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54화 (155/270)

(154)

#155. 상황이 달라지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1.

나는 엘리어스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일단 시간을 달라는 요구를 하고 돌아와 바로 미국의 존 베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엘리어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내가 파키스탄으로 파견될 수 있는지 우선 물었다.

내 안전에 대한 문제니 다른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날 뭐로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 에드릭 자네가 파키스탄으로 파견될 일은 없어. 자네는 내년 6월까지 홍콩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돌아와서 퇴직할 날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일이야.

존 베비스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그럼 엘리아스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사실이 아니라기보다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지.

“혹시 모르니 주한 미국 대사관의 엘리어스라는 사무관을 조사해 주십시오.”

-자네에게 헛소리했다는 대사관 직원 말이지? 알겠네, 내가 되도록 빨리 알아봐 주지.

나는 존 베비스와의 전화를 끊고 다른 경로로 엘리어스에 대해 알아보았다.

워싱턴에 지낼 때 알던 사람들에게도 연락했고 CIA의 정보망에 들어가 주한 대사관 인사 정보에 들어가 조사해 보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지 단기간에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나이는 외모를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다.

올해 34세로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MIT 화학공학과를 나와 텍사스에 있는 정유 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예일대학 법학대학원을 졸업했고 그 후에 국무부에 들어왔다.

국무부에 들어온 지는 이제 8년 정도.

본래 유럽 쪽을 담당했는데 5년 전부터 갑자기 아시아를 담당하는 동아시아태평양국으로 옮겼다.

한국 대사관에 발령을 받은 것은 올 초였다.

평판을 조사해 보니 국무부 내에서도 인정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2시간 정도 모은 정보는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주 쓸모가 없는 정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정보로는 나에게 접근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존 베비스에게 연락이 온 것은 전화 통화를 하고 4시간 정도 후였다.

-이놈 뭔가 좀 수상한데.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존 베비스가 대뜸 말했다.

“수상하다고요? 뭐가 수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너에게 자신도 한국계라면서 앞으로 공화당 강경파가 득세하면 승진이 어려워질 테니 한국계끼리 힘을 합치자고 이야기했다고?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대충 그렇죠. 그런데요?”

-내가 알아보니 한국계인 것은 사실이지만 입양아야. 문제는 양부모 집안이 골수 공화당 후원자더군.

입양아라는 사실을 속인 것부터가 꺼림칙했다.

같은 한국계라도 이민 2세나 3세인 것과 입양아인 것은 아주 달랐다.

“그래요?”

-응. 알고 보니 양아버지가 후보 시절에 부시 대통령이 50만 달러에 가까운 정치헌금을 했다고 하더군.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불이익은 고사하고 이제 국무부에서 탄탄대로라고 봐야지.

존 베비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서야 CIA 본부에서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를 서울로 보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국무부에서 나를 특정해서 파견 요청을 하고 그 지시를 CIA가 받아들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공식적으로 현장 요원이 아니라고 해도 갑자기 서울로 가서 대사관 직원을 만나라니?

CIA가 국무부의 요청을 거부할 상황이 아니라지만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만약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 후원자 중 하나라면 국무부나 CIA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2.

“저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군요.”

-더 수상한 것은 부서를 이동했다는 부분이야. 알아보니 본인이 직접 요청을 했다는데 기존 부서에서 꽤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내 장담하는데 이놈 이거 뭐 있어.

“뭘까요?”

-굳이 한국 대사관까지 간 것을 보면 국무부에서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반도 전문가로 활동하려는 것 같아.

존 베비스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도움이 될까요? 차라리 중국이나 일본 전문가가 낫지 않겠습니까?”

-엘리어스가 중국계나 일본계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한국 입양아 출신이잖아. 한국계라는 사실이 가장 큰 장점인데 그걸 버릴 리가 없지. 더구나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는 어차피 국 수준이 아니라 더 위에서 다뤄지거든. 무엇보다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미국 국무부에서 한국은 꽤 중요한 나라야.

북한이 동아시아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들인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북한은 60년대 70년대에는 제3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 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테러 지원국 중 하나로 특별 관리되고 있었다.

“제게 접근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도 생각해 봤는데······. 선거에 나가려고 하는 것 아닐까?”

“선거요?”

-그래, 선거. 내가 생각해 봤는데······. 국무부와 한국에서 경력을 쌓고 난 이후에 언젠가는 하원 의원에 출마할 생각을 하는 것 아닐까?

“선거에 출마하려고 저에게 접근한다고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가능성이 있어 보여.

“저에게 접근하는 것이 선거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요?”

-자네는 자네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시아 이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이 뭔지 알고 있나?

“하버드죠.”

하버드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최고의 대학이었다.

하지만 아시아 이민자들에게 자식을 하버드에 보내는 것은 말 그대로 최종 목표나 다름없었다.

-맞아, 아시아 이민자들은 상대가 하버드 출신이라면 말 그대로 눈빛부터 달라지지. 그런데 자네는 하버드 출신에다가 로즈 장학생이고 심지어 풋볼 스타이기도 하잖아. 말 그대로 자네는 아시아 유권자들의 마음을 여는 치트 키나 다름없어.

“저는 선거에 나갈 생각은 없는데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자네가 선거에 나가면 오히려 필요가 없지. 하지만 자네가 선거를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되지.

“그게 무슨······.”

-아니라고 생각하나? 나도 선거에 나가면 자네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진심이십니까?”

-아시아 이민자들의 표를 받는다고 당선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선거구에 따라서는 아시아계의 투표가 당락을 결정짓는 곳도 있어. 내가 머무는 지역도 아시아계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 선거구야. 빠르게 아시아계 인구가 늘고 있고 말이야.

존 베비스의 말에 나는 순간 오싹했다.

전화로 전해져 오는 존 베비스의 말투는 꽤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제가 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겠군요.”

부탁이란 당연히 내년 여름쯤에 내가 CIA에서 퇴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CIA에 재직한 상태에서는 존 베비스의 선거를 도울 수가 없었다.

위장 임무 중에도 불가능했다.

원칙적으로 CIA 내는 미국 본토에서 작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물며 아무리 위장 임무 중이라고 해도 특정 정당 후보의 선거를 돕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연하지. 내가 자네 부탁을 들어주려는 이유 중에는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네.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당연히 퇴직한다고 해도 존 베비스의 선거를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약속했으니 내 퇴직을 도와주면 선거를 돕기 위해 기부를 하거나 선거 자금을 지원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선거 유세라니······.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통화를 하고 있지만 존 베비스와 내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CIA를 나오기 위해서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는 것뿐이었다.

그와의 친분이라고 해 봐야 CIA 셔먼켄트 정보학교에서 강사와 제자로 지낸 몇 달과 에디 미첼의 일을 도우면서 연락한 것이 전부였다.

-당연하지. 어쨌든 수상하니 조심하게. 그리고 나중은 모르지만 이번에 자네와 북한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은 진심일 거야. 요즘 국무부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전념하기 위해서 북한을 조용히 시키기를 원하고 있거든. 특히 파키스탄을 통해서 북한이 탈레반과 교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하더군.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긴 통화였지만 쓸 만한 이야기는 초반부와 마지막 말이 전부였다.

엘리어스의 양부가 공화당 지지자이자 부시 대선에 기부한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은 그가 내게 접근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엘리어스가 나에게 북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실이라는 마지막 말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중간에 엘리어스가 선거에 나가려고 접근했다는 부분은 별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존 베비스 본인이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 준비를 하다 보니 모든 일이 선거와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존 베비스와는 달리 엘리어스는 선거에 출마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겨우 대사관 사무관이 무슨 선거 출마를 한다는 말인가?

그럼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선거 출마를 위해서 벌써 자신과 연락했다는 것은 비약이었다.

어쨌든 북한 문제를 의논하자는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사실이라니 그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상황이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3.

엘리어스는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연락을 빨리 주셨네요.”

엘리어스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부에서 지시를 받은 일이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서울로 가서 엘리어스를 만나라는 것은 국무부를 통해 CIA 본부에서 내려온 지시였다.

CIA 지시는 단순히 만나라는 지시였지만 행간을 읽어 보면 엘리어스의 일을 도우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서로 돕자는 의미니까요.”

“제가 듣기로는 엘리어스 씨는 굳이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실 것 같던데요.”

나는 내가 엘리어스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엘리어스도 이미 내가 자신에 대해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에 전화해서 저에 대해 알아보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입양아라도 한국계라는 것은 사실이죠. 한국계가 국무부에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뻔하고요. 기껏해야 동아시아 차관보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엘리어스는 동아시아 차관보가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차관보는 정식 명칭은 동아시아태평양국의 국장이었다.

무려 1급이었다.

미국 국무부에서 장관, 부장관, 차관 그리고 부차관 다음의 여섯 번째 자리였다.

장관이나 부장관에 정치인이 임명되고 외교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은 차관이었다.

차관보는 바로 밑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동아시아태평양국은 직원만 1천 명이 훨씬 넘는 거대 조직이었다.

엘리어스는 바로 그런 직위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야망이 크시네요.”

엘리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젊은데 야망은 크게 가져야죠.”

나는 엘리어스의 미소를 보며 그가 존 베비스의 말대로 정말 언젠가 선거에 나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알기로는 에드릭 씨도 지금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글쎄요, 저는 먼 미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기도 급급한 사람입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엘리어스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더 묻지 말라는 의사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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