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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1.
엘리어스와 대화를 이어 가는 중에도 리안과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제 엔론 주가가 확인했어?
리안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하루 사이에 18%나 폭락했다면서?”
-맞아. 파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대로라면 그야말로 대성공이야.
엔론 주가는 LJM이라는 수상한 투자회사와의 거래가 알려지면서 폭락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18%나 폭락한 데는 대규모 공매도가 쏟아졌기 때문이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우리가 한 공매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잘됐네. 일단 카이 황 대표에게 이야기해서 계속 공매도를 유지하자.”
-조민은 조금 공매도 분량을 늘리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네 생각은 어때? 파산할 정도로 부실이 크다면 더 밀어붙여도 될 것 같은데?
어제 폭락으로 아무래도 리안이 욕심이 생긴 듯했다.
조민이 말했던 파산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엔론이 파산한다면 엔론의 주식은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쏟아 낸 공매도는 그대로 이익이었다.
“글쎄, 그건 좀 위험할 것 같아.”
-그래? 아직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터져 나올 악재가 많다고 하던데?
저런 정보를 리안에게 전해 준 사람은 아마도 조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차라리 정보의 출처가 조민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 과감하게 공매도 분량을 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공매도 분량을 늘이는 것은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지난주의 공매도 중에서 우리가 쏟아 낸 공매도가 가장 크다는 것 알고 있어?”
-그래?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그렇다고 하더라고. 여기서 더 공매도 분량을 늘리는 것은 미국 금융 당국의 관심을 끌 수도 있어. 만에 하나라도 조사가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아,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리안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사가 들어와서 조민이 우리의 공매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911 테러로 한창 미국의 정보기관과 금융 당국이 독이 올라 있는 때였다.
테러 자금을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말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국제적인 자금 추적이 이뤄지고 있었다.
자회사를 통해서 공매도해서 류오린 그리고 조민과의 흔적을 감추기는 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엔론 공매도로 가장 많은 돈을 벌어 가면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지만, 그 액수가 일정 수준이 넘으면 완벽히 자금 흐름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에는 W&R의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민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조사가 길어지면 내 이름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건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추가 공매도를 하자고 하는 것을 보니 리안이나 조민은 엔론이 파산할 때까지 밀어붙일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전에 적당한 시점에서 공매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2.
엘리어스와 협상은 서로 숨기는 것이 있다 보니 지지부진했다.
여전히 나는 엘리어스가 나와 손을 잡으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반면 나는 엘리어스에게 감춰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도 아주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로서도 백악관과도 끈이 있는 엘리어스와 일을 같이하는 것이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만 역시 북한을 움직이는 키워드는 식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어스의 제안을 듣고 꽤 오래 생각한 내 결론은 식량이었다.
“북한은 이른바 1994년 대홍수로 시작되어 1999년까지 지속된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 부족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작년에 북한 정부가 고난의 행군 시기가 끝났다고 공식으로 발표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죠.”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시기 이후로 북한이 사실상 한국을 선제공격할 힘을 잃었다고 판단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죠. 하지만 올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작년보다 30~40% 정도 늘어났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죠. 여전히 올해도 아사자가 몇만 명씩 나오고 있으니까요.”
내 이야기에 엘리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식량이 여전히 부족하기는 하겠죠. 그런데 그걸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식량 지원을 명분으로 북한을 길을 들여야죠.”
내 말에 엘리어스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식량은 어디서 구하고요?”
“뭐 한국 일본 같은 나라를 동원해서 1차적으로 지원하고 모자라는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구해 봐야죠.”
“지금 한국 정부가 식량 지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지난주 한국의 식량 40만 톤 지원 제안에 이산가족 상봉 거부로 대응한 것이 북한입니다. 그래서 식량 지원이 무산됐고요. 덕분에 한국 내 여론도 나빠져서 며칠 전 재보선에서 집권당이 참패하지 않았습니까?”
한국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이른바 ‘햇볕 정책’으로 북한과 유화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특히 한국 최대 그룹을 통해서 금강산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거액을 북한에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로를 통한 금강산 관광은 상징성과 비교하면 경제성이 좋지 못해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북한 투자에 적극적이었던 그룹의 창업자가 올해 초 사망하면서 투자 동력 자체가 떨어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햇볕 정책이 더는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번 달 중순 한국 정부가 40만 톤이나 되는 식량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자마자 북한 정부는 일방적으로 추진하던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한 한국과의 협상을 전면 중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 진영에서는 햇볕 정책에 비판적이던 상황에서 북한의 일방적인 대화 중단을 비판했고 그런 비판은 며칠 전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의 참패로 이어졌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한국 정부가 다시 식량 지원을 재개하는 것은 어렵겠죠. 하지만 특별한 계기가 생긴다면요?”
“어떻게 말입니까?”
엘리어스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국민이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어 가고 식량을 해외에서 사 올 외화도 부족한 북한에서 뭘 믿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지했겠습니까?”
“그야······ 혹시 국제적인 지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북한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 아닙니까?”
세계적인 기아 지원 기관은 유엔 세계식량계획(UN WFP, United Nations Food PROGRAMME)이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은 1년에 1억 명에 가까운 사람에게 400만 톤에 가까운 식량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지원은 당연히 국제적인 지원을 받아서 행해진다.
이외에도 국가적인 차원의 인도적인 지원도 있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이런 국제적인 지원의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식량 생산이 늘어난다고 해도 세계의 모든 굶어 죽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3.
“북한 정부는 한국 정부가 지금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는 지원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한국과 북한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런데 이 쌀이 지금 한국에는 남아돌죠. 특히 올해는 수확량이 많아서 이대로 가면 쌀 농가 대부분이 파산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죠. 그런데 이 정부의 지지 기반이 호남이고 호남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농업지대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올 것이라고 북한이 생각한다는 말이군요?”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북한이 믿는 국제적인 지원을 끊어야겠네요?”
“그렇죠. 당장 최근에 유엔 세계식량계획에서 일본에 20만 톤의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더군요. 일본도 곡물 가격 안정을 위해서 그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정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국무부를 움직이죠.”
“미국 국무부의 요청을 일본 정부가 거부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을 바꾸는 일은 일본 정부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요?”
내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이미 일본 정부는 유엔 세계식량계획에 사실상 지원을 확답한 상태였다.
여기에 일본 정부가 북한의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유엔 세계식량계획의 요구도 요구지만 일본 내 곡물 가격 안정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일방적인 취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은 좋겠죠. 일본 언론에 대대적으로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문제를 부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다음으로는 북한에 다른 국제적 지원도 앞으로는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야죠.”
“어떻게 말입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지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식량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한두 해 정도는 식량 지원이 아프가니스탄에 집중될 거고요. 미국이 식량 지원을 아프가니스탄에 집중하면 전쟁에 참여하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네요. 현재 미국과 영국 그리고 호주가 참전했고 다음 주면 독일과 프랑스도 지상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낼 예정이니까요.”
국제적인 식량 지원은 특별한 일이 있다고 갑자기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정된 지원을 식량이 부족한 국가들이 나눠 가지는 구조였다.
최근 몇 년간 북한은 유엔 세계식량계획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지원받은 국가 중 하나였다.
만약 유엔 세계식량계획의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대에 굶어 죽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지금 미국은 탈레반 정부와 국민을 분리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식량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원 규모는 한동안 유지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로 식량이 지원되면 결국 다른 나라에 가는 지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여기에 일본을 더하면 국제적으로 가장 인도적인 지원을 많이 하는 국가들이었다.
호주는 세계적인 식량 수출국 중 하나였다.
“북한에 앞으로는 북한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이야 많죠. 우선 예전 유엔 세계식량기구와 한국 정부를 통해서 북한에 지원됐던 식량이 군사용으로 전용됐다는 사실을 공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에 지원되는 식량이 군사용으로 전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권은 식량 부족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고 그런 위기 상황에서 집권층이 믿을 수 있는 것은 군대뿐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아무리 식량이 모자라더라도 지원받는 일정량의 식량은 비축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식량 비축 기지를 보호하는 것은 바로 북한의 군대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식량 지원에 대한 국제적인 규모를 줄일 수 있는 명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다른 것은요?”
“북한이 가장 믿고 있는 유엔 세계식량계획 관리의 입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지원 규모가 앞으로는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경고를 보내야죠. 한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국제적인 식량 지원을 진짜로 줄일 수 있다고요.”
“괜찮네요. 그 정도면 북한을 압박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아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태도를 바꿔서 한국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한국 대통령과 여당이 바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며칠 전 북한에 대한 지원 문제로 재보선에서 패했는데요?”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은 외환 위기를 끝냈다는 것과 북한과의 대화를 끌어냈다는 것을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북한과의 대화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죠. 적어도 자신의 임기 중에 북한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내년에 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농촌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쌀값 안정이 필요하고, 그러
자면 어딘가에 쌀을 넘겨야죠. 한국 쌀을 수입할 나라는 없으니 남은 것은 북한에 쌀을 보내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