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64화 (165/270)

(164)

#165. 살인은 흔적을 남긴다

1.

11월 19일 오전.

엘마 지부장과 나는 민다나오섬 남서쪽에 있는 홀로(Jolo)섬의 중심지인 홀로시, 시청이 보이는 건물 창가에 앉아 있었다.

홀로시는 인구 30만 정도인 홀로 섬의 주요 항구로 인구 6만이 모여 사는 중심 도시였다.

엘만 지부장에 말에 의하면 오늘 누르 미수아리가 이끄는 반란군이 시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를 습격할 예정이었다.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일까지 직접 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외부 팀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나를 직접 상대한다는 엘만 지부장의 말은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 일은 이해한다고 해도 직접 홀로섬까지, 나까지 끌고 날아온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총격전이 벌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현장이었다.

“나처럼 어중간한 나이에 현장과 너무 떨어져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나?”

“글쎄요, 전 잘······.”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현장 요원도 아니고 엘만 지부장과 나이 차이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숫자로 보이지. 그게 우리 편이든 적이든 말이야.”

“······.”

엘만 지부장과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 친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마도 이반 부카드가 나에 대해서 엘만 지부장에게 뭔가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혹시 이반 부카드 요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내가 물었다.

“맞아.”

엘만 지부장이 말을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자네와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부카드 요원의 말에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게. 그 친구 나름으로는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이반 그 친구는 가끔 마음에 든 어린 요원들을 보면 선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부분이 있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반 부카드 요원께서도 본인의 생각과 입장이 있으니까요.”

내 대답에 엘만 지부장이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외부 팀이라서 명령 계통 밖에 있는 요원의 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나는 엘만 지부장의 말에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장난이네. 장난······.”

엘만 지부장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된 모양이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일에 참여한 병력이 얼마나 된답니까?”

“200명 정도라고 하더군. 부대를 이끄는 것은 누르 미수아리의 조카고 말이야.”

200명이라는 말에 나는 많이 놀랐다.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20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맞아. 잠입한 조엘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더군.”

“누르 미수아리의 영향력이 많이 줄기는 줄었네요. 한때는 몇만이나 되던 반군을 이끌던 시절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누르 미수아리는 처음 수십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몇 년 안에 반란군의 수를 몇만까지 늘렸다.

민다나오섬 이슬람 반군을 막기 위해 70년대부터 최근까지 필리핀군 병력 중 10만 이상이 민다나오섬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지. 지금은 정작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도 소수파에 전락한 상황이니까 말이야.”

누르 미수아리가 필리핀 정부와 민다나오 자치구에 대해 협상을 하면서 상당수 병력이 누르 미수아리가 이끌던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기에 민다나오 자치구가 성립된 이후에 측근과 가족들의 부패로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도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누르 미수아리로서는 마지막 반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반란에 겨우 200명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2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니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네요.”

필리핀군의 병력은 17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10만이 민다나오 지역에 있었다.

필리핀군의 무장 상태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겨우 총으로 무장한 반란군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2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다.

“누르 미수아리로서는 5년간의 휴전을 깨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분을 얻고 싶은 것이지, 어떤 성과를 낼 생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니까.”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 주지사 선거를 방해할 목적이겠군요.”

“그렇지.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라는 것 자체가 누르 미수아리와 필리핀 정부 사이의 휴전 협상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그 한쪽인 누르 미수아리가 반란을 일으킨 거니까.”

“말이 반란이지 실제로는 테러네요.”

“누르 미수아리로서는 이번 반란을 통해서 다음 주에 있을 주지사 선거를 반대할 목적이겠지.”

“200명 중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갈까요?”

누르 미수아리의 반란에 참여한 인원수는 200명이었다.

테러를 실행할 인원이라고 생각하면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군부대와 경찰력이 지키고 있는 시설물이었다.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까?”

“전멸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무슨 필리핀군이 도살자들도 아니고 다 죽이기야 하겠나? 하지만 교전 중에 최소 절반은 죽을 테고 남은 자들도 군과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야.”

“단순한 명분치고는 희생자 수가 많네요.”

엘만 지부장의 말에 의하면 반란군에게서만 최소 100명이 단순한 명분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누르 미수아리가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겠지. 누르 미수아리 본인은 물론이고 측근 가족들까지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에서 벌어진 부정에 대한 조사를 이뤄지고 있으니까. 새로운 주지사가 선출되면 어차피 누르 미수아리는 감옥밖에 갈 곳이 없어.”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예전 누르 미수아리가 일으킨 반란으로 희생된 사람은 최소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이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 죽을 100명에서 200명 정도는 아주 소수였다.

하지만 이번 반란은 누르 미수아리의 예전 반란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민다나오 무슬림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르 미수아리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

총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미수아리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소리였다.

아마 오늘 죽는 사람 중에는 자신들이 죽는 진짜 이유를 모른 상태로 죽어 갈 것이다.

어쩌면 사실을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죽어 간다고 생각해야 그나마 덜 비참하지 않겠는가?

“나쁜 놈이 잘 산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군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누르 미수아리는 이번에도 목숨을 건질 테니까요.”

CIA는, 아니 정확하게는 엘만 지부장과 나는 계획을 바꿔 이번에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이번에 누르 미수아리를 기회가 있으면 살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바꿔 누르 미수아리를 살리기로 했다.

“지금 누르 미수아리가 죽으면 곤란하니까.”

911 테러가 아니었다면 누르 미수아리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르 미수아리는 어쨌든 민다나오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세력이 줄어든 지금도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의 최대계파 지도자였다.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은 이슬람 국가들이 모인 단체인 이슬람 연맹의 회원국이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슬람 연맹의 지지가 필요했다.

누르 미수아리로서는 운이 좋은 셈이었다.

“필리핀 대통령 궁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지 않는다니까요?”

“다음 선거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더군.”

“반대를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얼마 전 본국에서 아로요 대통령에게 지원한 군사원조만 1억 달러가 넘고 약속한 무역 이익이 10억 달러입니다.”

“자네 아로요 대통령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군.”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욕심이 많은 거겠죠.”

아로요 대통령의 목표는 재선이었다.

그 일을 위해서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조엘 요원이 누르 미수아리를 말레이시아로 탈출시키는 것입니까?”

“그대로는 아니고 일단 아부 샤아프를 통해서 하루 이틀 정도 숨었다가 탈출시킬 예정이야.”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는 계획이 바뀌면서 아부 샤아프를 이용하는 계획도 폐기된 것 아닙니까?”

아부 샤아프는 올해 봄, 여름에 대규모 납치 사건을 일으킨 조직으로 현재 민다나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반군 중에서 가장 과격했다.

원래 계획에는 누르 미수아리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그가 아부 샤아프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르 미수아리를 살해하는 계획이 변경된 이상, 굳이 아부 샤아프를 끌어들이는 이유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누르 미수아리는 언젠가는 필리핀에 돌아오겠지.”

“그렇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를 위한 약점 하나 잡아 놓으면 좋지 않겠나? 이번 기회에 아부 사아프에 대한 정보도 얻고 말이야. 운이 좋으면 그들에게 납치된 두 명의 본국 선교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는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부 샤아프가 반란을 일으킨 누르 미수아리를 숨겨 주고 그의 국외 탈출을 도울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누르 미수아리가 필리핀 정부와 협상한 것을 비난한 것이 아부 샤아프였다.

그런 그들이 누르 미수아리에게 자신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인질인 미국 선교사에 대한 정보를 노출할 리가 없었다.

엘만 지부장의 말을 들으며 역시 CIA는 치밀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필리핀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필리핀 대통령 궁과 했으니 누르 미수아리가 돌아오려면 최소 4년에서 5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데 CIA는 그 이후를 대비해서 벌써 누르 미수아리의 약점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탕! 탕!’ 총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창밖으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시청을 둘러싸고 10여 명의 반란군과 시청을 지키는 경찰들 사이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반란군이 들어온 겁니까?”

“내가 들여보내도록 했으니까.”

엘만 지부장은 어느 사이에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들여보내 주다니요?”

“처리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가지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건 저격 소총이 아닙니까?”

가방에서 나온 것은 저격 소총이었다.

“처리할 일이 저격입니까?”

“맞아.”

순식간에 저격 소총 조립을 마친 엘만 지부장은 교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두 발을 빠르게 발사했다.

그의 총탄에 쓰러진 것은 반군이 아니라 반군 교전을 벌이는 경찰 간부와 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민간인이었다.

민간인이 쓰러지자마자 주변에서 달려드는 것을 봐서는 아마도 시의 고위 간부인 듯했다.

저격을 마친 엘만 지부장은 빠르게 창에서 떨어졌다.

“내 솜씨가 아직은 괜찮군.”

“어떻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알겠지만 술루에는 관리나 경찰 중에도 이슬람 반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 고위직에 올라간 경우도 많고 말이야. 그중에는 심지어 알 카에다에 연계된 인물도 있네. 문제는 그런 자 중에서 주민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자들도 있다는 말이야. 사법 처리하면 좋은데, 심증은 있는데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같이 술루

제도나 홀로섬 주민들의 여론도 조심해야 할 때는 아주 처지가 곤란한 자들이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홀로섬이 포함된 술루 제도는 필리핀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이곳의 이슬람 인구는 97%가 넘었다.

“그런데요?”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지. 죽음 그 자체가 경고가 되는 법이거든······.”

엘만 지부장은 나에게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이반 부카드의 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그 사람이야말로 목표가 정해지면 주변의 희생 따위는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야. 우리 같은 요원에게 사람들의 죽음에 신경 쓰는 것은 사치야.”

엘만 지부장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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