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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최고는 좋은 것의 적이다
1.
장샤오이와 헤어진 후 카이 황을 찾아갔다.
지난번과는 달리 빌딩 입구에 경비가 배치된 것은 물론이고 개찰구를 통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는 신분을 밝히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카이 황의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단지 빌딩 입구만이 아니었다.
지난번 카이 황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카이 황의 대표 사무실이 있는 사무실은 적막했다.
비서를 제외하면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카이 황이 나를 보고는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벌써 3팀 사무실을 준비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 배치와 실내장식이나 사무 비품에 구매에 관해 시안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시안 중에 마음에 드시는 것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추가로 요구할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설계도가 벌써 나왔나요?”
“예전부터 준비해 두었습니다. 설계가 정해지면 곧바로 공사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카이 황의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명문 가문의 저력인가?
카이 황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준비되어 있다는 시안들을 살폈다.
시안은 전체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같이 일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는 사무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왕 꾸미는 거, 내년 독립한 이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게 좋겠네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카이 황이 물었다.
“일단 제 사무실이 너무 크네요. 내년에 독립하더라도 W&R의 대표는 카이 황 씨가 계속 맡으실 텐데······. 대표실보다 제 사무실이 더 크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죠.”
“알겠습니다. 혹시 지금 류오린에서처럼 팀원들과 같은 사무실에 있는 구조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차피 내년에 독립하면 지금 팀원들 하나하나가 각자 자신의 팀을 이끌어야죠.”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그렇겠군요. 내년이면 지금보다 투자금 규모가 커질 테니 전담할 팀들이 따로 필요하겠죠.”
카이 황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제 사무실을 따로 만들어야 하지만 여기 설계안들처럼 클 필요는 없습니다. 제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이 황이 대답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W&R의 투자금은 9억 2천만 달러.
거의 10억 달러에 달했다.
돈이 생기면 그에 따른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귀찮게 하는 사람들은 없고요?”
“왜 없겠습니까.”
“그래요?”
“예. 이번에 우리가 엄청난 이익을 봤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에도 꽤 여러 곳에서 투자금을 맡기겠다고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제야 빌딩 입구에 있었던 경비나 검색대가 이해가 되었다.
카이 황이 지난주부터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카이 황에게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리안과 카이 황이 겪은 일을 들을 수 있었다.
2.
내 생각대로 거액을 벌어들이면서 생긴 문제였다.
아무리 류오린을 통한다고 해도 몇 주 사이에 5억 달러 정도의 이익을 얻은 사실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특히 RAM의 투자자들이 문제였다고 한다.
그들은 테러가 일어난 바로 다음부터 리안이나 카이 황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들의 투자금이 안전한지 확인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테러로 손해가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이익을 봤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RAM의 투자자들이 큰 이익을 봤다는 소문은 W&R도 큰 이익을 봤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RAM이나 W&R이나 모두 궁극적으로는 리안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W&R은 초반 홍콩 선물에서 거액을 벌어들이며 홍콩 투자회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그 후로는 누구나 짐작하는 일이 벌어졌다.
홍콩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사람들이 리안과 카이 황에게 RAM처럼 투자금을 받아 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고 한다.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어쩔 수 없죠. 일단 전부 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대부분이 한동안 투자를 새롭게 받을 여력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대부분이라면 아닌 사람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죠.”
“어떤 사람들이 가장 귀찮게 합니까?”
내 질문에 카이 황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홍콩의 삼합회나 중국 흑사회 쪽 인물들이 좀······.”
카이 황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그런 조직에서 리안이나 카이 황 씨가 관계된 회사를 귀찮게 한다는 말입니까?”
삼합회가 예전이나 삼합회였지 지금은 홍콩에서 거의 뿌리째 뽑힌 상태였다.
홍콩은 70년대 염정공서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반부패운동과 삼합회에 대한 단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더욱더 법이 강화되었다.
홍콩의 삼합회 조직 대부분은 합법적인 회사로 거의 변화가 끝나 가고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설사 삼합회가 예전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야 삼합회나 흑사회가 무서운 조직이겠지만 리안의 가문은 보통 가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리안을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한다면 모르지만, 투자를 받아 달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리안 도련님의 가문은 예전에도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뒤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었죠. 더구나 이번에 귀찮게 하는 조직들은 마약을 다루는 삼합회 하부 조직이나 본토에서 넘어온 흑사회 조직들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마약을 다루는 조직들은 조직 간 교체가 빨라서 진짜 홍콩을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죠.”
다른 나라도 마약은 엄하게 단속하지만, 중국은 마약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엄격하게 단속하는 나라였다.
바로 아편전쟁의 기억 때문이었다.
처벌도 엄해서 잡히면 단순 투약자가 아닌 이상 마약 밀매에 관여된 조직원의 경우 사형이 당하는 일이 흔했고 운이 좋으면 중형을 받는다.
당연히 중국 본토나 홍콩에서 마약 밀매 조직이 오래 유지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워낙 큰 이익이 걸린 만큼 마약 밀매 조직은 항상 있었다.
마약 밀매 조직은 빠르게 교체되고는 했다.
카이 황의 말대로라면 귀찮게 한다는 홍콩의 삼합회나 본토의 흑사회 모두 마약과 관련된 조직이었다.
카이 황이라면 전화 한 통화로 바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리안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카이 황 씨가 처리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게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니요?”
“제가 알아보니 홍콩 정부나 경찰 쪽에서도 삼합회나 흑사회가 우리를 귀찮게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더군요.”
“알고 있으면서 처리를 않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마약 관련 조직이 투자회사를 압박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홍콩 정부가 나서지 않고 있다는 말 아닌가?
이건 범죄 조직이 리안과 카이 황을 협박한다는 것보다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3.
“현재 홍콩의 행정장관인 퉁치화는 상하이방 사람입니다. 홍콩 반환 직전부터 앞장서서 리안 도련님의 아버님에게 압박을 넣은 당사자입니다. 그는 리안 도련님의 가문이 다시 재기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W&R가 삼합회나 흑사회 자금을 받아들이는 순간 바로 대대적인 조사가 들어올 것입니다.”
“홍콩 행정장관이 정적이라는 말씀이군요.”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퉁치화 혼자라면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 홍콩에는 우리를 도와줄 세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리안의 가문이 그렇게 외톨이인지 몰랐네요. RAM에 투자했던 분들은 리안의 편인 줄 알았는데요.”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문과 가장 가까웠던 분들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바로 RAM의 투자자분들이 그런 예죠. 마약이나 파는 놈들이 W&R이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W&R은 리안 도련님이나 제가 가진 지분을 제외하면 지분 전부가 해외 투자자들의 소유입니다. 투자금도 이제 10억 달러나 되니 신생 투자회사로는 작지 않은 규모고요. 한마디로 욕심은 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숟가락을 얹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죠. 하지만 우리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면 끼어들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죠.”
한마디로 카이 황의 말은 홍콩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두 W&R을 노리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
“귀찮게 됐네요.”
내 입에서 말이 저절로 나왔다.
“지금은 홍콩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가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도움을 요청하면 곧바로 W&R에 한 다리 걸치려고 할 겁니다. 홍콩에서는 부탁을 아무런 대가 없이 들어주는 예가 없으니까요. 적어도 RAM처럼 투자를 받는 정도는 요구할 겁니다. W&R에 투자를 받으면 바로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카이 황이 뒷말을 흐리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W&R은 내가 해외 회사들을 통해 지분 대부분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투자 결정에도 전권을 가진 회사였다.
카이 황은 투자를 받아들이자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카이 황의 얼굴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이면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투자를 받아들인다면 아마 리안이 다시 가문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투자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RAM을 내년 4월까지 유지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노선입니다.”
카이 황의 마음은 알지만, 솔직히 나는 투자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W&R의 투자금인 9억 2천 달러도 내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액이었다.
“투자를 받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버티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그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리안을 위해서 투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앞뒤 가리지 않는 자들이니 다른 팀원들의 안전에도 신경 써 주십시오.”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콩 정부나 경찰도 이미 팀원들에게 사람을 붙여서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도 우리를 압박해서 협조를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지 사람이 다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따로 사람을 붙여 놓았습니다.”
“잘됐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한동안 일본에 가 있을 생각입니다.”
카이 황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홍콩에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나가신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요즘 일본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아시아에서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은 절대적이니까요.”
일본을 가는 것은 CIA의 임무 때문이지만 나는 일본 경제 상황 핑계를 댔다.
일본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본에 가시면 조심하십시오, 요 몇 년간은 홍콩보다는 일본이 삼합회의 범죄가 더 극성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모르니 경호원들과 항상 같이 다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W&R의 사무실을 나와 AAM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이었다.
내가 이 사무실에 온 것은 일본으로 가기 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W&R을 협박한다는 삼합회와 흑사회의 마약 밀매 조직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카이 황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 생각에 그건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문제를 대하는 리안이나 카이 황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일을 벌이기 전에 너무 생각을 많이 한다는 부분이었다.
상하이방과 대립하다가 집안이 몰락한 경험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조심하는 것이 습관화된 듯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다 보면 최고의 방법을 선택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파리나 하루살이가 귀찮게 하면 파리나 하루살이를 잡아야지, 파리나 하루살이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최고의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귀찮은 하루살이를 잡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몇 가지 보고서를 조합해서 우선 홍콩이 아시아 마약 유통의 중심 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삼합회의 하부 조직과 중국 본토 흑사회의 연합이 마약 유통에 관여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여러 가지 보고서를 짜깁기해서 하나의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내가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시절 가장 잘하던 일 중 하나였다.
나는 완성한 보고서를 CIA 본부에 보냈다.
CIA가 911 테러 관련 사건으로 바쁘기는 하지만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이런 보고서를 놓칠 리가 없었다.
CIA는 삼합회나 흑사회를 쫓기에 적당한 살충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