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61화 (162/270)

(161)

#162.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

1.

토미 수하르토를 처리해야 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십 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몰락한 지 겨우 몇 년이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쫓겨난 이후에도 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조사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암살에서 보듯이 토미 수하르토는 여전히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재계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상위 10대 부호 중에서 수하르토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토끼몰이를 시작하세.”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토미 수하르토는 토끼치고는 흉악한 토끼지만 CIA가 노린 이상 운명은 결정된 셈이었다.

“방법은 생각해 보았나?”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일단 인도네시아 정부가 압박해야죠.”

내가 바로 대답했다.

“어떻게 말인가?”

“우선 이리안 자야에 데시스 엘레이에 대한 대규모 추모 분위기를 일깨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침 장례식이 끝난 이후 엘레이 집안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축구장에 무덤을 만들겠다더군요. 죽음과 그 모습을 대대적으로 외신을 통해서 보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장이 없는 상태로 장례식을 진행한다고 하던가?”

데시스 엘레이의 사체는 여전히 심장이 없는 상태였다.

심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CIA도 찾지 못했다.

토미 수하르토에게 들어간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걸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시체를 가만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례식을 진행해야죠.”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는 계속 계획을 설명했다.

“데시스 엘레이에 대한 외신 보도를 통해서 국제사회에서 그의 죽음을 이슈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인도네시아 정부, 특히 메가와티 대통령은 굉장한 압박을 받게 될 겁니다. 데시스 엘레이를 인도네시아 특수부대가 암살한 정황까지 보도된다면 더 그렇겠죠. 수하르토 정부의 동티모르 학살이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상태에서 정부가

바뀌었는데도 변화가 없다는 증거니까요.”

동티모르 학살을 주도한 부대가 바로 이번에 일을 벌인 특수부대인 코파수스였다.

동티모르 학살에 대한 국제사회 비난 때문에 미국은 오랜 세월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합동훈련까지 중지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 부대가 여전히 같은 일을 벌인 셈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수하르토 독재 정부를 무너트린 민주투사로 내세우는 메가와티 대통령으로서는 엄청난 외교적 타격이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어떤 반응일지 짐작이 가는군.”

“예. 더구나 세계은행에 거액의 추가 차관까지 신청한 상황이 아닙니까. 국제사회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죠.”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마도 나름대로는 진상 규명을 한다면서 조사를 하겠지. 성과가 나올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렇죠.”

인도네시아 특수전사령부, 즉 코파수스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동티모르의 학살부터 수하르토 대통령 아래에서 수많은 납치와 암살을 벌인 조직이 바로 코파수스였다.

메가와티 대통령으로서도 아예 수하르토 전 대통령과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조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회에서 30%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 정당과의 사이가 벌어진 메가와티로서는 수하르토 시절 여당인 골카당의 협력이 꼭 필요했다.

지금 골카당에는 지난 정부에서 비슷한 일에 연루된 사람들이 여전히 실권자였다.

그 시절 일을 들춰 봐야 인도네시아 정치 상황만 불안해질 뿐이었다.

이슬람 정당과 골카당이 등을 돌려 둘이 손을 잡으면 메가와티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도 가능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CIA가 토미 수하르토를 풀어 준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실수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코파수스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만든 조직도 아니었다.

코파수스를 만든 것은 바로 메가와티 대통령의 아버지인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었고, 수하르토 대통령 또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코파수스를 이용해서 정적을 납치, 암살했다.

더구나 이번에 암살당한 데시스 엘레이는 단순히 야당 인사가 아니었다.

파푸아 독립을 주장하던 반정부 지도자였다.

데시스 엘레이의 암살을 파헤치다 보면 인도네시아 분리 독립을 촉발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군부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지한 일로 반미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골카당이 돌아서고 군부가 돌아서면 남은 결과는 파국이었다.

메가와티 대통령도 와히드 전 대통령처럼 쫓겨나서 미국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다음 단계는? 자네나 나도 알다시피 어차피 조사해도 제대로 된 조사도 결론이 나올 가능성도 없고, 더군다나 토미 수하르토의 연관성이 나올 가능성은 더더욱 없는데······. 이걸로 토미 수하르토를 어떻게 감옥에 보내자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그날 다른 희생자가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다른 희생자라면? 데시스 엘레이의 운전기사 말인가? ‘아리’라고 했던가?”

데시스 엘레이는 파푸아인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반정부 지도자이기 이전에 이리안 자야에 있는 파푸아 부족의 지도자였다.

당연히 그에게는 수행원이 있고 운전사도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날도 데시스 엘레이는 아리라고 불리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참석했다가 살해를 당했다.

그리고 데시스 엘레이의 시체는 발견되었지만, 아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예. 그 아리 말입니다.”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라는 그자가 어떻게 됐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

“모르죠. 하지만 아마도 살해당했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데시스 엘레이 살인범도 처벌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운전기사의 살인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사람의 목숨을 똑같은 것은 오직 법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죠. 하지만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살해당했다고 해도 데시스 엘레이와는 다르게 아리라는 기사의 행적을 굳이 감추지 않았을 겁니다. 한마디로 추격하려면 추격할 수 있다는 말이죠.”

“찾아보겠네.”

아리의 행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은 바로 인도네시아 경찰이었다.

CIA가 한 일은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아리가 데시스 엘레이가 살해당한 당일 이리안 자야 자아푸라에 있는 코파수스 본부로 들어간 것을 본 목격자가 있었다.

코파수스는 아리가 본부가 들어온 사실을 부인했다.

“아리라는 자가 어떤 식으로든 데시스 엘레이의 죽음에 관여가 됐나 보네요.”

“팔아넘겼나 보지. 데시스 엘레이가 이리안 자야 독립운동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 더구나 대대로 족장으로 지도자로 살아온 사람이니 말이야.”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가 나중에 독재자가 된 사람은 많았다.

아니, 아프리카의 독립운동 지도자 중 상당수는 독재자보다 더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리는 죽었겠죠?”

“그렇겠지. 살려 둘 필요가 없잖아. 살아 있었더라도 지금은 죽었겠지. 목격자에 대한 경찰 기록은 우리보다 그쪽에서 먼저 입수했을 테니 말이야.”

아리가 데시스 알레이를 팔아넘긴 것인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본부로 끌려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망한 것 거의 확실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좀 생각해 보고요.”

나는 곰곰이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문득 아리의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리안 자야에 있는 수하르토 가문의 기업 명단이 어디 있죠?”

“저기 있네.”

이반 부카드가 책상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반 부카드가 가리킨 서류에 있는 명단을 빠르게 검토했다.

“여기 있네요.”

거기서 나는 명단 하나를 발견했다.

“수하르토 가문 소유의 제재소가 바로 특수전사령부 본부 옆에 있네요. 여기 대형 목제 파쇄기가 있지 않나요? 폐목재를 태우는 소각장도 있고요.”

“그게 있었지. 내가 알기에도 예전부터 거기에 시체를 처리하기도 했었어.”

“이제 우리는 목격자를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이반 부카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격자?”

“예. 이미 아리가 특수전사령부 본부를 들어갔다는 진술은 확보된 상태입니다. 여기에 아리가 여기 제재소 방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따로 토미 수하르토가 사건 즈음에 이리안 자야에 방문했다는 다른 목격자가 나타나면요? 인도네시아 정부가 어떻게 나올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사건을 축소해서 덮으려고 하겠지. 지금 상황에서 이리안 자야의 정신적 지도자를 토미 수하르토가 암살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 치명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건을 덮는 것은 덮겠지만 한편으로는 토미 수하르토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처럼요.”

“그럴듯하군.”

계획을 짠 이반 부카드와 나는 그 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반 부카드가 가짜 목격자와 가짜 증거를 만드는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외국 언론사에 데시스 엘레이의 죽음을 알렸다.

여기에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가 가장 곤란해할 일도 시작했다.

이리안 자야만이 아니라 섬 반대편 파푸아뉴기니까지 파푸아섬 주민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는 기독교였다.

나는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가 세계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진 국가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최근 과격해지는 반미 시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어느 때보다 종교 갈등이 심해진 상황이었다.

데시스 엘레이의 죽음을 단지 독립운동 혹은 이권 다툼에서 발생한 암살이 아니라 무슬림의 기독교도에 대한 보복으로 몰고 갈 수만 있다면······.

아니 그럴 조짐이라도 보이기만 한다면 인도네시아 정부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가짜 증인과 증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 시도는 곧 이반 부카드의 반대에 부딪혔다.

“자네 뭐 하는 짓인가?”

“인도네시아 정부를 압박하려면 역시 종교 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이······.”

이반 부카드가 손을 들어서 내 말을 막았다.

“뭐든지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네. 그렇지 않아도 종교 갈등으로 정신없는 나라에 기독교까지 끼워 넣어서 종교 갈등을 일으키겠다니? 더구나 뭐 바티칸? 이스라엘?”

“인도네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을 나라가 그런 나라들뿐이라서······.”

인도네시아는 2억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었다.

경제력이 낮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적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바티칸이나 이스라엘 같은 무슬림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국가들이었다.

“그만하게,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토미 수하르토 하나 잡자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면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나는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작전에서 배제되었고 토미 수하르토는 2주가 지나기도 전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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