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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말은 가볍지만, 그 책임은 무겁다
1.
홍콩에 돌아온 지 며칠 후 나는 자카르타에 와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세계은행에 30억 달러에서 35억 달러의 추가 차관을 요청했다고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네.”
“메가와티 대통령이 미국 지지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군요.”
“그런 거겠지.”
메가와티 대통령이 거액의 추가 차관을 요구한 것은 물론 미국 정부가 아니라 세계은행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에 추가 차관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은행은 철저히 미국 정부에 뜻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계은행은 명목상으로는 빈곤의 구제라는 목표를 가진 유엔 산하의 국제 금융기관이다.
쉽게 말하면 선진국에 돈을 빌려서 저개발국에 장기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가들의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고, 그 이후 철저하게 미국의 의도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추가 차관을 제공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세계은행의 행장이 아니라 미국의 정부였다.
세계은행이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중미와 남미에 집중적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의 국익이 가장 크게 걸려 있는 곳이었다.
미국의 유럽이나 아시아의 전략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아메리카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메가와티 대통령도 세계은행의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미국까지 와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가장 먼저 가장 열렬히 지지한 이유였다.
침체한 인도네시아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한 이유였고, 이제 메가와티 대통령은 그런 지지의 대가를 미국에 요구하고 있는 셈이었다.
“섣부른 지지 선언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문제만 만들더니 이제 그 대가를 달라니······ 이건 무슨 생떼도 아니고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지지 선언은 미국에서 요구한 것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으로서는 최대한 이슬람권을 자극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번 전쟁을 테러 세력과의 전쟁으로 한정하고 싶어 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조심한 것이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조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랜 세월 중동의 맹주이자 미국의 동맹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번 테러를 저지른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의 고향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알 카에다나 탈레반이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즉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념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외에도 이슬람권을 달래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최고 혈맹인 영국의 블레어 총리를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으로 보내 아랍권을 달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중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메가와티 대통령이 섣부른 지지 선언으로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 정국을 들썩여서 문제를 만든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까지 요구하니 미국 정부로서는 별로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30억 달러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인도네시아 경제가 안정되어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미 시위도 잠잠해질 테니까요.”
“그게 미치는 거지. 메가와티 대통령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말이야.”
“현재 반미 시위를 벌이는 자들은 대부분 지난 경제 위기로 타격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제 위기에 대해 물러난 수하르토 전 대통령만큼이나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인도네시아의 경제 회복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국가를 안정시키고 국론 분열을 통일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경제 발전이기는 하지. 당장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것도 아시아 외환 위기로 경제가 붕괴한 것이 원인이니 말이야.”
경제가 곧 정치 안정이라는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바로 인근의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누가 봐도 독재국가였다.
언론의 자유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형벌도 엄격했다.
국민 인구 대비 사형 집행수도 세계 최상위권이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국민의 불만은 낮았다.
오죽하면 중국의 공산당이 자신들의 미래 국가 모델로 싱가포르 정부를 연구하고 있을 정도였다.
최근 경제난에도 싱가포르 정부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물론 싱가포르 선거 제도상 여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숫자상으로 압승을 거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싱가포르 선거 제도는 애초에 싱가포르 여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문제는 득표율이었는데, 90년대 중반 50%대까지 떨어졌던 싱가포르 여당의 득표율은 얼마 전 선거에서는 상승했다.
주변국의 정치적 혼란과 비교할 때 싱가포르가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2.
다음 날 이반 부카드를 다시 만났다.
“어제 나온 결론을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네. 이제 다음 문제는 국무부로 넘어간 셈이지.”
“그럼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건가요?”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인도네시아에 차관을 제공하는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부를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미국 정부가 세계은행을 통해서 저개발국에 지원하는 차관은 철저히 정치적인 판단을 통해서 결정되었다.
현지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대사관 그리고 CIA 같은 정보가 중요한 판단 근거였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참고 자료일 뿐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곳은 국무부 혹은 백악관이었다.
이반 부카드도 어차피 인도네시아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겪어 본 이반 부카드는 그런 정도의 능력은 있는 요원이었다.
나를 자카르타로 부를 일이 없었다.
특히 이반 부카드가 요청했다는 지시를 받았을 때는 뭔가 인도네시아에서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난번 우리가 주고받은 말대로라면 이반 부카드는 파키스탄이나 중동으로 갔어야 했다.
한창 중동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는 시점에 중동 사정에 밝은 이반 부카드가 인도네시아에 여전히 남아 있을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인도네시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문제는 본부에 정식 계통으로는 보고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을 받아서 자카르타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이반 부카드가 겨우 이런 일로 나를 자카르타까지 부를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문제 말인데······.”
이반 부카드의 입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름이 나왔다.
“그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습니까?”
토미 수하르토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나도 그 책임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토미 수하르토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토미 수하르토는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아들로 여러 건의 살인과 일련의 폭탄 테러의 배후로 의심되는······.
아니, 그런 일을 벌인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이반 부카드에게 대법원 판사들을 움직여서 그에 대한 혐의를 기각하도록 했다.
목적은 메가와티 대통령 그리고 정치권의 이슬람 정당 지도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 정치권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를 없게 하기 위한 것이 토미 수하르토를 풀어 준 이유였다.
토미 수하르토가 문제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그를 풀어 준 목적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만약 토미 수하르토가 만든 문제가 그런 종류의 일이라면 이반 부카드가 나를 자카르타까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이리안 자야(Irian Jaya)의 독립파를 이끄는 데시스 엘레이라는 인물이 이틀 전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네.”
이리안 자야라는 지명은 물론이고 데시스 엘레이라는 인물도 생소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리고서야 이리안 자야가 어디인지 겨우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리안 자야라면 서 파푸아 말입니까?”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데시스 엘레이는 파푸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야.”
“인도네시아 정부가 관여된 일입니까?”
“정화하게는 인도네시아 특수전사령부(코파수스, Kopassus)가 벌인 짓이네. 특수전사령부 이리안 자야 행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납치당하고 바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네.”
“파티에 초대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살해했다고요?”
“맞아. 참석자들에 의하면 좀 어처구니없지만······. 참석한 파티에서 돌아가는 희생자에게 특수전사령부의 부대장이 확성기까지 이용해서 ‘Goodbye to the Great Leader of the Papuans. Have a safe journey home!’이란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
“하······.”
부대장의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작별 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장례식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장례식에서나 쓰는 말을 사용하고 바로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누가 봐도 정황이 분명했다.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거군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그게 토미 수하르토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물었다.
특수전사령부라면 예전부터 반정부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한 것으로 유명한 부대였다.
특히 동티모르와의 분쟁에서 학살을 벌인 일로 악명을 떨쳤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토미 수하르토는 지금 아무런 정부 직책도 없는 민간인 아닙니까?”
정규부대가 벌인 일에 인도네시아 정부도 아니고 토미 수하르토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이리안 자야에서 2년 전까지 인도네시아인과 파푸아인들이 가장 많이 부딪치는 것이 바로 농장을 둘러싼 분쟁이네.”
“그런데요?”
“그 분쟁의 선봉에 섰던 단체가 바로 친수하르토 청년 조직이었네. 그 청년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토미 수하르토였고······. 반대로 파푸아인들의 청년 자경대를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데시스 엘레이의 아들이었지.”
이반 부카드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하르토 집안과 엘레이 집안은 이리안 자야에서 이권을 가지고 다툰 전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이번 일도 인도네시아 정부와 토미 수하르토가 관계됐다는 말입니까?”
“관계된 정도가 아니야. 지방의 반정부 지도자를 암살한 정도라면 내가 자네를 자카르타까지 불러서 의논하지 않았겠지.”
“뭐가 더 있는 겁니까?”
“토미 수하르토 그자는 완전히 미쳤어. 살해야 그렇다고 해도······. 그 후가 문제야.”
“그 후라면?”
“데시스 엘레이 시체를 발견한 현지 경찰이 부검한다는 이유로 그의 심장을 자카르타에 보냈네. 그런데 말이야, 자카르타에서는 그런 요구를 한 적도 없고 데시스 엘레이의 심장을 받은 사람도 없어.”
“예?”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반 부카드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누군가 가로챈 거지.”
“그게 토미 수하르토라는 말입니까?”
“우리도 정확히 파악은 하지 못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파악하고 있네. 심장을 가지고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미 수하르토 그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
“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저야말로 미치겠네요.”
내가 사람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약간(?) 과격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미친놈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가장 큰 혐의를 우리가 대법원에서 기각하도록 했지만, 그에게는 혐의가 많이 남아 있었다.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까지 가능한 범죄들이었다.
그런 혐의를 받는 상황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한다는 것은 내 상상이었다.
무엇보다 도대체 남의 심장을 뭐 하려고 가져간다는 말인가?
“그냥 미치기만 한 놈이라면 문제가 아니지. 그런 미친놈이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더 큰 문제 아닌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라면 이번 암살은 토미 수하르토가 이리안 자야에 파견된 특수전사령부 부대를 움직여 벌인 일이었다.
특수전사령부는 인도네시아 최정예이자 핵심 부대였다.
“그렇죠. 그런 미친놈이 특수전사령부를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죠.”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토미 수하르토를 자유의 몸으로 만든 것이 바로 그런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영향력으로 이런 짓을 계속 벌인다면 감당을 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더 있네. 현재 인도네시아 육군 참모총장인 에드리안토 수타르토는 수하르토 대통령 시절 대통령 친위대장 출신이야. 토미 수하르토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지. 물론 비교적 중립이라고 알려졌지만, 모르지. 지금처럼 토미 수하르토가 미쳐 날뛴다면 어떻게 될지······.”
“다시 잡아넣어야 하겠군요.”
내가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이반 부카드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토미 수하르토를 지금 이대로 풀어놓은 것은 너무 위험했다.
지금으로 봐서는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이반 부카드가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토미 수하르토를 다시 잡아들이는 일 때문이었다.
“토미 수하르토에 대한 일은 사과드립니다.”
나는 굳은 얼굴로 이반 부카드에게 사과했다.
“아니네. 나도 찬성한 일이고, 자네도 그런 놈인 줄 알고 풀어 줬겠나.”
토미 수하르토의 일을 보며 다시 한번 권력자들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권력자들에게는 일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CIA에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의 무게가 다시 한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