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143.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1.
“미친개를 풀어놓자니, 무슨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미친개를 풀어놓자!
이건 미친개라고 불릴 정도의 인물을 통해 메가와티 대통령과 함자 하즈 부통령을 견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반 부카드도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묻는 것은 미친개가 누구를 말하는가였다.
인도네시아에는 미친개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많았다.
독재자였던 수하르토가 쫓겨난 지 겨우 3년이 지났다.
수하르토는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가장 부패한 독재자였다.
그가 부정 축재한 재산만 350억 달러였다.
수하르토가 최악의 독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살해한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직후에 수하르토의 지시로 살해당한 인도네시아인의 수만 50만 명이 넘었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수는 최소 150만 명이었다.
집권하고 1년 안에 200만 명의 희생자가 나온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기준으로도 엄청난 숫자였다.
1998년 물러나기 전까지 수하르토의 집권 기간 33년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얼마 전 독립한 동티모르에서는 교회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불을 질러서 태워 죽이는 일도 흔하게 벌어졌다.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바로 예전 내가 이용했던 유리코 구테레즈였다.
유리코 구테레즈처럼 수하르토의 지시로 미친 짓을 벌인 사람들 대부분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반 부카드의 머릿속에 미친개 후보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토미 수하르토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자네 제정신인가?”
이반 부카드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토미 수하르토는 생각하지 못한 이름인 듯했다.
그건 토미 수하르토가 미친 짓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토미 수하르토라면 미친개 정도가 아니지 않나.”
“그렇기는 하죠.”
토미 수하르토는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도 다른 자식들처럼 특혜로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1998년 외환 위기 당시 토미 수하르토의 재산은 9억 달러 정도였다.
단순히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으는 데서 끝났다면 이반 부카드가 토미 수하르토라는 이름에 저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미 수하르토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후였다.
수하르토가 대통령에서 쫓겨난 이후에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하르토 일가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자카르타에는 폭탄 테러가 연이어 일어났다.
테러의 목표는 수하르토 일가를 조사하던 검찰 직원들이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화약을 제조하는 기업을 운영하는 토미 수하르토였다.
검찰총장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얼마 후······.
인도네시아 검찰청은 수하르토 일가에 대한 조사를 무기한 연기했다.
검찰은 토미 수하르토의 폭탄 테러 때문이 아니라 수하르토 지지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내세웠던 명분이 국민 통합이었다.
그렇지만 검찰총장이 토미 수하르토의 폭탄 테러에 굴복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폭탄 테러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지 토미 수하르토는 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른 법적인 분쟁이 휘말리자 다시 살해 지시와 폭탄 테러를 벌인 것이다.
결국, 검찰과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었고 토미 수하르토는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잠적한 상태에서도 토미 수하르토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폭탄 테러와 살인을 저질렀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토미 수하르토가 관련된 재판에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대법관의 부인이 두 명의 괴한에게 살해된 일이었다.
대법관의 부인이 토미 수하르토가 자신의 남편에게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시도했다는 폭로를 한 직후였다.
2.
“토미 수하르토가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지금 인도네시아 상황은 이 정도 미친놈이 아니면 메가와티 대통령이나 함자 하즈 부통령을 견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토미 수하르토는······.”
이반 부카드는 내 의견에 부정적인 듯 인상을 찡그렸다.
“자네가 그자를 보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네. 자신 집안의 정적인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됐는데도 숨어서 대법관의 부인을 살해하는 자야.”
“토미 수하르토가 저런 미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토미 수하르토가 세 살 때였으니······. 토미 수하르토 그자는 살면서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이 살아왔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 아니겠나?”
특권층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숨어서 그런 본성을 드러내지 토미 수하르토처럼 드러내 놓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토미 수하르토가 무서운 것이 없이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맞습니다. 지금 필요한 자는 그런 미친놈이죠. 사람들은 미친놈을 무서워하지 않더라도 피하려고 하는 법이죠. 더구나 골카당 내에는 여전히 수하르토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를 이용하면 대통령과 부통령만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도 있다는 말인가?”
“토미 수하르토를 이용하면 위란토 장군도 견제할 수 있습니다.”
와히드 전 대통령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CIA는 군부 실력자인 위란토 장군의 도움을 받았다.
아마도 협조의 대가는 아구스 장군에 대한 암살을 묵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구스 장군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이반 부카드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적어도 이반 부카드가 원해서 아구스 장군의 암살을 묵인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위란토의 세력 기반은 군부와 골카당이었다.
그리고 골카당은 수하르토가 세운 당이었다.
토미 수하르토를 통해서 위란토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자네 말대로 토미 수하르토가 지금 상황에서 쓸 만한 패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토미 수하르토에게는 폭탄 테러는 물론이고 살인미수, 살인 등등 혐의가 줄줄이 걸려 있네.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바로 체포될 텐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토미 수하르토에게 걸린 혐의는 한둘이 아니었다.
토미 수하르토가 메가와티 대통령이나 함자 하즈 부통령 그리고 위란토 전 장군을 견제할 만한 인물이라고 해도 해도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토미 수하르토의 이름을 꺼낸 것은 나름의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미 수하르토에게 걸린 혐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 폭탄 테러? 살인죄?”
“제 생각에는 부정부패 혐의라고 생각합니다.”
“부정부패?”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부정부패 혐의가 유죄가 확정되면 그가 가진 재산 대부분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빼앗기게 됩니다. 해외에 빼돌린 재산도 환수당할 테고요. 하지만 재산을 지킬 수 있다면 상황이 다르죠. 솔직히 말해서 인도네시아에서 토미 수하르토 정도 재산이 있는 사람이 실형을 살아도 얼마나 살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인도네시아 대법원을 움직여서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부정부패 기소를 기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는 명분으로요.”
“그게 되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대법관의 부인을 살해한 것이 겨우 2달 전이네.”
“저는 오히려 지금이라서 대법원이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기소를 기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궤변인가?”
“다른 때라면 가장 중요한 혐의인 부정부패에 대한 기소를 기각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겠죠. 하지만 지금은 911 테러와 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임박으로 인도네시아 국민의 관심이 그곳에 쏠려 있습니다. 토미 수하르토의 부정부패에 대한 기소를 기각하더라도 국민의 반발이 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대법관들은 어떻게 설득할 생각인가? 동료 법관의 부인이 살해당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동료 법관 부인의 살해에 대한 처벌을 받게 하려면 일단 부정부패 혐의를 기각해야 한다!”
“대법관들이 바보도 아닌데 그런 말에 넘어가겠나?”
“안 넘어가겠죠. 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도 아니죠. 부정부패 혐의가 남아 있는 이상 토미 수하르토는 계속 숨어 있을 테니까요. 여기에 돈으로 대법관 중에서 몇 명만 매수하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매수라······.”
“예. 토미 수하르토의 돈을 거절했던 대법관이 이상한 것이지, 여기 인도네시아에서 돈을 싫어하는 법관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매수할 자금은 토미 수하르토에게 받아 내면 되고요.”
내 말을 들은 이반 부카드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나는 설득을 계속했다.
“더구나 얼마 전 매수를 거절했다가 동료 법관의 부인이 살해당한 상황입니다. 자신들의 가족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 안되면 협박을 해도 되고요. CIA라면 지금 대법관들에 대한 약점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무슨 소리인가? 그런 약점이 있을 리가 있겠나? 어쨌든 알겠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겠군. 토미 수하르토에게 말을 전할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겠네.”
3.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부정부패 기소를 기각하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토미 수하르토는 기소가 기각되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골카당에서 여전히 수하르토 일가를 따르는 의원들을 이끌고 대통령과 부통령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CIA가 요구한 조건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국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미국을 비판하는 시위는 계속됐지만, 정치권은 어느 정도 진정을 찾고 있었다.
“역시 자네가 오니 바로 해결책이 나오는군.”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전에 요청하셨던 것들은 저희 팀의 능력 밖이었습니다.”
예전 이반 부카드의 요청은 인도네시아에 숨어든 알카에다의 정보원을 추적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것들이었다.
그런 요청을 한 것을 봐서는 이반 부카드는 내가 소속됐다고 믿는 에이전트 에스 팀의 정보망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고 에이전트 에스 팀의 정보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국가는 홍콩이나 필리핀, 태국, 한국 정도였지 인도네시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도 리안이나 카이 황 그리고 리코나 리레이, 정윤호 같은 사람들을 통해 얻는 정보였지 정보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어쨌든 이번에도 신세 많이 졌네. 에이전트 에스 팀에 받기만 하는군. 혹시 자네 팀도 파키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나?”
“파키스탄요?”
“그래, 파키스탄.”
파키스탄은 예전에도 위험한 곳이었다.
본국과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이 벌어지면 더욱더 위험한 곳이 될 것이다.
절대 파키스탄과 엮이는 일은 피해야 했다.
“그쪽은 우리 팀의 활동 범위가 아닙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거 안타깝군.”
“왜 그러십니까?”
내가 물었다.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에는 중동에서 활동했었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다시 중동이나 파키스탄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하긴 지금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이기는 하죠. 위험한 곳이기도 하고요.”
“자네라면 파키스탄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무슬림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심리전이거든.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활동하더라도 자네가 위험할 일은 없을 거네. 어차피 지금처럼 정보를 분석하고 작전을 세우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정보를 분석하고 작전을 세우기만 하면 된다고?
나는 워싱턴에 있을 때 정보를 분석하면서 많은 보고서를 읽었다.
직접 활동을 한 적은 없지만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냉전 시대 공산국가나 중동에서 정보를 얻는 방법은 문서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적대 국가에서 정보원을 매수하거나 고문을 통해 얻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을 직접 만나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런 일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디서 약을 파는 것인지.
“저도 도와드리고는 싶은데 에이전트 에스 팀은 동아시아에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파키스탄까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야 했다.
이반 부카드와의 인연도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