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44화 (145/270)

(144)

#145. 입장을 분명히 해라

1.

“잘 돌아왔네.”

도쿄로 돌아온 나를 단테 패트릭이 반겼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과 ‘자위대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로 했네.”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은 자위대 해외 파병을 통한 미군에 대한 군수지원을 담은 법안이었고 ‘자위대법 개정안’은 주일 미군 기지에 대한 자위대의 경비를 허용하는 법안이었다.

“잘됐네요.”

“9월 초에 알 카에다 조직원 수십 명이 일본을 방문했었다는 요미우리 기사 이후에 일본 국민 사이에서 파병 찬성이 꽤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하더군. 이게 자민당 의원 설득에 꽤 큰 영향을 줬고 말이야.”

알 카에다에 관한 첩보는 내가 요미우리 기자에게 전해 준 정보였다.

물론 그들이 실제 알 카에다 조직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황상 알 카에다 조직원이 가능성이 컸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알 카에다 수십 명이 테러 직전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국민이 불안을 느끼는 데는 충분했다.

“일본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내 질문에 단테 패트릭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생각과는 달리 야당인 민주당 내 자위대 파병 반대 분위기가 강경해.”

“그렇습니까? 좀 의외네요. 민주당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줄 알았는데요.”

“일본 민주당에는 자민당 탈당 의원들과 사민당 탈당 의원들이 모여서 만든 정당인데 이 중에서 사민당 출신 의원들을 이끄는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이 파병에 부정적이라고 하더군.”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민주당이 반대한다면 일단 일본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도록 여론을 형성하면 통과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던 예상이 어긋날 수도 있었다.

“이유가 뭡니까?”

“며칠 전에 아사히 신문에서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46%가 나왔네. 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 42%보다 높지. 자위대의 무기 사용 기준 완화 방침에 반대하는 사람은 51%가 넘고 말이야.”

“아사히 신문의 발표 아닙니까? 요미우리 신문 조사에서는 60% 이상의 국민이 파병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발표도 있었고요.”

요미우리 신문과 산케이 신문이 보수 우익을 대표한다면 아사히 신문은 일본 내 진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다.

“맞네. 문제는 아사히 신문 여론조사에도 고이즈미 총리 지지율이 70%가 넘었다는 점이야. 몇 달 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으로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파병을 추진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네.”

“만약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에서 반대하고 나오는 단기간에 의견을 바꾸기는 어렵겠군요.”

“그렇지. 고이즈미 총리나 민자당이 뭔가 양보하고 나오지 않는 이상 계속 반대하고 나올 것 같아. 그런데 70%의 지지율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가 야당에 양보할 이유가 없지.”

“민주당이 그렇게 나오면 법안을 통과시킬 방법은 공명당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지금으로서는 그렇지.”

“현재 공명당 대표는 어떤 인물입니까?”

“공명당 현 대표는 칸자키 타케노리네. 중국 톈진에서 태어났고 도쿄 대학을 나왔지.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정을 주도한 인물이라서 설득이 쉬울 것도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아. 전형적인 공명당 의원이라고 우리는 파악하고 있네.”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공명당을 확실히 설득하려면 창가학회를 공략해야겠군요.”

공명당은 창가학회라는 불교계 종교 단체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다.

당의 정강으로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창가학회의 영향이었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전에 주신 자료대로라면 공명당도 그렇지만 창가학회도 중국과 한국에 우호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안 통과 전에 중국과 한국의 양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겠나?”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올 초에는 본국과 중국의 관계가 나빴지만, 지금은 밀월 관계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워졌네. 얼마 전에는 백악관에서 직접 중국 장쩌민 주석과 전화 통화도 했고······. 본국이 한국에 가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한국 정부에서 일본의 자위대 파병안에 반대하고 나올 가능성은 낮네.”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와 중국과의 관계는 초반에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특히 하이난섬에서 인근에서 일어난 미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외교정책 주요 목표가 중국의 고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와 단테 패트릭이 고이즈미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일본 내 반중 여론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외교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WTO 가입과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사실상 백기를 든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많이 완화되었다.

911 테러 이후에는 중국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밀월 관계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일본 자위대의 파병을 반대하고 나올 가능성은 낮았다.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가였다.

정치, 경제 모든 부분에서 한국 내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몇 년 전 있었던 정권 교체로 지난 정부보다는 현 한국 정부와 사이가 조금 멀다고는 하지만, 정작 김대중 현 대통령은 망명 시절부터 미국의 정치권과 가까웠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자위대 파병을 반대하고 나올 가능성은 중국보다 더 낮았다.

“지금 같은 시기에 중국이나 한국 정부가 반대할 가능성은 없죠. 어제 참의원 본회의에서 자민당 해외 파견에 국제적인 협조의 틀을 경시하고 있다는 지적에, 고이즈미 총리도 한국과 중국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고요. 하지만 양국 정부의 양해를 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올해 들어서 중국과 한국 내 반일 감정은 꽤 높아진 상태입니다.”

“그런가?”

“예. 올해 초에 역사 교과서 문제로 중국과 한국이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8월에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또 한 번 양국 정부에서 일본 대사를 불러서 항의한 적이 있고요.”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인가?”

“고이즈미 총리가 중국과 한국을 직접 방문해서 양해를 구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과거에 대해 사과도 하고요.”

“고이즈미 총리가 하겠나?”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일본 자민당 내 우파로서는 이번 기회가 자위대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마 고이즈미 총리도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알겠네. 이번이 아니더라도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은 본국 정부도 원하는 것이니 의견을 전달하겠네.”

2.

다음 날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 방문과 한국 방문 일정을 발표했다.

한 주 간격으로 중국의 장쩌민 주석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하겠다는 발표였다.

다음 주 월요일인 8일에 중국을 방문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인 15일에 한국을 방문한다는 계획이었다.

총리가 직접 방문해서 중국과 한국 양국 정부의 양해를 구한다는 발표를 하자 공명당은 법안 통과에 협조를 약속했다.

이렇게 잘 진행되던 자위대 파병은 중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자위대 해외 파병에 부정적이었던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이 고이즈미 총리와 논쟁을 벌인 것이다.

지난달 15일 미국의 국무부 부장관인 리처드 아미티지가 주미 일본 대사인 야나이 순지를 불러서 한 지원 요청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당시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일본 대사에게 ‘Show the Flag’라고 했는데 이 발언의 뜻이 무엇이냐는 다소 엉뚱한 논쟁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 발언을 글자 그대로 ‘깃발을 보여라.’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깃발, 즉 일장기를 단 자위대를 파견해 달라는 요구라고 주장하며 파병을 정당화해 왔다.

그런데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이 이런 해석은 잘못됐다면서 일본어 사전으로 ‘입장을 분명히 하다.’라는 뜻이라고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그는 ‘깃발이란 무슨 깃발이냐.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일본도 협력해 달라는 뜻에 가깝다.’라며 고이즈미 총리를 질타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그는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을 서둘러 통과시키려고 하는 것은 걸프전 당시 거액을 부담하고도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라며 주장했다.

미국의 파병 요구에 따라서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을 통해 자위대 파병을 정당화하려던 일본 정부의 정당성이 흔들린 셈이었다.

회의 내용이 알려지고 얼마 후 단테 패트릭에게서 급히 안가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자네 중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생긴 일에 대해 들었나?”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그는 다소 초조한 표정이었다.

말 그대로 다 된 상황에서 일이 틀어지게 생긴 상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Show the Flag.’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자네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Show the Flag.’가 ‘입장이나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뜻인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는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야나이 순지 주미 일본 대사에게 한 발언을 자민당 해외 파병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네. 그리고 내가 본국에 알아보니 군대를 파병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맞는다고 하더군.”

관용어의 뜻으로 봤을 때는 일본 정부의 주장보다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의 주장이 맞지만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은 군대를 파견하라는 뜻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제 생각에는 파병을 직접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입장을 분명히 하고 테러 대응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파병을 요구했다는 해석은 자칫 본국이 일본에 자위대 파병을 강요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일본 내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에 도하에서 아랍연맹의 긴급회의가 있는데 아랍권에

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지금까지 본국이 자위대 해외 파병을 요구했다는 주장이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의 명분이었는데 본국이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

미국이 일본 총리를 거짓말쟁이나 영어를 잘못 이해한 바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안이 제출되기 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이미 법안이 중의원에 제출된 상태입니다. 이미 공명당이 법안 통과에 협조하기로 거의 약속된 상태고요. 더구나 자위대 해외 파병을 위해서 중국과 한국을 방문해서 양해까지 구하기로 결정된 상태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차피 총리나 일본 정부로서는 ‘테러 대책 특별 조치법’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

러시아가 몰락한 지금 세계 2위의 강국인 일본의 총리를 거짓말쟁이나 바보로 만드는 일이었다.

미국이 아니면 그것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알아보니 오늘 하워드 베이커 대사 일정에 일본 기자클럽 초청 강연이 있더군요. 그 자리에서 ‘Show the Flag’가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고이즈미 총리나 일본 정부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는 해야겠죠.”

내가 말했다.

그날 저녁 하워드 베이커 대사는 ‘Show the Flag’가 파병까지 포함한 말은 아니었다는 해명을 했다.

8일 고이즈미 총리는 예정대로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같은 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되었다.

길고 긴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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