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63화 (164/270)

(163)

#164. 물건을 사는 사람은 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

필리핀에 가기 전에 나는 팀원들을 불러들였다.

투자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한자리에서 뵙는 것은 오랜만인 것 같네요.”

예전에는 한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사무실을 옮긴 이후에는 이렇게 회의 때나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각자 따로 맡은 일이 있었고 각자 W&R 직원들을 거느리고 한 명 한 명이 사실상 독립된 팀으로 일하고 있었다.

“저희끼리는 그래도 가끔 보는데 팀장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셔서 그런 거죠.”

리안이 말했다.

나는 잠시 리안을 노려보았다.

리안은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네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리안 부팀장님께서 현 투자 상황을 정리해 주시죠.”

내가 말했다.

리안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잠시 보고는 서둘러 서류를 뒤졌다.

“이런 이런······. 제가 없는 동안 부팀장님이 팀을 이끌어야 하는데 팀의 투자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조민 씨!”

나는 조민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불렀다.

“예······?”

쪽지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던 조민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조민 씨라면 아실 것 같은데요?”

“아, 예.”

조민은 들고 있던 쪽지에 순식간에 뭔가를 휘갈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기준으로 W&R이 나스닥과 S&P 선물에 투자한 규모는 7억 5,060만 2,405달러입니다. 그리고 독일 DAX 지수 선물에 투자한 금액은······.”

조민은 쪽지도 보지 않고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나는 손을 들어 조민의 말을 막았다.

“어차피 지금 청산할 것도 아니니 100만 달러 단위 정도까지만 하죠.”

“알겠습니다.”

조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숫자를 불러 나갔다.

“독일 DAX 지수 선물에 투자한 금액은 1억 3천1백만 달러, 일본 닛케이 225 지수 선물에 투자한 금액은 1억 4백만 달러, 한국 코스피와 코스닥 지수 선물에 투자한 금액은 5천2백만 달러. 그리고 따로 2억 5천2백만 달러가 홍콩 항셍 지수 선물에 투자된 상태입니다. 그 외에 한국에 투자된 금액은······.”

“거기까지 하죠. 한국에 제가 따로 투자한 금액은 물론이고 AAM이나 RAM은 이 팀이 아니라 따로 관리하는 자금이니까요. 지금은 W&R에 지금 중에서 선물에 투자된 금액만 이야기하도록 하죠.”

내 말에 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투자를 제외하고 W&R이 각종 지수 선물에 투자한 금액은 오늘 제가 오기 전 확인한 바로는 12억 9천1백만 달러 정도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새삼스러웠다.

조민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해서나 초조해서가 아니라 내가 벌고도 믿기 어려운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W&R 소유의 건물과 한국에 투자된 금액까지 합치면 W&R의 자산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4억 달러였다.

이중 내 지분은 87%.

12억 달러가 넘었다.

내가 많이 벌기는 했구나······.

나는 머리를 흔들어서 이런 생각을 떨쳤다.

지금은 내가 번 돈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어서 투자 회의를 마치고 필리핀으로 가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몇 주 전보다도 많이 늘어났네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 투자 방향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고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회의를 이어 나갔다.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미국 지수 선물에 대한 투자를 숏 포지션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주가 상승 때문인가요?”

리안이 물었다.

미국 지수 선물에 대한 투자는 그의 담당이었다.

“예. 미국의 주식시장이 지난 한 달 동안 많이 올랐습니다. 다우지수도 20% 이상 올랐고 나스닥 지수는 25% 가까이 올랐습니다. 한 달 동안 이 정도 올랐으면 아무리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도 한 번 숨 고르기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내 이야기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음으로 조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본 닛케이 225 지수 선물에 대한 투자는 롱 포지션으로 전환하겠습니다.”

내 이야기 조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나요? 여전히 일본 경기 전망은 상당히 좋지 않던데요?”

조민이 물었다.

“일본 정부에서 대규모 추경안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확실한 건가요?”

조민이 되물었다.

“예, 확실합니다.”

“어떻게 추경안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물건을 사려면 백 개의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죠. 그 눈 중 하나를 통해서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추경이 효과가 있을까요? 전에도 일본 정부에서 비슷한 조치를 발표했는데 주가에 별다른 호재가 되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조민은 내가 정보 출처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자 추경안의 효과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2주 동안 일본 증시는 다른 나라의 유가증권 시장이 오르는 상황에서 주요 증시 중에서 유일하게 하락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거듭된 내 설명에 그제야 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그럼 이번 투자 회의를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리안이 나를 찾아왔다.

“어제 이야기와 다르잖아. 왜 갑자기 투자 상황은 묻는 건데?”

“먼저 예정에 없던 자리를 비운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것은 너지. 그리고 내가 자리를 자주 비우는데 너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나도 매일 밤에 정기적으로 확인한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다르고 금액도 큰데 어떻게 숫자를 다 기억해.”

“조민은 기억하던데?”

“걔는 어릴 때부터 숫자 귀신이었어. 나 같은 평범한 사람하고는 다르지.”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고?”

“뭐야!”

리안이 한 걸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자리를 자주 비우니 너라도 좀 확인하라는 말이야.”

“알았어, 내가 신경 쓸게.”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너 이번에는 필리핀에 간다고? 며칠 전만 해도 한동안 홍콩에 있을 것 같더니?”

리안이 물었다.

“그렇게 됐어. 이번 일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라서 안 갈 수가 없네.”

2.

필리핀에서의 연락.

본부를 통해서 온 연락이 아니라 엘만 지부장에게서 직접 온 연락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CIA 파견 임무를 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본부에서 지시가 왔다고 해도 거절하고 싶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작전에서 갑자기 배제된 일 때문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회의와 섭섭함이 있었다.

한동안 쉬고 싶었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엘만 지부장이 나를 부르는 이유는 어느 정도는 인도네시아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이번에 필리핀에 가서 처리해야 하는 일도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예전에 내가 제안했던 작전의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에 갔던 이유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토미 수하르토의 일탈 때문이라면 필리핀에 가야 하는 이유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정된 일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예전 CIA는 내 제안으로 필리핀 대통령궁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해 주겠다는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누르 미수아리는 민다나오 자치구의 전 주지사이자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의 지도자였다.

누르 미수아리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누르 미수아리를 돕기 위해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의 경쟁단체는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을 깨기까지 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정적인 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으로서는 누르 미수아리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로요 대통령은 누르 미수아리를 주지사에서 몰아내기로 했다.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르 미수아리는 30년간 민다나오 독립을 위해 투쟁한 지도자였지만 민다나오 자치구가 성립되고 5년 동안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독재자가 된 독립 영웅의 길을 걸었다.

주지사로서 무능력했을 뿐 아니라 누르 미수아리의 측근들과 가족들은 필리핀 정부에서 받는 막대한 지원금 상당수를 착복했다.

다른 독립 영웅 출신 독재자와 다른 점은 누르 미수아리는 독립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자치구의 주지사라는 점이었다.

아로요는 이런 점을 이용해서 민다나오 자치구의 간부들을 포섭해서 누르 미수아리를 축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

이렇게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누르 미수아리를 민다나오섬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아로요 대통령이라고 해도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누르 미수아리는 민다나오 자치구가 성립되고 신망을 잃기는 했지만, 민다나오 무슬림 독립운동을 30년간 이끈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을 암살하거나 비리로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다.

누르 미수아리를 주지사에서 축출한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의 간부들은 물론이고 누르 미수아리를 비판하며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 떨어져 나간 모로 민족 해방 전선과 아부 샤리프조차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칫 누르 미수아리가 죽어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로요 대통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다음 대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르 미수아리를 암살해서 민다나오섬의 모든 무슬림을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CIA,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노린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필리핀 정부에서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할 명분을 주는 것이 내 제안의 핵심이었다.

누르 미수아리를 압박해서 그가 다시 총을 들게 만드는 것······.

아무리 누르 미수아리가 민다나오 무슬림 독립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해도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면 필리핀 정부, 정확하게는 아로요 대통령은 그를 제거할 명분을 가지게 된다.

그를 총을 들게 하는 디데이로 잡은 것은 민다나오 자치구의 새로운 주지사를 뽑는 선거였다.

그 선거가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3.

“어서 오게”

이번에도 나를 맞은 것은 엘만 지부장이었다.

“어째 매번 지부장님이 나오시네요?”

나는 엘만 지부장이 매번 마중을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무려 CIA의 지부장이었다.

물론 CIA 필리핀 지부가 예전만큼 중요한 지부는 아니었다.

CIA에 미군 기지가 있을 때는 필리핀은 말 그대로 동남아시아 CIA 지부의 핵심이었다.

그런 중요성 때문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망명시키기 위해 몇십 명의 요원이 파견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필리핀이 강대국이 아니라고 해도 지부장이 이런 일에 매번 나서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없다고요? 필리핀 지부의 사람이 그렇게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자네를 만나러 내보낼 정도의 보안 등급을 가진 사람이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팀의 보안 레벨이 올라가서 여기 지부의 어지간한 요원들은 자네 팀과 함께 작전할 수가 없네. 그게 아니더라도 자네 팀 존재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보안을 철저히 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야. 결국, 자네를 만난 지부 요원 중에 그나마 시간이 있는 내가 나온 거야.”

“조엘 요원은 뭐 하시고요?”

내가 물었다.

한동안은 엘만 지부장과 작전을 했지만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 같이 일을 했던 것은 조엘이었다.

“조엘? 지금 한창 민다나오섬의 밀림에서 고생을 하고 있지. 누군가 누리 미수아리를 전담 마크해야 할 것 아닌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나는 이제야 조엘이 올 때마다 얼굴이 좋지 않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생하겠구나······.

전에 나를 대하던 태도를 생각하면 조금은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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