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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물을 건널 때는 말을 바꿔 타지 마라
1.
홍콩에 돌아온 날.
집으로 찾아온 리안은 처음에는 사무실 이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좋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이야기는 선뜩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너는 RAM을 청산하는 데 반대한다는 말이지. 다른 사람 의견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맞아.”
리안이 대답했다.
매우 단호한 태도였다.
리안이나 카이 황이 RAM을 청산하는 데 반대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올지는 몰랐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RAM은 AAM의 자회사였다.
리안이 반대한다고 해도 청산하는 것은 내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대하고 나오는데 계속 청산하겠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보통은 이 정도 반대하고 나오면 당연히 포기해야 하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RAM을 청산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모회사인 AAM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돈 때문은 아니었다.
돈 때문이라면 RAM을 청산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내가 억지로 투자금을 떠맡고 러시아에 투자했던 이유는 1년 안에 러시아 증시가 크게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 911 테러로 그 예상은 조금 빗나갔지만, 러시아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번 테러와는 상관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이번 테러로 크게 이익을 볼 국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러시아 경제와 증시가 성장할 것이라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러시아 증시가 다시 반등할 때 롱 포지션에 놔두기만 해도 큰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RAM을 청산하려는 이유는 그 모회사인 AAM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AAM은 투자하면서 여기저기에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번 선물 옵션 거래로 수익률만 생각하면 가장 큰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 AAM의 일본과 한국 투자였다.
조사가 시작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AAM은 어쨌든 에드 미첼과 내가 한 불법의 증거물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
AAM을 정리하더라도 그 모회사라고 할 수 있는 타마티 매니지먼트(Tamati Management)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RAM은 AAM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RAM을 청산하지 않고는 AAM을 청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리안의 기분이 상하더라도 RAM과 AAM을 청산해 흔적을 완전히 지우느냐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면서 AAM을 그냥 놔두느냐의 선택이었다.
“러시아보다 독일 투자에 전념하기 위해서 RAM을 청산한다는 것은 핑계인 거지?”
리안이 물었다. 역시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리안이 저렇게 질문하는 상황에서 처음 주장을 우기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RAM을 청산해야만 하겠다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
“RAM을 W&R에 넘겨. W&R의 직원들을 통해서 RAM을 관리하면 되잖아.”
흔적을 지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RAM과 AAM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내 주장을 내세운다면 리안, 더 나아가 그가 걱정하고 있는 RAM의 투자자들과 사이가 나빠질 수가 없었다.
병법에는 전쟁 중에 장수를 바뀌지 말라고 나와 있다.
물을 건너는 중에는 말을 바꿔 타지 말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은 리안과 카이 황이라는 말을 바꿔 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넘기자고? 공짜로 넘기라는 말은 아니겠지?”
RAM의 현재 투자금 규모는 1억 5천만 달러가 넘었다.
지금 청산해도 받을 수 있는 운용 보수만 해도 최소 5천만 달러가 넘었다.
“맞아. 대신 W&R 한국 사무소를 W&R 코리아로 독립시키고 W&R 코리아의 지분은 에드릭 너에게 전부 넘길게.”
W&R이 한국에 투자한 금액은 3천만 달러 정도였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도 투자에 관여해서 지금은 투자금이 꽤 늘어난 상태였다.
“한국 쪽이 꽤 수익률이 높다고 하던데. 이러면 회사가 손해인 것 같지만, 최대 주주께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으니 회사가 조금 손해 보지 뭐······.”
리안이 말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기쁜 것인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뭔 소리야! RAM이 앞으로 벌어들일 금액이 얼마인데 회사가 손해라는 거야?”
“어차피 너는 청산해서 포기하려고 했던 돈 아니야? 한국 투자에는 계속해서 관여하고 있고 말이야. RAM은 반년 후면 해산하겠지만 한국 투자는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 생각하면 회사가 큰 손해 보는 거야.”
리안의 말에 나는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RAM은 남더라도 반년의 시한부 회사였다.
그에 비해 한국은 계속 투자할 생각이었다.
손해를 보지 않는 이상 결과적으로는 한국에 투자한 투자금의 가치가 더 컸다.
“다른 이야기나 하자. 전화로 말했듯이 투자금을 전체적으로 재조정할 생각이야.”
나는 화제를 돌렸다.
리안도 더는 RAM 문제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이 없는 듯 내 화제 전환을 바로 받아들였다.
“정확히 어떻게 투자금을 재조정하자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우선 AAM 투자금은 앞으로 내가 전부 관리할 생각이야.”
AAM을 아예 청산할 생각이었지만 리안에게도 그 사실을 미리 말할 생각은 없었다.
“조민이 아쉬워하겠네. AAM 투자를 전담하게 된 것에 아주 기뻐했는데 말이야.”
말을 하는 리안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투자금을 이렇게 재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책상에 있는 메모지를 꺼내 숫자를 적어 나갔다.
“현재 W&R의 투자금이 9억 2천만 달러 정도잖아. 그러니까. 리안 네가 그중에서 5억 달러, 카이 황이 2억 달러, 브레이크가 1억 달러, 그리고 조민이 예전 AAM에서처럼 일본과 한국에 각각 8천만 달러와 4천만 달러, 1억 2천만 달러의 투자금을 맡는 거지. 조민은 실질적으로 AAM에서 했던 투자를 W&R의 이름으로 계속하는 셈이야.”
“조민은 기뻐하겠지만 이러면 브레이크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조민보다 금액이 적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신경 쓰지 않을걸. 브레이크가 러시아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러시아야 자본 시장에서는 변방이지. 브레이크도 나이를 생각하면 좀 더 금융 중심지에서 자기 실력을 발휘하고 싶을 거야. 리안 너도 예전 아시아에 주로 투자할 때보다 지금이 몸은 힘들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잖아. 안 그래?”
“그렇기야 하지.”
미국 증시가 열리는 시간은 홍콩 시각으로는 한밤중이었다.
덕분에 리안은 주중에 야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 W&R에 RAM이 있잖아. 그것까지 합치면 오히려 더 많은 금액이야.”
“그러네, RAM이 있었지. 내가 제안하고도 깜빡했어.”
“그럼 너도 이 제안에 찬성하는 거지?”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생각과는 달리 RAM을 완벽히 정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반년 후에 RAM이 정리되면 흔적은 완전히 지워진다.
리안이 반대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나는 RAM의 투자자들과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그에게는 지인이자 홍콩에서 필요한 인맥이었다.
내 일을 대신 해 주는 리안과 카이 황에게 그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었다.
지금은 말을 바꿔 탈 때가 아니었다.
2.
다음 날 투자금 재조정은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조민이 굉장히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내 생각처럼 브레이크는 자신보다 조민의 투자금이 조금 더 많은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RAM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온통 독일 증시와 DAX 지수에 포함된 주요 기업들에 가 있었다.
팀 회의를 마치고 내가 만난 사람은 장샤오이였다.
“이렇게 따로 만난 것이 오랜만이네요. 이번에 말 그대로 엄청난 이익을 얻으셨더군요.”
오랜만에 만난 장샤오이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얼마 전 정리한 선물과 옵션에서 번 이익에 관한 이야기였다.
“꽤 벌기는 했죠.”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던 선물 옵션 중 꽤 많은 양을 2팀을 통해서 처분했다.
우리 팀원을 제외하고 우리가 번 액수를 가장 근접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장샤오이였다.
“그런데 계산해 보니 금액으로는 그렇지만, 하락 포지션을 꽤 오래 유지해서 그렇지 수익률만 따지면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더군요.”
장샤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나요? 하긴, 예전 수익률도 높기는 했죠.”
“오늘 할 이야기는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아시겠지만 테러 이후에 주요국에서 시장에 꽤 많은 돈을 풀고 있습니다. 투자자들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다시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2팀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지난번 나는 장샤오이를 만나 한동안 현 투자 상태를 유지할 생각이라면서 2팀에 맡길 거래가 없다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었다.
이제 그 말을 바꿀 때였다.
“아시아 증시는 지금도 할 수 있을 테니 유럽과 미국을 담당할 전담 직원들을 배치해 달라는 말씀이겠죠?”
장샤오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은 끝나신 것입니까?”
지난번 장샤오이는 팀원 중에서 옥석을 나누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대충 끝났어요. 곧 3팀의 거래를 전담할 팀원들을 알려 드리죠.”
“감사합니다. 쉽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요.”
“아니요, 오히려 고마운 것은 우리죠. 이번에 3팀의 거래를 통해서 우리 팀이 벌어들인 거래 수수료만 200만 달러가 넘어요. 지금 추세라면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렇게 돼야죠. 그리고 따로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바빠서 미뤄졌던 자동차 부품 공장의 중국 진출을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제안요?”
“예. 혹시 중국 자동차 회사 중에 아는 회사가 있습니까?”
“있기는 한데······. 무슨 일이죠?”
장샤오이가 물었다.
그녀는 주식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훨씬 관심이 있는 표정이었다.
“제가 아는 태국 회사 중에 자동차 부품 회사가 있습니다. 경영자가 화교 출신이고요.”
“그런데요?”
“그 회사에서 얼마 전 한국 부품 회사에서 기술을 도입해서 꽤 좋은 제품을 만들어 냈는데 중국에 진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품만 좋다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중국에는 공식적으로만 100개가 넘는 자동차 회사가 있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으니까요.”
“잘됐네요. 투자금 일부를 팀장님도 아시는 W&R을 통해서 조달할 생각입니다. 다만 그 회사 지분 중 상당수가 국외에 있는 회사라서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W&R은 홍콩에 등록된 회사지만 내가 가진 지분 87%가 여러 회사 명의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회사들은 전부 해외에 있는 회사들이었다.
“W&R이면 투자금은 충분하겠네요.”
“아시겠지만 투자금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W&R은 9억 2천만 달러의 투자금을 보유한 회사였다.
그 투자금 전부는 다시 선물이나 주식에 나눠서 투자되겠지만 회사에 투자한다고 해서 한 번에 모든 투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투자에서 얻은 이익으로도 자동차 부품 회사 중국 투자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지난달 중국에 대한 직접 투자액이 70% 급감해서 실적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요.”
“장 팀장님께도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적당한 회사를 조사해서 알려 드릴게요.”
우리는 투자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가 지금 일본에 가야 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세부 사항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헤어지기 전 장샤오이가 입을 열었다.
“이런 질문 조심스러운데, 혹시 테러를 예상하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시장이 내림세일 거로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 테러가 터진 거죠.”
테러를 예상하기 했지만, 장샤오이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미국에서 테러에 관한 정보가 돌았다고 하기에 에드릭 씨도 들었나 생각했었습니다. 투자와는 별개로요.”
“저도 뉴스를 보고 놀랐습니다. 테러가 일어날 것을 알고도 막지 못했다니 안타까운 일이죠.”
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