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154. 누군가가 너에게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1.
종로에 있는 한 바(Bar).
내가 들어갔을 때는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초반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
“엘리아스 강이라고 합니다.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홍콩에서 연수 중입니다.”
내가 한국에 찾아온 것은 한국에서 일을 살펴보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국무부에서 파견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 만난 엘리아스 강은 대사관 직원이기는 했지만, 단테 패트릭과는 달리 CIA 요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문 외교관으로 국무부 내 아시아 전문가였다.
나도 오늘은 에이전트 에스 팀 요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내 본래 신분인 홍콩에 파견 근무를 하는 에드릭 손 신분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시는 분이 저를 왜 찾으신 것인지?”
내가 물었다.
도대체 뜬금없이 한국 대사관 직원이 나를 딱 지목해서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한국계 정보 요원으로 홍콩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저도 한국계라서 의견을 듣는다는 핑계로 한번 만나 보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예.”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혹시나 누가 내 정체를 알아낸 것은 아닌지 조금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었군요.”
“듣자니 국무부 쪽에도 관심이 많으시다면서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내가 예전에 국무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얼마 전 본국에 갔을 때 비벤스라고 우연히 예일을 같이 다녔던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 비벤스······.”
비벤스는 내가 워싱턴 본부에서 일할 때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나보다 나이는 조금 많지만, 꽤 친한 동료였다.
비벤스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엘리아스에게 한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그런데 정보 분석에서 일하는 CIA 요원은 현장 요원과 비교하면 보안 의식이 떨어졌다.
이건 정보 분석 요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임무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정보 분석 요원들은 정보를 최대한 많이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내고 그 논의를 통해 최대한 대비를 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마찬가지였다.
떠벌이에 가까웠다.
매일 옆에 앉아서 서류들을 읽고 또 읽고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중에는 내가 국무부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마도 엘리아스 나름대로는 국무부 쪽으로 가려고 하는 나를 도우려는 선의에서 내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잘 지내고 있던가요?”
내 질문에 엘리아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쪽은 지금 정신없습니다.”
“아······.”
911 테러는 CIA로서는 뼈아픈 실패였다.
최근 기관은 보고했지만 대통령이 무시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을 설득시키지 못한 것 자체가 정보기관으로서는 실패였다.
“파키스탄에 파견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모르겠네요. 지금쯤 파키스탄에 가 있을지도요······.”
저절로 동정심이 생겼다.
존 베비스가 내 귀국을 막아 준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된 셈이었다.
아마 본부로 돌아갔다면 나도 파키스탄에 파견됐을 가능성이 컸다.
“갔다면 고생하겠네요.”
“그렇죠. 지금 거기는 아주 정신이 없다더군요.”
“하긴 그렇겠군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지원하는 것도 벅찬 상황인데······. 아프가니스탄에서 밀려오는 난민 중에 오사마 빈 라덴과 오마르가 포함되어 있다는 첩보까지 있다면서요?”
“CIA 쪽에서는 악명 높은 아프가니스탄의 겨울 동안 산악 지형에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국무부 쪽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수뇌부가 파키스탄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을 아주 크게 보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겨울은 유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에서 겨울에 전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정도였다.
예전 소련도 마찬가지였고 그건 미국과 동맹국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미국의 전략도 겨울이 오기 전에 북부 연맹을 지원해서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사정에 밝은 CIA는 오사마 빈 라덴이 감시가 심한 파키스탄으로 탈출하기보다는 산악 지대에서 이번 겨울을 보낼 것으로 예상하였다.
2.
“어제 뉴스를 보니 파키스탄에서 괴한이 교회에 난입해서 무차별 사격을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이미 확인된 사망자만 16명입니다. 추가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크고요.”
기독교도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격은 파키스탄인들이 이번 전쟁을 지원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고요?”
“그렇죠.”
“휴······ 끔찍하네요.”
이야기만 들어도 파키스탄은 지옥이었다.
“진짜 끔찍한 일은 이제 시작이죠. 곧 있으면 백악관에서 이민 규제 강화를 발표할 겁니다. 테러리스트의 입국을 금지한다는 명분이라더군요.”
“중동과 아시아계가 주요 대상이 되겠군요.”
“맞습니다.”
엘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동안 미국은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 과격파, 즉 네오콘이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 직접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은 중동이나 아시아가 아니라 바로 미국 내, 그중에서도 공직 사회가 될 겁니다. 저나 에드릭 손 씨 같은 아시아계가 공직에서 성공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지겠죠.”
예전이라면 절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가 미국 주류 공직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을 때라면 말이다.
“그렇겠죠. 겉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미국 공화당이 민주당과 비교하면 소수민족에게 배타적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엘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 기회는 유대인과 아프리카계 그리고 히스패닉에게 갔지 아시아계에 올 가능성은 낮죠.”
“당연한 일이죠. 미국의 아시아계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다른 민족에 비해서 정치 참여가 적으니까요.”
“미국 정치는 냉정하죠. 정치에 적극적 참여가 적은 집단에는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죠. 배려하거나 무시한다고 해서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고 관심이 없으니 선거 기부금도 많지 않으니까요. 미국의 정치권으로서는 굳이 아시아계를 배려할 필요가 없죠.”
“역시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제가 에드릭 손 씨를 부른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엘리아스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씀인지?”
도대체 앞으로 정부에서 아시아계가 힘들어지는 것과 나를 부른 것이 무슨 관계라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뭔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에드릭 손 씨가 지금 계시는 홍콩은 중국 때문에라도 점점 중요성이 커지는 곳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도 세계 어떤 곳보다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고요. 공을 세울 기회가 충분한 곳이죠.”
“그렇기는 하죠.”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심 시큰둥했다.
내가 여전히 공직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면 지금은 위기 상황이 맞았다.
그렇지만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퇴직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런 내 반응에 조바심이 났는지 엘리아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반쯤은 연수 중이라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한가하게 생각하실 때가 아닙니다. 파키스탄에서 정보 분석 요원 추가 지원 요청이 온 것은 아십니까? 그 명단에 에드릭 손 씨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존 베비스에게 내 명단을 누락시켰다고 들은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최근 CIA 지원자가 늘고는 있지만, 정보 분석 요원을 하루 이틀 사이에 키워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년 동안 CIA 본부에서 정보 분석 업무를 담당한 요원을 언제까지 홍콩에 그냥 둘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본부에서는 저를 중국 전문가로 키우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여기 동아시아 상황을 잘 모르는 본부에서나 할 수 있는 생각이죠. 혹시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엘리아스의 말에 내 눈이 저절로 크게 확장되었다.
3.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이름은 들어 봤습니다만······.”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동아시아 CIA 지부들과 고위 외교관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요? 그 에이전트 에스 팀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씀인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엘리아스를 떠보았다.
“그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외부 활동을 하는 수이진이라는 자가 화교라고 하더군요. 중국 전문가라면 에드릭 손 씨보다는 그 화교가 낫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러면 나 때문에 내가 파키스탄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의 수이진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엘리아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특별한 배경이 없는 아시아계 어중간한 정보 분석 요원······. 그게 지금 에드릭 손 씨의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기 가장 싫어하는 파키스탄에 끌려가기 딱 좋은 조건이죠.”
“한마디로 만만하다는 말인가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 정도로 지금 파키스탄에 가면 공직에서 성공적인 경력은 끝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끝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 아닙니까? 무슨 파키스탄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유배지도 아니고요.”
“유배지는 차라리 낫죠. 현재로서는 파키스탄은 아무리 잘해도 아프가니스탄의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으로 도망을 왔다고 해도 그를 어떻게 잡을 겁니까? 파키스탄의 무라샤프 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협조하고 있지만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는 믿
는다고 해도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오사마 빈 라덴에 협조하는 자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숨기면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만으로는 못 찾습니다. 힘은 힘대로 들고 공은 하나도 세우기 어려운 곳이 지금의 파키스탄입니다.”
엘리아스가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내가 물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에드릭 손 씨가 계속 동아시아, 정확하게는 홍콩에 계속 머물 명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요.”
“어떻게 말인가요?”
엘리아스는 기껏해야 사무관급 외교관이었다.
그 정도 힘은 없어 보였다.
“백악관이 임기 초반에 외교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곳이 바로 동아시아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골칫덩어리가 바로 북한이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북한을 압박했었죠. 한국 정부의 이른바 ‘햇볕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요.”
“지금도 한국의 햇볕 정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백악관과 국무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하는 동안 북한을 조용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에드릭 손 씨가 그 일을 저와 같이했으면 합니다.”
엘리아스가 말했다.
말이 같이 일을 하자는 것이지 자기가 출세하는 데 나를 써먹겠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내가 거절했을 때 엘리아스라는 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홍콩에서 연수하고 있는 에드릭 손으로서는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