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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세상은 서로 다른 것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1.
중국을 다녀온 고이즈미 총리는 9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중국 방문 성과를 보고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국의 장쩌민 주석을 만나 자위대를 파견하더라도 직접 전투 참여는 하지 않겠다고 설명했고, 장쩌민 주석도 자위대 파견에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자위대 파견에 대한 중국의 이해를 얻은 것이다.
요즘 미국과 중국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중국이 자위대 파병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예상한 대로였다.
이날도 지난주 고이즈미 총리를 가장 난처하게 한 일이 반복되었다.
바로 야당인 민주당 오하시 교센 의원이 ‘Show the flag.’에 대한 총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보고받은 것은 아니라면서 신문에서 본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연히 야당은 그렇다면 지금까지 ‘Show the flag.’라는 발언을 자위대 파병의 근거로 주장한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단단히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소란은 있었지만, 법안 통과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안가로 단테 패트릭을 찾아갔다.
“일이 마무리된 것 같으니 그만 일본을 떠날 생각입니다. 미뤘던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법안이 통과되려면 열흘 정도 남았네.”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중국의 양해까지 구한 상황이니 일본 자위대의 파견은 이미 결정된 셈입니다. 다음 주 한국을 방문해서 형식적인 정상회담을 하면 법안을 통과하는 절차만 남은 상태죠.”
“그렇지만······.”
단테 패트릭은 말을 흐렸다.
그는 여전히 나를 계속 일본에 머물게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싶은 듯했다.
단테 패트릭이 좀 더 일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위대 해외 파병이 결정되면 그로서는 큰 성과였다.
어쩌면 고이즈미를 총리로 당선시킨 것에 버금가는 성과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일본에 더 머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저도 계속 일본에 머물고 싶지만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알겠네, 더 잡아 두는 것은 내 욕심이겠지. 이번에 많은 도움이 됐네.”
“아닙니다, 서로 도와야지요. 최근 홍콩에 관한 보고서가 CIA 정책에 반영되는 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 CIA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월드 팩트북(The World Factbook)이 온라인에 공개되었다.
월드 팩트북은 CIA가 정책 자문을 하는 데 참고하는 각국의 정보를 모아 놓은 것이다.
매년 발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올해부터는 온라인에 전문을 공개했다.
그중에서 내 보고서가 반영된 부분은 홍콩을 동남아시아 헤로인 거래와 운송 거점으로 지적한 부분이었다.
알아보니 이건 예정에 없던 내용이었다.
작년 연말 빌 클린턴 정부는 홍콩을 ‘마약 감시 대상국’에서 제외했다.
심지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홍콩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관련 국가들과의 공조를 통해 마약 반입을 효율적으로 막아 왔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기존 미국 정부와의 입장과는 반대로 CIA 월드 팩트북에 동남아시아 마약 중계 거점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홍콩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와의 마약 거래에 관한 내 보고서가 월드 팩트북에 들어간 데는 CIA 동아시아 지부에서 내 보고서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내 앞에 있는 단테 패트릭이었다.
“그게 뭐라고, 자네 팀 보고서면 당연히 반영돼야지.”
단테 패트릭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이런 성과가 외부 팀으로서는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실적 아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물론 내가 받을 예산이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단테 패트릭이 알 리가 없었다.
아니, CIA의 국장이라고 해도 조직의 모든 예산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네 팀이 그런 걱정을 왜 하나? 자네 팀만큼 올해 동아시아 지부에 도움을 준 팀이 없는데······.”
“말씀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수고했네. 자네 팀이 한 일은 내가 잊지 않겠네. 혹시 다음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게.”
“알겠습니다.”
나는 단테 패트릭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도쿄에 가서 별로 한 일도 없는 데 한 주가 정말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다.
가서 한 일이라고는 고이즈미 총리와 일본 정부가 미국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이야기를 미국 대사를 말함으로써 망신을 준 것이 전부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70%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에게 그런 정도의 실수가 타격이 될 리가 없었다. 해프닝에 불과했다.
홍콩으로 돌아온 나는 쉴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 투자를 위해 준비를 했다.
내가 홍콩에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은 리안과 카이 황이 저녁에 집으로 찾아왔다.
“일본에는 잘 갔다 왔어?”
리안이 물었다.
“그럭저럭.”
“일본 분위기는 어때?”
“엉망이지. 경제가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을 정도야.”
내가 대답했다.
“경제가 그렇게 나쁜데 정작 총리 지지율은 높다니, 일본 국민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뉴스를 보니 고이즈미 지지율이 70%가 넘는다면서?”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특이한 나라이기는 하지.”
일본은 국민이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인 나라였다.
특히 이른바 ‘전공투 세대’가 지난 이후에는 아무리 경제가 나빠지고 정치인들이 비리가 폭로되어도 대규모 시위조차 없었다.
고이즈미 직전 총리였던 모리의 지지율은 5%였다.
다른 나라였다면 정부가 이 정도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로 여론이 나쁘다면 대규모 시위가 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별다른 시위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당의 고이즈미가 총리가 되자마자 별다른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지지율이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개혁하겠다는 약속만으로 이런 지지율이 나오는 상황을 다른 나라 사람인 나와 리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본 국민은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을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 말을 믿는 것 같더라.”
“고통이 필요하기는, 헛소리지. 말이 정경 유착 근절이지, 실제로는 일본 경제계와 자민당 주류였던 다나카파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는 작업 아니야?”
“그게 일본 국민에게는 개혁으로 보이나 보지. 어차피 기업들도 바라는 일이야. 이제 예전처럼 정경 유착으로 정치인들에게 얻을 게 없잖아.”
“하긴 뭐 정경 유착도 경제가 성장할 때 하는 것이지, 일본처럼 침체한 나라에서 기업들이 뭘 먹겠다고 정경 유착을 하겠어.”
리안은 오늘따라 냉소적이었다.
2.
“너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정말 파키스탄에 투자할 거야?”
내가 물었다.
리안의 파키스탄 결정도 어느 면에서는 정경 유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공청단이 원하는 일이야. 어떻게 거절해?”
리안과 카이 황이 뜬금없이 파키스탄 투자를 하겠다고 나온 것은 중국 정부의 요청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투자 결정을 미루고 좀 더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했었다.
“나도 책임이 있으니 계속 반대할 수도 없고······.”
내가 W&R의 대표로 카이 황을 내세운 것은 리안의 집안이 가졌던 명성을 이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런 내 계획은 성공해서, 홍콩 부호들을 중심으로 리안이 해외 선물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내 존재가 완전히 가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이런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리안이 카이 황을 내세워서 투자를 받고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중국의 관심을 끈 것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과 상하이방 사이는 여전히 최악이야. 이제 공청단이 정권을 넘겨받기까지는 2년도 채 안 남았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공청단의 요구까지 거절하면 홍콩을 떠나야 해.”
리안이 말했다.
중국 정부 내에서 공청단 파벌이 파키스탄 투자를 강요한 것은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인연이 있는 리안을 이용해서 파키스탄에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목적이었다.
카자흐스탄이 세계정세의 중심이 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파키스탄에 들어갈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리안의 집안은 현재 중국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이였다.
리안의 사업 어느 것도 중국 정부와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파키스탄에 투자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중국과 홍콩 개인이나 가문 중에서 다른 정부의 관심을 피하기에는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당연히 나는 리안이 중국 정부의 요구로 파키스탄에 투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지속하는 동안, 아니 빈 라덴을 잡기 전까지는 CIA를 비롯한 거의 모든 미국의 정보기관의 역량이 집중될 나라야. 그런 곳에 중국 요원들의 잠입을 돕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야. 자칫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어.”
내가 말했다.
그러자 리안 옆에 서 있던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투자는 어쩔 수 없습니다. W&R의 이름으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소유 기업을 통해서 투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입니다. 에드릭 님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잖아요. 휴······ 이미 투자를 결정하셨다면 어쩔 수 없죠.”
홍콩에 집착하는 리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의 말대로라면 리안 집안은 오랜 세월 절강성의 세족이었다.
홍콩에 온 지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고향을 떠나온 상황에서 홍콩에 집착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홍콩인이 홍콩을 떠나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로 떠났었다.
예전에도 리안이 가족이 떠난 홍콩에 홀로 남아서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의 요구에 휘둘리면서도 계속 홍콩에 남으려고 하는 것을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새삼스럽게 나와 리안은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처지가 다르니 행동의 기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3.
“다른 이야기나 하죠.”
무거운 분위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며칠 전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를 보니 CIA에서 홍콩을 동남아 헤로인 중계 센터로 지목했던데 보셨나요?”
나는 마치 나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처럼 이야기했다.
내가 한 것은 단순히 홍콩 마약 거래 정황을 다룬 보고서를 쓴 것만 아니었다.
CIA 월드 팩트북이 온라인에 공개되자 해당 내용을 사우스 모닝 포스트에 익명으로 제보한 사람도 바로 나였다.
“봤습니다.”
“이제 마약 거래 조직이 W&R을 찾아와서 돈을 맡아 달라는 협박을 하지는 못하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기사 덕분에 회사에 찾아오던 놈들이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홍콩 정부와 경찰이 아주 불을 켜고 단속을 하는 상황입니다. 아마 도망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보고서를 쓴 보람이 있었다.
나와 카이 황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감히 우리 가문이 관련된 것을 알고도 건드린 놈들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야.”
리안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찾아오던 조직들이 다 사라졌다면서?”
“아무리 뜨내기들이라서 너무 몰려온 것이 이상해서 알아보니, 뒤에 배후가 있더라고.”
리안이 말했다.
배후가 있다면 상황이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러면 상황이 또 달라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