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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겠다
1.
“하루 만에 진짜 방법을 찾은 건가?”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내가 정말로 하루 만에 방법을 가지고 나타나자 그는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이 방법들이 통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말 찾은 모양이군!”
엘만 지부장이 의자를 끌어 조금 앞으로 다가왔다.
부담스러운 표정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해야 할 것은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으로 온다느니 하는 소문을 잠재우는 일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필리핀의 이슬람 단체들 성명으로 이번 911 테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해야죠. 모로 민족 해방 전선 지도부는 필리핀 정부와 협상해서 자치구를 구성하고 있으니 어차피 비난 성명을 발표할 테고, 중요한 것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입니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이번 테러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게 하자! 나쁜 생각은 아니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은 어쨌든 현재로서는 민다나오섬 최대 무장 단체이기도 하고, 최근 필리핀 정부와 평화 협상을 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무장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니 적당한 단체이기는 하지. 무엇보다 이름이 좋지 않은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엘만 지부장의 말대로였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잘 모르는 사람도 필리핀 이슬람 무장 단체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기에 딱 알맞은 이름이었다.
“이건 내가 맡지. 우리도 나름대로 선이 있고 정 안되면 필리핀군 정보부의 빅터 코르푸스를 이용해도 되니까.”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지난번 사건 이후 빅터 코르푸스와는 지속해서 협력 관계를 지속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말이 협력 관계지 약점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흔드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빅터 코르푸스로서도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
상대의 약점을 잡았다고 해서 CIA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강요하는 단체는 아니었다.
그런 관계는 상대의 반감을 사서 오래 이용하기 어렵고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
“다음은 상대를 설득할 때 언제나 가장 효과적인 채찍과 당근 전략입니다.”
“당근과 채찍?”
엘만 지부장이 되물었다.
“예.”
“한번 이야기해 보게.”
“우선 채찍입니다. 최근 발표에 보니 필리핀 최저임금이 4달러 50센트 정도더군요. 이걸 50% 인상해 달라는 시위가 이번 주말에 마닐라 시내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대통령궁으로 행진도 계획되어 있더군요. 이 시위 규모를 좀 키우죠, 필리핀 언론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언론사도 불러서 화제도 키우고요.”
필리핀의 최저임금은 다른 나라와는 달랐다.
다른 나라의 최저임금이 가장 낮은 임금 수준이라면 필리핀의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기본임금이었다.
아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직종이 아닌 이상 최저임금이 말 그대로 취업자들의 평균임금이라고 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오르기는 하지만 그 폭은 작았다.
이건 기본적으로 필리핀이 만성적인 노동력 과잉 공급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은 천주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천주교는 낙태를 금지하기 때문에 많은 필리핀 가정에서 자녀의 수가 네 명이 넘었다.
이슬람교는 세계 어디에서나 일부다처제로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종교였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필리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 곧 평균임금이라는 사실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금 그 최저임금을 올리기 위한 집회 규모를 키워 아로요 대통령을 압박하자는 이야기였다.
말했다시피 최저임금은 필리핀 거의 모든 노동시장에서 평균임금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건 공권력의 기반이 되는 경찰이나 군인은 물론이고 공무원들 대부분이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최저임금 시위의 규모가 작을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시위가 커지고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아로요 대통령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임금을 올려 준다는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50%나 되는 인상률을 요구하면 당장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그 규모가 커지면 조금이라도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방법은?”
“이런 시위에 특별한 방법이 뭐 있겠습니까? 동원이죠. 주최 측에 돈 좀 주고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하고······. 따로 돈 좀 주고 버스를 빌려서 사람을 실어 나르면 되는 거죠. 조금이나마 참가비도 주고요. 언론 쪽은 지부장님께서 나서 주시면 합니다. 마침 아로요 대통령께서 필리핀이 무슨 알카에다 소굴인 것처럼 이야기하셔서 외신 기자들이 꽤 많이 들어
와 있더군요.”
AP나 AFP 같은 대형 통신사는 물론이고 타임이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영향력 있는 언론사에서도 필리핀에 기자를 파견한 상태였다.
“괜찮은 생각이야. 우리 쪽에서 언론사를 동원하지.”
“제가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이 50%라는 인상률이었습니다. 아마 이 시위가 보도되면 한동안 필리핀은 50%라는 최저임금 인상률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이냐······. 이런 논쟁으로 꽤 시끄러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추겨야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최저임금 논의가 논쟁이 되려면 언론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론사들 대부분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소유였다.
이들이 최저임금 인상이 논의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화교 재벌들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화교 재벌들이라고 최저임금이 인상되는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알겠네. 아까 말했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3.
내가 최저임금을 생각해 낸 것은 어제 호텔을 빠져나가서 만난 리코 덕분이었다.
어제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한 가지 고민을 이야기했다.
예전 자신이 모시고 있던 판필로 락손이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했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이야기였다.
판필로 락손은 빅터 코르푸스의 폭로로 꽤 어려움을 겪었다.
빅터 코르푸스 쪽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서 판필로 락손이 마약상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폭로는 흐지부지되어 가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야심을 가지고 있던 판필로 락손은 개인적으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필리핀에서 유례가 없는 깨끗하고 청렴한 경찰청장이었다는 이미지에 흠집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보스였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쫓아낸 일로 원한을 가진 상태에서 개인적인 원한까지 더해진 셈이었다.
그가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반격 카드로 준비한 것이 최저임금 인상 시위였다.
판필로 락손에게 시위를 준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시위를 주도하는 노동단체에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런저런 인맥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바로 경찰 조직이었다.
문제는 현직 상원 의원이자 나름 큰 꿈을 가지고 있는 판필로 락손이 공개적으로 이 시위를 지원할 수도 없다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자신과 가까운 재력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리코였다.
예전 부하일 뿐 아니라 얼마 전 후원을 약속했고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재력까지 가진 사람.
리코로서는 난감한 요청이었다.
그는 준비했던 사업을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해 다른 곳보다 약간 더 많은 임금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업자들에게서 약간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리코도 약간의 임금을 더 주고 우수한 인력을 채용하려고 하는 것이지 최저임금이 50%나 상승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필리핀의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그가 추진하는 외주 사업 자체가 경쟁력이 떨어진다.
나는 리코에게 성의 표시를 하는 정도에서 약간의 자금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시위가 커지더라도 필리핀에서 50%나 최저임금이 인상되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아마 판필로 락손조차 그런 일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4.
“채찍은 됐고, 그럼 아로요 대통령에게 줄 당근은 뭔가?”
CIA가 언론사를 동원하면 아로요 대통령도 배후가 누군지 알 것이다.
그렇게 압박만 하면 아로요 대통령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랐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따라야 했다.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가 올해 2월에 확대된 사실을 아실 겁니다. 당시 막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던 아로요 대통령의 의사와는 관련 없이 확대되었죠.”
“그런데?”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는 민다나오섬의 오랜 분쟁을 끝내기 위해서 민다나오섬 일부에 자치를 허용한 곳이었다.
1990년대 설립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는 작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지시로 10년 만인 올해 2월 확대되었다.
“지난 총선에서 이 지역에서 현 집권 여당의 지지율은 아주 낮았습니다. 몇 달 전 아로요 대통령이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 ARMM)의 주지사였던 누르 미수아리를 쫓아낸 것도 그 영향이고요.”
누르 미수아리는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에스트라다와 친분이 있었다.
자치구라는 성격상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정적과 친분이 있는 자가 이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올봄에 무슬림 민다니오 자치구 내에서 누르 미수아리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포섭해서 개인적인 비리를 이유로 그를 축출할 수 있었다.
“알고 있네.”
“누르 미수아리를 쫓아내고 지금은 과도 집행부가 다스리고 있지만, 올해 11월에 새로운 주지사 선거가 열릴 예정입니다.”
“그 선거에 개입하자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죠. 어제 자료에서 보듯이 현재로서는 누르 미수아리가 당선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럼 뭘 하자는 말인가?”
“아로요 대통령은 누르 미수아리를 개인적으로 꽤 미워하는 것 같더군요. 쫓겨난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정도로요. 미수아리의 목 정도면 훌륭한 당근이 될 것 같은데요?”
당연히 진짜 목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수아리의 정치적인 생명을 의미했다.
그 와중에서 진짜로 죽으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미수아리가 주도한 민다나오섬 무슬림 반란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최소 수만에서 수십만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정당한 투쟁이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만······.”
엘만 지부장이 내 말을 잘랐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예전 그 계획을 다시 추진하자는 말인가? 미수아리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던 계획?”
올 초에 미수아리가 쫓겨난 이후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계획은 사실상 폐기된 상태였다.
“맞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미수아리가 반란을 일으키면 치명타가 되겠죠.”
그렇지 않아도 911 테러로 무슬림에 대한 시선이 따가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반란은 국제적인 지지는 물론이고 필리핀 내부에서도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아무리 미수아리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겠나?”
“선거가 끝나면 새로운 주지사가 미수아리가 주지사일 때 자금 집행 명세를 조사해서 책임을 묻겠다면 어떻겠습니까? 적어도 선거를 방해하고 싶지 않을까요?”
내가 말했다.
미수아리는 얼마 전까지는 자치구의 주지사였지만 수십 년 동안 무장투쟁을 해 온 인물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익숙한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겠다.’라는 말은 무장투쟁을 하는 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이건 그들의 외골수적인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선거 방해를 반란으로 몰자······. 좋은 생각이네.”
필리핀에서 선거 방해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어제 자료에 의하면 미수아리가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로 있을 때 횡령한 금액은 최소 몇천만 달러였다.
미수아리는 횡령한 돈으로 자신의 부인들과 호화 생활을 즐겼다.
그가 오랜 세월 민다나오 독립을 위해서 싸웠음에도 주지사에서 쫓겨난 이유였다.
전형적인 독재자가 된 독립 영웅이지만 다른 독재자와는 달리 그에게는 그를 몰아낼 수 있는 중앙정부가 있었다.
“선거 방해를 반란으로 모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죠.”
예전 미수아리라면 이런 일로 죄를 묻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미수아리는 주지사에서 당선되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지. 그걸 결정하는 것은 바로 중앙정부니까 말이야.”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만 지부장은 내 계획은 빠르게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더는 필리핀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홍콩에서 리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미국과 유럽의 선물 옵션 결제일이 끝나고 이번 투자 결과가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