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34화 (135/270)

(134)

#135.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다

1.

엘만 지부장이 사정을 설명했다.

“이번 일과 같은 대형 사건을 다른 나라 정치인들이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지금처럼 필리핀에서 보진카 계획을 계속 떠드는 일은 곤란해. 그렇지 않아도 CIA가 왜 이번 테러를 막지 못했느냐는 말이 있는 상황에서는 정말 곤란하지. 뭔가 방법이 없겠나?”

예상했던 것처럼 엘만 지부장은 필리핀 대통령과 그 측근이 보진카 계획을 계속 언급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저도 정신이 없어서 지금은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단 필리핀 현재 상황을 조사해 봐야······.”

나는 즉답을 피했다.

이번 일은 최근에 해 왔던 일과 달랐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로요 대통령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당연히 필리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대통령궁과 맞서는 일이었다.

그것도 대통령궁이 모르게 일을 벌이거나, 알아도 CIA와 맞서기보다 함께하는 일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인해 줘야 했다.

“그렇겠지. 일단 여기 최근까지 필리핀 정계 상황을 정리해 놓은 자료들이네.”

엘만 지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한 무더기의 서류를 넘겨주었다.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무게가 느껴지는 서류 더미였다.

“많네요.”

내가 말했다.

“그게 줄이고 줄인 거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더 요청하게.”

거절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언제까지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겁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지금 같아서는 당장 내일이라도 저 대통령의 입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할 상황이야.”

엘만 지부장이 재촉했다.

“내일요?”

내가 되물었다.

항상 느끼지만 내가 맡은 일 대부분이 너무 촉박했다.

“상황이 급한 것은 알겠지만 당장 내일까지 방법을 찾으라니 무리한 요구입니다.”

“힘든 것은 알지만 부탁하네. 지금 CIA가 어떤 상황인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지금 의회는 물론이고 국민까지 우리를 비난하고 있네. 백악관이 신뢰를 계속 보내고는 있지만 언제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을지 모르네.”

일단 부시 대통령은 CIA를 신뢰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부시 대통령도 CIA 못지않게 책임 추궁을 당해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언제 불리해지면 성난 국민에게 먹이로 내놓을지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저희 팀이 정보전이나 여론전이 전문이라도, 아무런 준비 없이 단기간에 필리핀 대통령궁을 압박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 손에 서류를 들고 일어섰다.

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은 나와는 지난번에도 만난 적이 있는 조엘이었다.

조엘은 잠시 보지 못한 사이에 나에 대한 반감이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진짜 나에 대한 반감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엘만 지부장에게 지적을 받고 반감을 숨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조엘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CIA 요원이었다.

“자주 뵙네요.”

“매번 이렇게 필리핀 지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는 것에 지부장님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네.”

약간 딱딱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올 몇 달 사이 필리핀에 유독 일이 많은 것 같네요. 필리핀 지부 사람들이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내 말에 조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필리핀이 조용한 곳은 아니었지만, 요즘처럼 대형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일은 없었는데······.”

잠시 말을 멈췄던 조엘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죄송했네. 먼저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나인데 화를 내서 미안하네.”

조엘이 뜬금없이 사과했다.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니야.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꼼짝없이 민다나오섬 밀림으로 돌아가게 생겼는데, 사과를 할 것은 해야지요.”

이 아저씨 왜 이래?

부담스럽게······.

2.

“호텔에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조엘이 돌아와 보고했다.

“눈치가 어떻게 보였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나?”

“특별한 방법을 찾지 못한 듯 내내 고민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조엘의 말에 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래, 사과는 했고?”

“예, 지시하신 대로 사과를 했습니다.”

“잘했네. 능력은 좋지만 수이진 그자는 경험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네.”

수이진의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였다.

한창 정의감에 불타서 의욕적으로 일을 할 나이였다.

지난번에는 냉정한 계획과는 달리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경우 내유외강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도 특별한 방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궁에서 아주 대놓고 일을 벌인 건데요.”

조엘의 말대로였다.

엘만이 비공식적으로 조금 조심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로요 대통령 쪽에서는 바로 거절했다.

오히려 테러범을 잡은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면서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상의 협박이었다.

이런 일만 봐도 아로요 대통령이나 그 측근이 보진카 계획을 이야기하고 빈 라덴과 필리핀 이슬람 반군이 밀접한 사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

아로요 대통령이 임기 초반 가장 큰 위기는 당연히 4월 말에서 5월 초에 있었던 피플 파워 시위였다.

하지만 선거 압승으로 그 위기를 겨우 벗어나던 시점에 일어났던 납치 사건도 아로요 대통령의 임기 초반 가장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준 사건 중 하나였다.

특히 납치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필리핀 국민 중에는 아로요 대통령을 전임 에스트라다 대통령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았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영화에서 이른바 터프가이 역할로 많이 출연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이런 이미지를 이용했다.

그들은 전임 대통령이 쫓겨나지 않았으면 아부 사아프가 저런 납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겠느냐고 주장했다.

에스트라다 지지자들에게 쫓겨나기 직전 상황까지 몰렸던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아부 사아프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아로요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은 이번 기회에 아부 사아프를 정리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더군.”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지금 필리핀 대통령궁은 너무 지나칩니다. 대통령궁 때문에 지금 미국 언론에서는 마치 우리가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못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진카 계획과 이번 일은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데도 말입니다.”

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보진카 계획은 전형적인 비행기 폭탄 테러지. 이번 911 테러처럼 비행기를 납치해서 비행기 자체를 폭탄으로 사용하는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보진카 계획은 교황을 암살하고, 아시아에서 항공기 11대에 폭탄을 숨겨 폭파하는 전형적인 기존 방식의 테러였다.

이번 911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잠시 후 엘만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연관된 것도 사실이지 않나. 이번 일도 아무리 봐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관련된 것 같아.”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일으킨 람지 유세프의 삼촌이자 그와 함께 보진카 계획을 주도한 공범이었다.

람지 유세프는 1995년 체포됐지만,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었다.

다른 범죄자들이 비슷한 범죄 형태를 반복하는 것처럼 테러범도 비슷한 방식의 테러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CIA 정보국에서는 이번 911 테러는 보진카 계획이 발전된 형태라고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미국 정부와 CIA가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 배후로 의심하는 이유 중에는 보진카 계획을 후원했던 조직이 오사마 빈 라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에이전트 에스 팀이 여론전에 뛰어난 것은 알겠지만 이번 일은 이전의 일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조엘이 말에 엘만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에이전트 에스 팀이 확실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습니까?”

“그래,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본부에 할 말이 생긴 셈이지. 외부 팀에 협조 요청까지 할 정도로 막으려고 열심히 했는데 안 됐다고 말이야.”

적어도 아시아 지부들 사이에서 에이전트 에스 팀은 꽤 인정을 받고 있었다.

훌륭한 핑곗거리였다.

3.

“그나저나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 행방은 어떻게 됐나? 찾았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억류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는 이번 테러의 배후로 거의 확실히 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친구였다.

그는 국제 이슬람 구호 기구의 필리핀 지부를 지휘하고 있는데, 이 사업을 통해서 민다나오섬의 필리핀 반군, 그중에서도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아부 사아프를 지원하고 있었다.

아부 사아프가 알 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한 데는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의 재정 지원이 있었다.

CIA나 필리핀 정부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체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규모 테러가 일어난 상황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행방을 쫓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잡혀 있으면 제대로 조사하기는 틀렸군. 따지고 보면 이번 일도 사우디아라비아 그 새끼들이 배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알 카에다를 비롯한 수니파 원리주의는 와하브파였고 이 와하브파는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념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번 테러의 배후는 직접적인 배후는 아니겠지만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엘만의 생각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수니파 이슬람원리주의를 중동 내에서 확산시킨 것은 미국 CIA의 공작이기도 했다.

알 카에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돈과 미국 CIA의 훈련이 만들어 낸 조직이었다.

이번 911 테러는 적을 물어뜯기 위해 기른 개가 훈련한 사육사를 문 사건인 셈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은 진실이었다.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잡혔다기보다는 사실상 보호를 받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쉬운 일이었다.

만약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가 필리핀에 있었으면 당장 잡아다가 무슨 수를 쓰든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을 알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함마드 자말 칼리파를 조사한다고 해도 그를 통해 얻은 오사마 빈 라덴의 정보는 쓸모가 없다.

“에이전트 에스 팀에 책임을 돌리는 사이 다른 자를 찾아봐야지.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의 행방을 찾으면 최고인데 말이야.”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필리핀에 숨어서 보진카 계획과 폭탄 제작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필리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필리핀에 숨어 있으면 좋겠지만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숨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꼼꼼 숨어 있을 테고요.”

“그렇겠지.”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 파키스탄에서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를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지금 파키스탄에는 CIA 본부에서 요원이 잔뜩 몰려간 상태일 것이다.

잡는다고 해도 필리핀 지부의 손으로 잡기는 어려웠다.

“혹시 모르니 아부 사아프에 대한 조사도 필요합니다. 어쨌든 알 카에다 산하 조직이지 않습니까?”

“필리핀군 정보국의 빅터 코르푸스에 협조해서 아부 사아프가 알 카에다와 연락하는지 감시하게.”

“알겠습니다.”

“에이전트 에스 팀 핑계를 댄다고 해도 여유는 며칠이야. 그동안 뭔가 성과를 찾아내야 하네.”

엘만은 아무리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단시간 내에 해결책은 찾는 일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벌어 줄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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