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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잘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잘 대접하라
1.
자카르타에서 홍콩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일본으로 가기 전, 투자 회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에 도착해서 내가 향한 곳은 W&R이 있는 건물이었다.
내가 홍콩을 떠나 있는 사이 짧은 시간에 이미 팀은 새로운 사무실로 옮긴 상태였다.
사무실이 있는 10층에 도착했을 때는 팀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경비가 연락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다 나오실 필요 없는데······.”
모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대표가 회사에 처음 출근하는 날인데 나와 봐야지. 이제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잖아.”
리안이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눈치 볼 사람이 없기는 왜 없어, 여기는 W&R의 직원들도 있는데······. 전에 말했듯이 우리 팀원들은 어쩔 수 없지만, W&R의 직원들에게 내가 이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할 생각이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있던 카이 황이 말했다.
“10층에는 팀원들뿐입니다. 그리고 아래 9층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을 8층으로 내려보내고 9층을 자료실과 회의실로 변경하는 중입니다.”
“9층에 있던 직원들을 8층으로 내려보냈다고요?”
“그렇습니다. 10층은 앞으로 출입을 통제할 생각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직원들을 계속 충원하는 중이라서 사무실을 확장할 생각이었습니다. W&R의 직원들은 7층과 8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해서 뭐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카이 황에게 회사 대표를 맡긴 상황이었다.
이 건물도 리안이 W&R에 출자했으니 W&R의 재산이었다.
회사 대표가 회사 소유의 건물 재배치를 한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반박하기에는 상황도 좋지 못했다.
직원들이 있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굳이 간섭할 정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복도에 나온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모두 모였으니 바로 투자 회의 시작하죠.”
“10층에도 팀원들이 모두 모일 만한 회의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 끝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나는 카이 황을 보며 물었다.
“혹시 회의에 참석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도 참석해도 되는 겁니까?”
“투자사의 대표시니 자격은 충분하시죠.”
“그럼 참석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매번 홍콩에 대한 투자 방향을 나중에 통보받아서 갑갑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카이 황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향했다.
2.
나는 사람들이 모두 탁자에 앉자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은 보고서가 없으니 제가 그냥 구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각자 현재 투자 상황에 관해서 간단히 투자금 규모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나부터 하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리안이었다.
“현재 어제까지 나스닥 선물 가치는 2억 3천 1백만 2······.”
“잠시만요.”
나는 리안의 말을 잘랐다.
“어차피 지금 결산을 하는 것도 아니니 1천만 단위까지만 하죠.”
우리의 투자 규모는 이미 100만 달러 단위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 성장했다.
“약 2억 3천만 달러 정도야.”
내가 말을 끊은 것에 약간 김이 빠졌는지 리안이 빠르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바로 뒤를 이었다.
“러시아 선물의 가치는 약 1억 7천만 달러, 독일 선물은 1억 2천만 달러 정도입니다.”
“일본 닛케이 지수 선물 가치는 약 9천만 달러, 코스피 선물 가치는 4천만 달러예요.”
“홍콩 항센 지수 선물 가치는 2억 3천만 달러 정도입니다.”
내가 따로 한국에 투자한 금액을 제외한 금액이 8억 8천만 달러였다.
물론 이 중에서 러시아 선물은 정확하게 말하면 W&R의 투자금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돈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국에 투자한 금액과 리안이 출자했던 건물과 부동산 가격까지 합치고 따로 내가 관리하는 AAM의 자금까지 합치면 10억 달러는 충분히 넘을 것 같았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지난주는 연준의 금리 인하로 예상대로 대부분의 주가가 상승했습니다. 러시아만 여전히 4주 연속으로 하락했지만 예상했던 결과였습니다. 테러 이후에 풀린 유동자금을 생각하면 저는 다음 주에도 지금의 상승세가 유지되리라 예상합니다.”
지난주 연준은 다시 금리를 2.5%까지 인하했다.
냉전 시대 이후 가장 낮은 금리였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약속했던 감세안으로 자금이 풀리고 있었다.
이것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직 경기 전망은 나쁘지만, 통화량이 워낙 많았다.
이른바 유동성 장세였다.
이미 몇몇 증시는 911 테러 이전의 주가를 회복한 상태였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굳이 포지션을 청산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군.”
“맞아. 그런데 러시아는 포지션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는 브레이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브레이크 씨.”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러시아는 증시가 다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브레이크 씨는 하락 포지션이었던 러시아 투자를 상승, 즉 롱 포지션으로 바꾸고 이제부터는 독일 증시에 집중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브레이크가 대답했다.
러시아 거래에서 손을 떼라는 말에도 브레이크는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서 내가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브레이크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에 투자하고 있는 RAM의 투자금은 이미 1억 7천만 달러까지 늘어나 있었다.
브레이크가 계속 러시아 투자를 맡고 있으면 한번 거래할 때마다 10만 달러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브레이크는 러시아 투자에서 손을 떼는 것은 브레이크에게 엄청난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독일 선물 투자로 받은 매주 받는 성과급만 해도 다른 곳에서 받던 연봉과 비슷합니다. 독일 증시는 조사해야 할 것도 러시아보다 많아서 함께하기 불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브레이크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증시에 대한 투자 회의는 이만 마칩니다.”
3.
회의를 마치고 카이 황에게 다가왔다.
“혹시 시간이 있으십니까?”
카이 황이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팀장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표님 사무실로 가시죠.”
회의실을 나와 카이 황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보니 리안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뭐야?”
“나도 너나 아저씨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가는 거야.”
리안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카이 황에게 이야기하면 리안에게도 들어갈 이야기였다.
우리는 카이 황의 사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카이 황은 조금 불편한 자세로 상석에 앉았다.
아직 리안보다 상석에 앉는 것이 불편한 듯했다.
“하실 말씀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자금 중 일부를 파키스탄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파키스탄요? 진심이십니까?”
카이 황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투자하겠다고요?”
내가 물었다.
“전쟁터가 되기는 무슨 전쟁터가 된다는 거야. 전쟁터가 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이지 파키스탄은 그냥 미군에 기지 빌려주고 군대가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야.”
리안이 말했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파키스탄이 전쟁터가 되지는 않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간 난민 중 3분의 2 이상인 100만 명 이상이 파키스탄에 몰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머릿속에 인도네시아에서 본 파키스탄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저도 파키스탄에 직접 투자할 생각은 없습니다. 파키스탄 기업 중에서 국영기업 위주로 주식을 사 볼 생각입니다.”
“굳이 파키스탄에 투자하시려는 이유가 있는 것 같네요.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되물었다.
“파키스탄은 핵 개발 이후 미국의 강한 경제제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려면 파키스탄의 협조가 꼭 필요하죠.”
“저도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제재를 모두 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투자할 이유로는 부족합니다.”
나는 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하는 말로 봐서는 이건 카이 황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발표된 것만 4억 달러의 대미 부채 유예, 1억 5천만 달러의 난민 원조 자금, IMF 25억 달러의 긴급 구제금융, 6억 달러의 추가 금융 지원이 결정됐어. 일본도 파키스탄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고. 미국으로서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협조를 약속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이 밀어주려는 것이지.”
현재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는 탈레반은 미국 정보부의 지원을 받은 파키스탄 정보부가 만들어 낸 조직이었다.
당연히 파키스탄군과 파키스탄 정보부 내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미국에 협조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일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파키스탄을 장악하고 있는 무샤라프가 군부독재자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파키스탄의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1998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나와즈 샤리프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몇 달 전에는 대통령을 몰아내고 본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내년에 선거를 통해 민간에 정권을 넘겨주겠다고 거듭해서 약속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샤라프가 미국에 협조하는 것은 그로서는 나름 정치적 생명, 아니 어쩌면 진짜 생명까지 건 모험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이 파키스탄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은 무샤라프 협조의 대가였다.
“앞으로도 계속 미국이 파키스탄에 금융 지원을 할 것으로 생각하시나 보군요.”
단기간에 미국과 동맹국이 파키스탄에 금융 지원을 하고 있지만 그게 말 그대로 단기간이라면 증시에 투자할 이유는 없었다.
“맞습니다. 전쟁 내내 미국은 파키스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려면 각종 물자를 조달해야 할 텐데······. 그중 일부는 파키스탄에서 조달하지 않겠습니까? 파키스탄의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그 일부라도 큰돈일 테고요.”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인구가 1억 3천만이 넘는 대국이었다.
군사력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세계에서 20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여기에 핵폭탄을 가진 핵보유국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가난한 나라였다.
특히 핵을 개발하고 난 이후 받은 경제제재로 공업과 관광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군사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주변국보다 그리 강한 군사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동쪽에는 아랍 국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이란이 있었고, 남쪽에는 실질적인 군사력이 10위권 중간대인 인도가 있었다.
그리고 서쪽에는 중국이 있었다.
북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가장 만만한 국가였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은 강대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실제 인도와의 국경분쟁에서 파키스탄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인도와의 전쟁에서 지고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리안과 카이 황은 미국이 어느 정도만 지원한다고 해도 파키스탄은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씀대로 파키스탄이 이번 전쟁으로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W&R의 지금 투자만으로도 이익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투자는 W&R이 아니라 전에 저와 도련님이 세운 투자 법인을 통해서 할 생각입니다.”
따로 투자하겠다는 말에 나는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투자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나중에 리안 도련님께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파키스탄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리안과 카이 황을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무슨 말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카이 황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리안을 끌고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에게서 도대체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듣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