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일은 테러 이상인 전쟁 행위라고 사건을 규정하며 신속한 책임자 색출을 통한 철저한 응징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의 회견에서 주목할 부분은 ‘색다른 적’, ‘숨을 곳은 없을 것’, 군이 강력한 준비를 하고 있다’ 같은 부분이었다.
이르면 이번 달 안에 늦어도 다음 달 초까지는 군사행동을 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연설이 끝나고 뉴스에서는 이미 어제 부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테러분자와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저건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지목한 이야기겠지?”
리안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리안이 내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많이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도 미친놈이네. 도대체 뭘 믿고 저런 일을 벌인 거야?”
“아마도 오사마 빈 라덴의 최종 목표는 미국이 아닐 거야. 그는 미국의 훈련과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인물이야. 누구보다 미국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지. 그런 오사마 빈 라덴이 이런 정도의 테러로 미국을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럼? 넌 오사마 빈 라덴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궁극적인 전략적 목표는 결국 중동이지. 아마도 이번 테러를 통해서 중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해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군사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일 거야.”
“그걸 위해서 저런 미친 짓을 벌였다고?”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미친 짓이지. 나는 이번 테러는 오사마 빈 라덴이 판단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 빈 라덴의 착각이지. 리안, 너도 2차 대전 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 공습을 하면서 한 말을 알고 있어?”
“‘어쩌면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말?”
“맞아. 미국은 원한을 잊지 않는 나라야. 미국 본토가 공격당하지 않았다면 오사마 빈 라덴의 생각처럼 적당한 선에서 끝났을 수도 있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야.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된 거지.”
물론 죽는 것은 당연히 오사마 빈 라덴이 될 것이다.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었다.
2.
언제까지 CIA의 연락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류오린에 출근했다.
내가 출근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정신없이 바빴다.
어제 풋 옵션 매각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풋 옵션 투자자들처럼 최고 500배에서 300배 혹은 30~40배의 이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가 구매한 풋 옵션의 프리미엄은 1.5배에서 7.5배 사이로 올랐다.
다 매각하고 난 후에 계산해 보니 두 배에서 세 배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한창 멋모르고 옵션에 전액 투자할 때나 내던 수익률이었다.
그때는 레버리지를 거의 풀로 사용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번에 엄청난 이익을 얻은 셈이었다.
테러가 일어나고 이틀이 지난 13일이 되자 세계 증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풋 옵션은 어제 처리했지만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늘이 일본 홍콩 한국의 선물 옵션 마감일이었기 때문에 오늘 안에 가지고 있던 선물을 모두 처분해야 했다.
2팀에 협조를 구했지만 매각 결정을 실시간으로 내려야 하는 사람은 우리 팀원들이었다.
닛케이와 코스피에 투자한 AAM의 담당은 조민이었다.
하지만 조민은 어제 처분한 옵션에 대한 결산과 비용 처리 때문에 바빴다.
결국, 닛케이와 코스피 선물을 매각은 리안과 브레이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되도록 비싼 가격에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소량으로 처분하고 있었다.
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재 가장 많은 자금이 투자된 선물은 카이 황이 담당하고 있는 홍콩 항셍지수 선물이었다.
나는 항센 지수와 선물 지수를 모두 살피면서 실시간으로 카이 황과 의논해서 매각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장 마감 직전에야 겨우 다 처분할 수 있었다.
마감이 끝나자 리안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이번에도 네 예상이 맞았네. 정말 하루 사이에 어느 정도 주가 내림세가 진정되고 있어.”
리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것 아니야. 너랑 나랑 같이한 시간이 얼만데 아직도 이 정도에 놀라면 안 되지.”
“오늘은 건방져도 참을게. 그런데 너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오늘 산케이 신문에 빈 라덴이 테러 전에 선물에 투자해서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는 기사가 났어. 그래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미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국(FinCEN), 중앙정보국(CIA), 연방 조사국(FBI)이 조사에 들어갔다던데? 우리도 조사받는 것 아니야?”
리안의 말에 나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는 소리네.”
“왜? 테러가 일어나는 것 알면 큰돈을 벌려는 욕심이 날 수도 있는 것 아니야?”
리안이 물었다.
“너 많이 피곤한가 보다. 이제 이번 주는 일도 끝났는데 집에 가서 쉬어. 그럼 네가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집에서 쉬면서 생각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말이야.”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3.
리안이 말은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었다.
특히 내 경우는 CIA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테러범보다 투자에 더 조심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조금만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빈 라덴은 너도 알다시피 억만장자야. 그런데 겨우 수백만 달러 벌자고 테러 전에 선물 투자를 한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구나 그렇게 투자해서 돈을 벌면? 그 돈은 빼 가면 바로 조직의 다른 자금 흐름까지 드러나는데? 빈 라덴이 그런 바보라면 미국에 진작에 잡혔겠지.”
“빈 라덴이 선물 투자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이번에 번 돈이 오늘까지만 해도 1억 5천만 달러야. 다음 주에 나스닥에서 다시 열리면 못해도 최소 1억 달러에서 2억 달러 정도는 추가로 벌어들일 테고 말이야. 이 정도면 조사가 들어오지 않을까?”
리안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무슨 죄야? 주가가 계속 내려가서 선물 하락 포지션을 잡고 풋 옵션을 사들인 게 조사받을 일이야? 그럼 주가가 내려가는데 선물을 상승 포지션을 잡고 콜 옵션을 사들여?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행동 아니야? 더구나 우리는 테러 직전에 선물이나 풋 옵션에 투자한 게 아니라 한 달 전부터 투자한 거야. 실제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주가가 내려가
고 있었고······. 조사받을 일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말을 들은 리안이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당연한 투자를 한 거야. 최근 주가 흐름대로라면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을걸?”
“그야 그렇겠지.”
테러 덕분에 예상보다 수익이 커지기는 했지만 나는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지금 뉴스에 나오는 조사를 받는다는 거래들이 문제가 된 것은 테러 직전에 평소보다 선물거래량보다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리안을 보니 그는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너 진짜 피곤해 보인다.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어.”
내가 말했다.
“알았어, 진짜 가서 쉬어야지. 매주 하던 일인데 이번에는 유독 피곤하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일 자체는 비슷했지만, 업무 강도는 전혀 달랐다.
테러도 일어났고 다른 때보다 수익률이 높다 보니 신경도 더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리안에게 시선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 모두 여기를 보세요.”
손뼉을 쳐서 팀원들의 시선을 모았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금요일은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토요일 일요일도 푹 쉬시고 월요일에 회사에서 뵙죠.”
환호성은 없었지만, 팀원들 모두가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일 중독일 정도로 열심히 서류를 보던 조민조차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피곤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웬일이야? 금요일에 쉬라고 하고.”
리안이 물었다.
“어차피 내일 금요일에 사나 월요일에 사나 아시아 쪽 선물은 비슷할 것 같아서······. 그리고 쉬어야 월요일에 다시 열심히 일하지. 요즘같이 가격 변동 폭이 심할 때는 몸 상태가 좋아야 제때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잖아. 피곤하면 조금 늦어서 수백만 달러를 놓칠 수도 있어.”
나는 리안을 보며 말했다.
내 말에 리안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런 악덕 상사 같으니라고······!”
나는 리안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악마가 일을 만들어 준다잖아. 지금처럼 가격 변화가 심할 때 열심히 일해서 벌어 둬야지.”
4.
리안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암호를 입력해서 메일을 확인했다.
며칠 동안 기다렸던 메일이 두 개나 도착해 있었다.
각각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온 메일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협조 요청은 인도네시아 잠입한 알 카에다 조직원을 인도네시아 정부와 함께 추적하는 일이었다.
쫓고 있는 알 카에다 조직원은 이번 911 테러 용의자와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중요 증인이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건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신자 중에서 이슬람 과격파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 명 중 대부분이 이슬람 신자였다.
오사마 빈 라덴 정도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닌 이상 추적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 아프가니스탄으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지만 이런 임무를 맡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필리핀에서 온 요청을 받아들여 곧바로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경호원은 모두 홍콩에 남겨 두었다.
언제나 만났던 마닐라 술집에서 나를 맞은 것은 엘만 지부장이었다.
“어서 오게.”
“반갑습니다. 자주 뵙네요.”
“그러게 말이야. 좋은 일로 자주 봤으면 좋았겠지만, 이번 일은 좀 그렇군.”
엘만 지부장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내용 사실입니까? 정말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에 오는 겁니까?”
필리핀에서 온 협조 요청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서 필리핀에 잠입할 경우를 대비해서 필리핀 정부와 합동작전을 벌이는 임무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엘만 지부장이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믿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서 필리핀에 온다니요.”
“뭐······. 아부 사아프가 알 카에다를 추종하고 있기는 하지. 민다나오 밀림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숨기에 좋은 장소이기는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필리핀을 오려면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지 않습니까? 전 세계가 자신을 쫓고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온다니요?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로돌포 비아존 필리핀 상원 의원이 이타르타스 통신과 인터뷰한 내용이야. 나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것은 알지만 CIA는 그렇지 않아도 911 테러를 막지 못한 비난을 받는 상황이네.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상원 의원 정도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은 본인도 믿지는 않을 텐데요?”
“뭐긴 뭐겠냐, 아부 사야프를 구석에 몰려는 수작이지.”
“상원 의원이 왜요?”
“로돌프 비아존 의원은 군 참모총장 출신이네. 우리는 뒤에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네.”
“그렇게 믿는 근거는요?”
“아로요 대통령은 지금 일본을 방문 중이네. 그곳에서 니혼게이자이 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아부 사아프와 오사마 빈 라덴이 뭔가 관련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말을 하면서 보진카 계획을 언급했네.”
“보진카 계획이라면 유세프가 비행기를 납치해서 건물에 충돌시키려던 계획 아닙니까?”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번 테러와 아주 유사하지. 그래서 우리가 아주 난처하네.”
이제야 엘만 지부장이 나를 불러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그가 나를 불러들인 이유는 진짜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에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CIA를 곤란하게 만들 이야기를 하는 필리핀 정부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절대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필리핀을 선택했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악마는 일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었다.
거저먹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