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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부정한 이득은 오래가지 못한다
1.
지시한 일을 처리한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단테 패트릭을 찾았다.
“자네에게 이런 일을 맡겨서 미안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만큼 이 일을 잘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단테 패트릭은 기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을 나에게 맡긴 일에 대해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전에도 했던 일인데요.”
기자들을 만나 정보를 주고 설득하는 일은 반년 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와는 다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야.”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나에게 이번 일을 시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나와는 실적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만, 어차피 실적을 세워도 필요가 없었다.
“지난번보다 이번에는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어땠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기는 했죠. 그때는 주로 주간지나 군소 신문사 기자들을 상대했지만, 이번에는 요미우리나 산케이 같은 거대 신문사의 기자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좀 뻑뻑하기는 하더군요. 하지만 기자들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더군요.”
내가 만나 본 기자들은 대부분 본인에 대한 특권 의식과 특종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자들에게는 어떻게 접근했나? 무작정 정보가 있다고 만나자고 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반년 전 알게 됐던 기자들을 통해서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들에게 모리 전 총리 쪽 사람이라고 소개했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변명을 써먹었습니다.”
반년 전에 나는 기자들을 만나 하시모토 류타로의 친중 성향을 비판하면서 그와 주일 중국 대사관 여직원 사이의 스캔들 자료를 넘겼다.
이번에는 알 카에다가 일본 미군 기지 및 주요 전략 시설을 공격했다는 CIA 자료를 넘겼다.
물론 당연히 가공된 자료였다.
“우리가 만든 자료를 믿던가?”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법이죠. 자료가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넘긴 자료를 보고 요미우리 기자들이 꽤 많이 놀라더군요. 아마 조만간 적당한 시점에 기사를 낼 것 같았습니다.”
“잘됐군. 요미우리 다음으로 만난 언론사가 산케이라고 했던가?”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예. 산케이 신문이 일본 5대 일간지 중에서 5위로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방지이기는 하지만, 영향력은 그보다 커서 요미우리와 아사히 다음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미우리 다음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렇지. 산케이 신문은 일본 우익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할 뿐 아니라 자민당과도 가깝지.”
“산케이 신문의 기자를 설득하기는 쉬웠습니다. 굳이 만나지 않았어도 파병 찬성 기사를 적극적으로 썼을 것 같더군요. 그래도 우리가 준 자료를 첨부하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았어. 이제 다음 단계는 여론조사인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그렇습니다. 요미우리와 산케이에서 기사로 여론을 형성하고 난 이후에 여론조사를 시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질문 문항만 잘 작성하면 병력 파병에 절반 이상의 찬성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 끝난 거죠.”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썼던 침묵의 나선 효과를 이번에도 써먹을 수 있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는 계속 지켜봐야 하네.”
일본을 떠나지 말고 파병안이 통과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였다.
“자네 생각에는 언제쯤 파병안이 통과될 것 같나?”
“아무래도 10월 20일 에이펙(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전까지는 통과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일은 어느 정도 끝났으니 며칠 동안 인도네시아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인도네시아?”
“예. 전부터 계속 요청이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꼭 가야 하나?”
“여기 일이 급해서 미뤘는데 인도네시아 사정이 전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쪽 선임 요원인 이반 부카드 씨가 특별히 요청을 해 왔습니다.”
“어쩔 수 없지. 혹시 모르니 계속 연락하게.”
단테 패트릭이 허락했다.
2.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에 나는 필리핀의 마닐라에 잠시 들렸다.
여기서 처리할 일이 있었다.
“어서 오게.”
엘만 지부장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고요?”
“맞네.”
엘만 지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체포된 직후부터 병을 핑계로 군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재판도 중지된 상태였다.
그런데 아로요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재판을 재개했다.
여전히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필리핀 서민들과 빈민층에게는 영웅이었다.
필리핀의 극심한 빈부 격차 때문이었다.
한동안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직도 막강했다.
재판 재개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동이었다.
“골치 아프네요. 지금 상황에서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거랍니까?”
“아로요 대통령이 최근 돌아가는 정국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제정신입니까? 이슬람 반군이 알 카에다와 연계됐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은 나라를 분열시키려고 하다니요.”
아로요 현 대통령이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나 이슬람 반군에 대한 강경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차이는 있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미수아리가 이끄는 모로 인민 해방 전선과 친했고, 모로 인민 해방 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에 대한 강경 진압을 강행했다.
반면 아로요 대통령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휴전을 하고 미수아리를 주지사직에서 해임했다.
“그래서 자네를 급히 부른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아로요 대통령에게 경고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방식이 좋을 것 같나?”
“뭐 있겠습니까?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재판정 주위에 모으고 따로 이번 전쟁에 반대하는 무슬림 시위대를 과격 진압해야죠.”
에스트라다 지지 세력의 건재함을 알려서 아로요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경보를 보내는 한편 필리핀 내부의 무슬림 세력을 자극해 위기감을 조성하는 방법이었다.
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방법이군.”
무슬림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현재 필리핀에는 몇 달 있었던 작전의 결과로 미군 부대가 필리핀군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리핀 경찰은 필리핀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조직이었다.
마닐라에서 일을 처리한 나는 바로 자카르타로 향했다.
3.
몇 달 만에 온 자카르타의 분위기는 전과는 또 달랐다.
필리핀의 무슬림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대하는 것은 비슷했지만 필리핀은 기독교 인구가 90%를 넘는 나라로 무슬림 인구는 5%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민다나오섬에 거주했다.
무슬림이 시위를 벌인다고 해도 마닐라에서 그 영향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반대로 인도네시아는 대부분이 무슬림인 국가였다.
자카르타 시내 분위기는 필리핀보다 훨씬 험악했다.
시내 곳곳에 전쟁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얼굴 한 번 보기 어렵군.”
나를 본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나는 마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이나 내 도움 요청을 거절한 누구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네.”
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온 요청이 모두 골치 아파서 거절했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저희 팀도 원래 하던 임무를 포기하고 여기저기 달려갈 정도로 정신없습니다. 저만해도 요즘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네요. 여기 오기 직전에도 마닐라에 들렀다 왔고요. 이번에 자카르타에 오려고 겨우 시간을 내야 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 봐야 하고요.”
나는 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휴······.”
내 말을 듣던 이반 부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편하게 지내는 요원이 어디 있겠나. 그냥 답답해서 투정해 본 것이네.”
“오면서 보니 자카르타 분위기가 아주 험악하더군요.”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화를 키웠어. 아무리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세속주의적인 면이 있어도 그렇지. 인도네시아는 그냥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 정도만 이야기했으면 됐는데 이건 무슨 마치 군대라도 파견해 줄 것처럼 나서니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이 가만있겠나?”
메가와티 대통령이 아무리 미국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선다고 하더라고 한계가 있었다.
미국의 누구도 인도네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직접적이니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구가 많기는 하지만 인도네시아 군사력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아니, 설사 군사 강국이라고 해도 무슬림인 인도네시아군을 믿고 같이 작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군수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 파키스탄처럼 군사기지를 이용하기에도 거리가 멀었다.
“내부 동요가 크겠군요.”
“당연하지 않겠나. 인도네시아군 내부도 크게 흔들리고 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구스 장군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는데······.”
이반 부카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구스 장군이라면 예전 와히드 전 대통령을 하야시킬 때 군을 동원하기 위해서 접촉을 고려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위란토 장군을 선택했고 그를 통해 군대를 동원해서 대통령궁을 포위해 와히드를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렸다.
“아구스 장군이 사망했습니까?”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가 당황했다.
그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8월 30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였네. 새벽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고 하더군.”
8월 30일이라면 911 테러가 일어나기 겨우 2주 전이었다.
심장마비라······.
이반 부카드의 말과 표정으로 봤을 때 아구스 장군의 죽음은 암살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CIA가 직접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묵인 아래 암살이 진행된 것 같았다.
와히드를 몰아내기 위해 위란토 장군의 도움으로 군대를 움직였을 때 예정된 일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위란토와 아구스가 앙숙이라는 것은 인도네시아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위란토 장군의 도움을 받은 이상 CIA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같은 때 사병들이나 젊은 층에 인기가 높은 아구스 장군이 살아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군요.”
부정한 방법으로 군을 움직여 와히드 대통령을 끌어내린 대가를 받은 셈이었다.
“어쩌겠나, 지금 후회해 봐야 소용없지.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으니 의미 없는 이야기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건 메가와티 대통령의 발언도 마찬가지죠. 이미 한 발언을 없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 인도네시아 무슬림 사회에서 강경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이 누굽니까?”
“원내 제3정당의 대표이자 부통령인 함자 하즈(Hamzah Haz)네. 우리는 그가 인도네시아 과격파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부통령이 된 겁니까? 저는 원내 제2정당인 골카당에서 부통령이 나올 줄 알았는데요?”
현재 인도네시아 선거법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부통령은 인도네시아 의회에서 선출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제2당인 골카당에서 선출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와히드가 탄핵당한 이후에 골카당이 부통령을 누구로 세울 것이냐로 둘로 갈라졌었네. 더구나 메가와티 대통령이 골카당에서 부통령이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 골카당이 부통령이 되면 자신도 와히드처럼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지. 메가와티 대통령 자신이 암살을 당하기라도 하면 자연스럽게 골카당 출신 부통령
이 대통령이 되는 셈이니 말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위란토가 탄핵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한 것에서 보듯이 골카당이 가진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골카당에서 부통령 자리를 두고 내부 분열이 나온 것도 메가와티 대통령이 걱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메가와티 대통령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함자 하즈 부통령을 견제할 방법이 있어야겠군요.”
“그런 방법이 있겠나?”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네요. 이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쓸 방법은 한 가지뿐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라니?”
“미친개를 풀어놓죠.”
“미친개?”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