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65화 (166/270)

(165)

#  166. 햇빛이 시궁창에 비친다고 해도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1.

홀로섬에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엘만 지부장에게서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르 미수아리의 반란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군부대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반란군의 숫자는 100명이 넘은 데 비해 필리핀군은 사망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더군.”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듣자니 필리핀군은 전투 헬기와 중화기까지 동원한 데 비해 누르 미수아리의 반란군 무장은 AK-47이 고작이었다면서요?”

“뭐 그렇지. 요즘 필리핀군이 신났더군.”

필리핀의 뉴스는 온통 누르 미수아리의 반란과 그를 반란을 격퇴한 필리핀군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필리핀 정부는 예정했던 무슬림 민다나오 주지사 선거도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홀로섬에서의 누르 미수아리가 시도한 반란은 완전한 실패였다.

엘만 지부장과의 홀로섬 여행은 충격이었다.

그는 내 눈앞에서 대놓고 필리핀의 관리와 경찰을 암살했다.

아니 그건 암살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처형이었다.

그 일을 실행한 사람이 CIA였을 뿐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군과 사전에 합의된 일일 것이다.

여러 가지로 그 일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 정도 일은 굳이 엘만 지부장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CIA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필리핀 자체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엘만 지부장이 굳이 나를 함께 데려가서 그 일을 한 것은 의도된 일이었다.

지난번 이반 부카드의 말과 엘만의 이런 행동은 올해 내가 했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CIA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의 시인 터틀리언은 “태양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어 주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The sun loses nothing by shining into a puddle).”라고 이야기했다.

뛰어난 사람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주변의 더러움에도 눈에 띈다는 의미지만 이건 말 그대로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로마에서 태양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면 태양은 단순히 뛰어난 인물 정도가 아니라 정점에 선 사람을 의미했다.

터틀리언의 말은 역설적으로 태양과 같은 사람만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조엘에게서 연락이 왔네. 누르 미수아리와 함께 무사히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더군.”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생각은 임무가 끝났다는 의미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조엘 요원이 정말 고생했겠군요.”

엘만 지부장에게 들으니 조엘은 댕기열로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덕분에 누르 미수아리에게 신임을 얻기는 했다지만 잠입하는 동안에는 CIA가 도울 수도 없으니 자칫 죽을 수도 있었다.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했지. 그래도 일이 잘 끝나서 고생한 보람은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 정부 당국에 누르 미수아리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면 진짜 끝이네요.”

“뭐, 그렇지. 지금처럼 누르 미수아리의 생사나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주지사 선거에도 영향이 있을 테니까.”

“그런 추적을 피해서 말레이시아까지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보면 필리핀이 무능한 것인지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이 유능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필리핀군과 경찰이 누르 미수아리를 잡기 위해 대규모 추적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둘 다겠지. 우리의 도움도 있었고 말이야. 필리핀 정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에서 누르 미수아리와 친분이 깊은 관리와 경찰 들을 책임을 물어서 정리할 생각이라고 하더군.”

아이러니했다.

정작 누르 미수아리를 말레이시아에 빼돌린 것은 CIA인데 정작 피해를 입는 것은 누르 미수아리에게 남아 있는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기반이었다.

“이번 기회에 이슬람 테러 단체들이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를 연결하는 루트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야.”

“오사마 빈 라덴이 말레이시아에서 필리핀으로 잠입한다면 그 루트를 이용할 수도 있겠군요?”

지난달 필리핀 관리가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에 잠입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필리핀까지 올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파악한 루트를 감시할 필요는 있겠지.”

“말레이시아에서 필리핀을 연결하는 루트를 파악한 것이 이번 작전의 최대 성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오사마 빈 라덴이 바보가 아닌 이상 실제 필리핀까지 올 가능성은 낮지만 어쨌든 현재 미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오사마 빈 라덴이니까 말이야. 그 오사마 빈 라덴이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무슬림들이 이용하는 루트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위에서는 좋아할 거야.”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더라도 CIA가 이번에 파악한 루트는 꽤 유용했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는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뿐이 아니었다.

“조엘 요원은 정말 고생한 보람이 있겠네요.”

“이번에 돌아오면 잠시 휴가라도 줄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엘만 지부장이 말을 이었다.

“다른 기쁜 소식도 있네.”

“다른 기쁜 소식요?”

내가 되물었다.

“그래. 필리핀군과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군. 곧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잡고 있던 인질 110명이 풀려날 거야.”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군으로서는 좋은 소식이 계속 이어지는 셈이네요.”

“우리가 얻는 것이 있으면 필리핀군이 얻는 것도 있어야지.”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

나는 엘만 지부장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번에 누르 미수아리가 탈출에 이용한 루트를 필리핀 정부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그걸 알려 줘야 할 이유가 있나?”

“아니, 그래도······.”

이번에 발견된 루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나라는 필리핀이었다.

그런데 정작 필리핀에는 그 루트를 알려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자네, 필리핀군이 이슬람 반군을 상대할 때 작전을 실행 직전에 알려 주는 것 알고 있나? 빨라야 2시간 전에야 알려 주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부하들을 믿지 않는다?”

“맞아. 필리핀에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루트에 대한 정보는 사치야.”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나는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엘만 지부장과의 작전을 변경하던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

문득 어쩌면 굳이 누르 미수아리를 살려서 말레이시아로 탈출시키고 그곳에 잡아 놓은 이유.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루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엘만 지부장에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셈이었다.

2.

누르 미수아리가 말레이시아에 도착했을 때 CIA와의 작전은 끝났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내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선 홍콩의 장샤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하기 전에 자금이 필요했다.

“접니다, 에드릭.”

-목소리만 듣고도 알겠네요. 무슨 일이죠?

장샤오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타이완에 투자된 AAM의 자금이 얼마나 되죠?”

나는 몇 주 전부터 AAM 투자금을 3팀이나 W&R을 빼고 장샤오이를 통해 투자하고 있었다.

-지금 1억 8,124만 달러 정도 있어요.

“그 돈을 전부 일단 필리핀 은행 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 돈을 전부요?

장샤오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예. 어디에 투자할지는 내일 알려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장샤오이가 대답했다.

엘만 지부장의 말에 의하면 이슬람 반군이 납치한 110명의 인질도 풀려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면 누르 미수아리가 말레이시아 정부에 체포된다.

누르 미수아리의 체포가 발표되면 이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 선거를 방해할 장애는 모두 사라진다.

모두 필리핀 정부에는 엄청난 호재였다.

당연히 필리핀 경제에도 엄청난 호재였다.

이런 호재가 발표되면 당연히 민다나오섬에 투자하고 있는 필리핀 기업들의 주가도 오를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고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엘만 지부장도 나를 이용했는데 내가 그에게 얻은 정보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뭔가?

전화를 끊은 나는 리코를 찾아갔다.

“오랜만입니다. 연락도 없이 필리핀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한창 사업 시작으로 바쁜 분에게 그럴 수가 있나요.”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리 바빠도 제가 마중을 나가야죠.”

“다음에는 연락드리죠.”

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요?”

내 말에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아직 불황입니다. 이런 경제 상황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구조 조정입니다. 그리고 구조 조정의 1순위는 인력 감축이고요. 그리고 그 인력 감축의 1순위는 단순 작업이죠.”

내가 투자하고 리코가 시작한 사업은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였다.

쉽게 말하면 회사에서 하는 단순 작업을 외부 기업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었다.

리코를 통해 필리핀 정보 수집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BPO 사업은 그 자체로 전망이 밝은 사업이었다.

불황을 이유로 회사들은 단순 업무를 하는 직원들을 해고했고 그 일을 다른 회사에 외주를 주고 있었다.

“작년 다른 기업들이 불황에 허덕여서 인력 구조 조정을 하는 와중에도 BPO는 오히려 13%나 성장했습니다. 연구기관 발표에 따르면 몇 년 안에 BPO 산업의 규모가 2,34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내 이야기를 듣던 리코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지난번 말씀하신 것처럼 외국에 있는 기업들이 필리핀에 있는 저희에게 일을 맡기겠습니까? 제가 알아보니 지금은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 대부분이 이런 외주를 자국 기업을 통해 의뢰하고 있더군요.”

리코는 여전히 사업에 완전한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일단 비용 때문에 외주화한 업무들입니다. 결국에는 비용이 싼 국가들로 이동할 수밖에 없죠. 그런 점에서 우수한 노동력, 특히 영어에 능숙한 고학력 필리핀에서 BPO 사업의 전망은 밝습니다. 2,340억 달러나 되는 시장입니다. 그중 아주아주 작은 부분만 잡을 수 있어도 리코 씨는 필리핀에서 왕처럼 살 수 있을 겁니다.”

“에드릭 씨 말씀처럼 그런 때가 진짜로 왔으면 좋겠네요.”

“와야죠. 그래야 저도 돈을 벌지 않겠습니까?”

“그러게요.”

리코가 대답했다.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녁때까지 민다나오섬에 투자한 필리핀 기업들 명단을 가져다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민다나오섬에 투자한 기업들요? 농장이나 공장 이런 것들 말입니까?”

민다나오섬은 필리핀에서 농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오랜 내전으로 농업 외에는 다른 산업이 발전할 여력이 없는 지역이었다.

“뭐라도 좋습니다. 대략적이라도 투자 금액도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리코가 대답했다.

나는 리코가 그날 밤 가져온 자료를 보고 투자할 기업을 정해서 홍콩에 있는 장샤오이에게 투자 지시를 내렸다.

3.

마닐라 저택에 머물며 필리핀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홍콩에서 전화가 왔다.

-저 조민이에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조민이었다.

조민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엔론과 다이너지의 인수 합병이 예상대로 결렬됐어요. 그리고 신용 평가 기관에서도 엔론 신용 등급을 정크 등급으로 강등할 예정이라는 소문이에요.

“지난번 조민 씨가 이야기대로라면 지금까지 정크 등급으로 강등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죠.”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아무리 신용 평가 기관이라도 엔론 같은 거대 기업의 신용 평가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죠.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라면 엔론은 곧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겠군요.”

조민은 홍콩에서 나에게 엔론이 다음 달 초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예, 그래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파산 보호 신청이 발표되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공매도는 어떻게 할까요? 조금 더 기다리면 더 싼 가격에 주식을 매수할 수 있을 거예요.

조민의 말대로 시간이 가면 엔론 주식은 말 그대로 휴짓조각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휴지 가격마저 시간이 가면 더 내려갈 것이다.

조민이 주도한 엔론 공매도는 2억 달러나 됐다.

조금만 가격이 더 내려가도 이익은 엄청나게 늘어난다.

“지난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파산 보호 신청에 들어가면 바로 공매도를 청산해 주세요. 계속 가지고 있으면 이익은 늘어나겠지만 그만큼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다른 곳에 투자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죠.”

공매도를 시작하던 시점의 엔론 주가가 18달러 정도였다.

2억 달러면 공매도를 청산을 위해 사들여야 하는 주식만 1,100만 주가 넘었다.

엔론은 올 초만 해도 시가총액 600억 달러가 넘던 거대 기업이었다.

지금 월스트리트에는 고래가 상처를 입으면서 그 피를 보고 몰려온 상어 떼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익은 줄어들더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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