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66화 (167/270)

(166)

#  167. 행운은 행운으로 받아들여라

1.

-이번에 누르 미수아리를 필리핀에서 말레이시아로 쫓아냈다면서?

이반 부카드의 말에 엘만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쫓아내기는 무슨······. 본인이 알아서 도망간 거지.”

알아서 도망간 것은 아니었다.

누르 미수아리의 횡령 증거를 대통령궁에 흘려 그를 주지사에서 해고하고, 해고된 이후에는 조엘을 보내서 끊임없이 누르 미수아리에게 횡령으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누르 미수아리가 가장 아끼는 세 번째 부인이 필리핀 검찰의 조사 대상이라는 정보를 흘린 것이 이번 반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누르 미수아리는 필리핀에 부임하는 요원들로서는 오랫동안 골칫덩어리였다.

-골칫덩어리였던 누리 미수아리를 처리했으니, 속이 시원하겠어.

말레이시아로 도망가서 목숨은 건졌지만, 이미 정치적으로 거세를 당한 셈이었다.

아마 예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누르 미수아리는 비록 예전에 가지고 있던 세력 상당수를 잃었지만, 필리핀 무슬림의 구심점이었던 인물이었다.

필리핀 무슬림 세력과 정치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누르 미수아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서 그 연결 고리가 사라졌다.

이번 반란을 계기로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은 사실상 민다나오 무슬림 사회에서 주도권을 잃었다고 봐야 했다.

당연히 속도 시원하고 기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쁜 점은 이제 필리핀군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17만이 넘는 필리핀군 중에서 12만 이상이 지금까지는 사실상 민다나오섬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이제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이 안정화되면, 민다나오섬에 묶여 있던 12만 필리핀군에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필리핀 내 공산 반군을 완전히 제거할 수도 있고, 남중국해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누르 미수아리가 체포됐다는 뉴스가 나온 이후로 겉으로는 말레이시아 정부에 그의 송환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던데?

“왜 이래, 잘 알면서······. 그거야 겉으로 하는 말이지. 아로요 대통령은 적어도 다음 대선 때까지는 누르 미수아리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말레이시아는 필리핀의 송환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신 자신을 사우디나 카타르로 보내 달라는 누르 미수아리의 요구도 거절하며 나름의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빨라도 다음 필리핀 대선이 끝난 사오 년 후에나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듯했다.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자신은 필리핀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도 에이전트 에스팀의 수이진이 관여한 거야?

“맞아. 너 때문에 생각이 많아져서 그것 달래느라 아주 골치 아팠어. 내가 애송이 앞에서 쇼까지 했다니까. 앞으로 써먹을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건드린 거야?”

-애송이는 무슨······. 애송이라기에는 올해 들어서 한 일이 많잖아.

“그런 것 알면서 왜 그런 거야?”

-엘레이 암살로 일이 완전히 꼬였거든······. 그런데 거기서 더 문제를 만들자고 하니까 순간 울컥했어.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하여간 예전부터 성질하고는······. 이리안 자야에 들인 공이 엘레이 암살로 날아가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점도 있지. 지금 이리안 자야에는 엘레이 정도의 인물이 없어. 독립을 시키려고 해도 무슨 구심점이 있어야 하지.

“그게 에이전트 에스팀이나 수이진의 잘못도 아니잖아. 동티모르처럼 이라안 자야를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시키려던 계획은 나도 아는데, 이제 굳이 이리안 자야를 독립시킬 필요 없잖아. 그리고 너도 토미 수하르토 작전에 동의했었다면서······?”

-그랬지. 내가 동의했던 일 때문에 일이 꼬인 것 같아서 더 짜증 나. 그 일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파키스탄에 가 있을 텐데······.

“포기해. 며칠 후에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드하르에 병력을 직접 보낸다더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제 끝이야.”

-끝나기는 뭐가 끝나. 아프가니스탄이 지금 정도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곳이었으면, 예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을 때 버티지도 못했어. 지금은 파키스탄 때문에 더 복잡하고 말이야.

“네가 그런 생각을 하면 뭐 해, 이미 백악관은 결정을 내렸는데. 내가 들으니 정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재건 비용으로 250억 달러 정도 소요될 것 같다면서,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 생각하고 있다더라.”

-아 진짜······. 탈레반의 오마르나 오사마 빈 라덴도 잡지 못했는데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왜, 네가 파키스탄에 가서 오사마 빈 라덴이라도 잡으려고? 그러고 보니 오사마 빈 라덴 현상금이 2천5백만 달러로 올랐다더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니까.

“어쨌든 내가 보기에 네가 파키스탄 지부로 옮기는 일은 물 건너갔어. 네가 동아시아 지부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는데, 유럽이나 중동만 중요한 것이 아니야.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라는 말도 있잖아. 그리고 그 동아시아 지부들에서 에이전트 에스팀과 수이진이라는 애송이는 여러 가지로 쓰기 좋으니, 괜히 문제 좀 만들지 마.”

-에이전트 에스팀과 수이진에게 너무 의존하지 마. 아직 경험이 적어서 권력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재능은 있지만 이제 막 일 시작한 요원에게 바라는 것도 많다.”

-그러다가 큰 실수 하지.

“어차피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거야.”

-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2.

-그러니까 이번 주에는 나스닥을 빼고 나머지는 매도 포지션으로 전환한다는 말이야?

“맞아. 이유는 지난 미국 나스닥과 마찬가지야. 다른 곳도 테러 전 주가 수준을 이미 회복했잖아. 한번 조정받을 때도 됐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넌 필리핀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인데?

“필리핀 투자를 마무리하고 바로 다음 주에 돌아갈 생각이야. 개별 주식들에 투자하는 것이 은근히 손이 많이 가네.”

이번 AAM의 필리핀 투자는 W&R의 투자와는 조금 달랐다.

민다나오섬과 관련이 깊은 필리핀 개별 회사 주식에 분산해서 투자되었다.

이번에 필리핀 파생 상품 시장에 투자된 AAM의 자금은 1억 8천만 불이 넘었다.

필리핀 파생 상품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굳이 투자하려면 못할 것이야 없겠지만, 자칫 내 투자로 선물 지수가 왜곡될 수 있었다.

금액이 커서 구매할 때 지수가 내 투자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나중에 팔 때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한 주 정도 짧은 기간 투자하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나로서는 자칫 필리핀에 돈이 묶일 수도 있었다.

-예전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 알겠지?

전화 너머로 리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전 내가 리안과 둘이 투자를 하던 시절.

내가 투자할 국가를 정해 주었는데, 그 국가가 이번 필리핀처럼 파생 상품 시장이 작을 경우 리안이 당한 어려움과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이 같다는 말이다.

당시 리안은 내가 하는 것처럼 개별 회사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투자해야만 했다.

“우리 성장세를 보면 내년쯤에는 지금처럼 지수 선물에만 투자하기 어려울걸. 그러면 개별 기업에 투자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그 일이 누구 일이 될 것 같아?”

-그때는 그때고······. 어차피 지금 내가 놀리지 않는다고 그런 날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올 일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지금 나는 친구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고 싶네.

리안이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웃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간이 남으면 조민이나 도와줘. 조만간 엔론 공매도 정리하려면 정신없을 테니까 말이야.”

-됐네요. 네가 조민이 지금 어떤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그쪽 직원들에게 들으니 잠도 거의 못 잔다는데도 아주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더라. 일이 즐거운가 봐.

리안의 말을 들으니 어쩌면 예전 팀원 중에서 투자가 가장 적성에 맞는 사람은 조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쁘지는 않고 결과가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일 자체가 즐겁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리안이야 일에 대한 즐거움보다는 어딘지 모를 가문이라는 곳의 무게 때문에 일을 하는 부분이 있었다.

브레이크도 투자 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서핑을 더 좋아했다.

그에 비해서 조민은 처음부터 꽤 적극적이었다.

리안에게 들으니 어릴 때도 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도 팀원 중에서 투자가 천성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조민일 것이다.

3.

결론적으로 말하면 11월 넷째 주의 세계 증시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전반적인 주가 방향은 맞았지만,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예상과는 달리 2.7%나 올랐고 상승하리라 생각한 나스닥 지수는 겨우 0.7% 상승했다.

W&R의 투자 결과는 손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딱히 이익을 얻지도 못했다.

대신 필리핀에 투자한 AAM은 필리핀 증시가 8.4%나 오름으로써 꽤 큰 이익을 봤다.

특히 내가 투자한 기업들 몇몇은 주가가 10% 중반대의 상승률을 기록해서 이런저런 비용을 제외하고도 11% 정도의 수익률이었다.

나는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리코를 만났다.

“오늘 홍콩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덕분에 이번에 저도 투자로 꽤 큰돈을 벌었습니다.”

리코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요. 회사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 것도 대표님이고 투자한 자금도 대표님 개인 자금이었는데······.”

“그래도 팀장님이 아니면 이번처럼 확신하고 전 재산을 투자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리코는 이번에 투자해서 꽤 큰돈을 벌었다.

리코는 내가 민다나오섬에 투자한 기업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그날 저녁 나에게 찾아와 투자해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기꺼이 허락했다.

어차피 리코가 몇천만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의 투자는 내 수익률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냥 투자해도 될 텐데 먼저 묻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투자한 리코는 이번에 꽤 큰돈을 벌었다.

수익률만 따지면 나보다 오히려 높았다.

리코는 나처럼 거액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큰 이익을 얻을 기업에만 투자했기 때문이다.

조금 놀라운 것은 투자 금액이었다.

생각보다 금액이 커서 물어보니, 리코는 자신이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 거의 모두를 투자했다고 했다.

나를 그만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조사를 하면서 본인도 이건 되는 투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의외의 행동이었다.

“이번에 보니 리코 대표님이 승부사 기질이 있으시더군요. 투자 감각도 있으시고요.”

“아닙니다. 그냥 조사한 자료를 보다 보니 이번에는 될 것 같아서······.”

“그게 승부사 기질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번에 투자 자료를 건네준 사람과는 어떤 사이입니까?”

리코가 구해 준 자료는 필리핀 은행 중 한 곳의 내부 자료였다.

리코의 말에 의하면 자료를 건네준 사람은 은행의 본사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제가 경찰일 때 납치를 당했던 것을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꽤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회사를 차릴 때도 꽤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회사가 처음 수주한 콜센터가 바로 이번에 자료를 받은 은행에서 수주한 것입니다.”

“그 정도면 꽤 친한 사이겠군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그렇게 친한 사이라면 앞으로 필리핀에서 회사 정보를 얻을 때 그 사람을 계속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혹시 필리핀에서 투자회사를 차릴 생각이 없으십니까?”

“투자회사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필리핀에서 2천만 달러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 돈으로 필리핀에 투자회사를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 리코 씨가 생각이 있으시면 맡겨 볼까 하는데, 생각이 있습니까?”

“제가 말입니까? 하지만 저는 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어차피 큰 투자 방향은 제가 정할 생각입니다. 실제 거래도 제가 기존에 거래하던 홍콩 투자회사를 통해서 할 생각이고요. 그래도 안정적으로 필리핀에 투자하고 필리핀 기업에 대한 정보를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 필리핀에서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일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그런 행운을 받아들여도 될지······.”

“행운이라니요? 리코 씨가 제게 보여 준 모습을 믿고 맡기려고 하는 것인데요.”

“아닙니다. 저는 팀장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신이 행운을 준다면 감사하게 받아들이라고요.”

“그 말씀은 맡아 주신다는 뜻입니까?”

“예,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리코가 말했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약간 떨고 있었다.

이 아저씨 은근히 감상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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