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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
1.
나는 창세린에게 내가 민진당이 선거를 위해서 주식시장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나도 거기에 도움을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대가로 특별히 요구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단지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민진당과 에버그린 그룹이 알아주는 정도였다.
창세린으로서는 아무런 잃을 것이 없는 협상이었다.
내 제안을 거부하면 곧바로 민진당과 에버그린 그룹이 주식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폭로될 위험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에버그린 그룹의 창세린과의 협상은 문제없이 끝났다.
협상을 끝낸 나는 곧바로 장샤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버그린 그룹과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바로 매수에 들어가 주세요.”
장샤오이에게는 홍콩으로 오기 전 이야기를 해 놓았다.
- 알았어요. 에버그린해상과 에바에어 그리고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TSMC)을 사들이면 되나요?
“맞습니다. 이번 거래가 신경이 쓰이시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도 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아니에요, 일은 일이죠. 이미 준비를 다 끝내 놓았어요. 바로 시작할게요.
장샤오이가 말했다.
타이완으로 오기 전 이번 일에 대해서 장샤오이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 조금 고민을 했었다.
타이완 총통의 측근과 협상을 해서 선거 직전 타이완 주식을 대규모로 사들인다는 계획을 장샤오이에게 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현재 타이완의 여당인 민진당은 타이완 독립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었고, 이런 주장을 중국에서는 반란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최근 민진당은 에이펙 회의를 거부하는 등 중국에 대한 강경하게 대응을 하고 있었다.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장샤오이는 중국 본토 출신이자 타이완 독립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자세를 가진 태자당 출신이었다.
“민진당 선거를 도와주기 위해 타이완 주식을 대규모로 사들이는 것이 내키지 않으실 텐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에요. 미리 말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그냥 주식 구매를 지시해도 됐을 텐데요.
장샤오이의 말에 나는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솔직히 이야기한 것은 류오린을 통해서 투자하면 장샤오이의 눈을 피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야 없죠. 우리는 같이 일을 하는 사이 아닙니까.”
나는 일을 같이하는 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리안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에버그린 계열사와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TSMC)에 공매도로 번 1억 8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필리핀에서 회수한 1억 8천 만 불은 예전처럼 타이완 자취안지수 선물에 투자하면 되는 거죠?
공매도로 투자한 자금을 대만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서 돈세탁을 하는 의미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하신 대로 토요일 선거가 끝나고 다음인 월요일 오후에 에버그린 계열사 주식은 모두 매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매각한 자금으로 유나이티드 마이크론(UMC)에 투자해 주시면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에버그린 회장이 총통의 경제자문관이라는 사실이 에버그린 그룹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에버그린 주식에 장기 투자할 필요는 없었다. 기왕이면 더 많이 오를 파운드리 업체 주식을 사는 게 좋았다.
그리고 나는 단기적으로 에버그린 그룹보다 유나이티드 마이크론의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봤다.
어차피 선거가 끝난 이상 굳이 에버그린 그룹 주식을 더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 철저하시네요. 알았어요.
“그럼 다음 주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2.
선거를 앞두고 주가를 띄우기 위해서 투자한다는 것은 에버그린 그룹에 내세운 명분일 뿐이었다.
물론 내 주식 구매로 선거를 앞두고 주가를 띄우려는 민진당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었다.
내가 타이완에 투자하는 이유는 선거가 끝나면 타이완 주식이 상승할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치적 안정.
타이완 민진당은 지난 대만 총통 선거에서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 냈다.
국민당의 분열을 틈타서 이뤄 낸 성과였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의회에 해당하는 입법원 최대 당은 여전히 국민당이었다.
총통 선거가 끝나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민진당 첸수이벤 총리의 정책은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입법원에 막혀 있었다.
이번에 민진당이 선거에서 압승하면 그런 법안들이 통과되고 타이완의 정치적 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다.
두 번째는 대만의 기술주 특히 파운드리 업체 주가가 상승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투자하려는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TSMC)은 타이완 시가총액 최대 회사였다.
에버그린 그룹 관계자를 만나서는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을 사는 이유가 타이완 주식시장의 대표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은 세계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였다.
파운드리 업체는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는 업체를 말한다.
이런 업체는 반도체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기술주와 반도체 경기는 올해 내내 좋지 않았다.
타이완 세미컨덕터 메뉴팩처링 주가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완 주가가 10월 전까지 좋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주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주가가 좋아지리라 생각했고,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최근 실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월가에서는 반도체 업계를 이끄는 기업인 인텔이 3분기 실적은 기대 이상이라는 믿을 만한 정보가 퍼지고 있었다.
반도체 주식들은 인텔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주가는 물론이고 파운더리 시장에서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경쟁 기업인 유나이티드 마이크론도 오른다고 봐야 했다.
3.
한국에 도착한 나는 정윤호와 제러미 하, 하성철을 호텔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입니다. 연락을 주시지 않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연락을 주셨으면 공항에 마중 나갔을 텐데요.”
정윤호와 하성철이 경쟁하듯 말을 쏟아 냈다.
“아닙니다. 두 분 다 바쁘실 텐데 괜한 수고를 끼칠 필요가 없죠.”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번에는 한국에 꽤 오래 머물 생각입니다.”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신지?”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네다섯 달 정도는 있을 예정입니다.”
내 이야기에 하성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 머무신다고요?”
하성철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국에 머물면 혹시나 내가 자기 일에 간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도 내 투자 지시를 따라서 매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로 투자 지시를 받는 것과 내가 한국에 머물면서 지시를 내리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속 한국에만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해외에 나가야 할 겁니다. 홍콩에 계실 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홍콩에 있을 때도 한 달에 반 정도는 해외에 나가 있었습니다.”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에 하성철이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투자 현황은 가져오셨겠죠?”
나는 두 사람에게 호텔로 현재 투자 현황을 가져오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먼저 보고서를 제출한 것은 정윤호였다.
하성철이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내 말에 비슷하게 움직이기는 시작했지만, 정윤호가 더 빨랐다.
투자자 회사의 하성철이 몸놀림에서 국정원 요원을 따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정윤호가 건네준 보고서를 빠르게 검토했다.
“대출이 꽤 많네요.”
정윤호는 그가 이야기한 대로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방법은 건물을 하나를 사들이고 이어서 그 건물을 담보로 다른 부동산을 사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는 몇 달 사이에 이미 서울 시내의 빌딩과 건물을 다섯 채 이상 사들인 상태였다.
그렇게 큰 건물은 없었지만 엄청난 속도였다.
“현재 한국은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으로 대출 규제가 낮아진 상태입니다. 부동산 가격도 전반적으로 상승세고 경기도 회복 중입니다.”
“이미 사들인 건물과 빌딩만 다섯 채가 넘는데 보고서를 보니 내년까지 다섯 채를 더 늘린다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요? 대출이자도 문제지만 잘못하면 한 번에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대출을 통해 다른 건물을 연속으로 사들이는 방법은 간편하지만 그만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 투자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사들인 건물 중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자칫 소유한 건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다.
“거기 보시면 알겠지만, 현재는 수익이 나오는 상업용 건물 위주로 건물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건물에서 나오는 수익만으로도 이자를 갚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정윤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은 부동산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였다.
건물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면 건물 가격 상승분이 그대로 이익이 되는 셈이었다.
“건물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대출이자가 해결된다니 다행이기는 하네요.”
“특별히 공실률이 적은 건물들을 사들이거나 건물을 구매한 이후 리모델링으로 공실률을 줄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건물들이 공실률이 적은 편이네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겁니까?”
“예전에 이야기했던 같이 일하는 친구가 건물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건물을 유지, 관리하는 직원도 유능한 편이고요. 무엇보다 현재 시중 대출 이자율보다 낮은 4% 정도의 우대금리를 적용받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용 부담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4%요? 대출 금리가 그렇게 낮다고요?”
정윤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대출 금리가 대부분 4%에서 4.1% 사이였다.
한국의 시중 금리가 4.9%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 그대로 파격적인 금리였다.
“제가 전에 알던 인맥을 통해서 일본 쪽에서 한국 저축은행에 3%대의 대출을 해 주는 조건으로 4%의 금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 저축은행에 투자하고 다시 우대금리를 받았다고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사실상 일본 쪽 자금을 한국 저축은행에 대출했다는 의미였다.
“그런 인맥이 있었습니까?”
“전에 회사에 있을 때 일본 재일 교포들과 조금 인연이 있었습니다.”
정윤호가 말했다.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게 썩 밝지 않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통해 다른 사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최근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는 일본계 자금 중 일부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사실상 제로 금리인 것에 비해서 한국은 이자율 상한선이 폐지되면서 말 그대로 일본계 자금의 놀이터가 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정윤호의 표정이 밝지 않는 이유가 이해가 갔다.
나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국정원 출신이 그런 자금으로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는 셈이었다.
아무리 국정원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럽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당장 내가 단기간에 10억 넘게 벌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의 경제 위기는 물론이고 테러까지 이용해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정윤호와 나는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내가 더 심했다.
적어도 정윤호는 국정원에 있을 때는 국가 위기를 이용해서 돈을 벌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네요.”
나는 시선을 하성철에게 돌렸다.
그에게는 할 말도 많았고 같이할 일도 많았다.
한국의 부동산 투자는 내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주식 투자는 나름 내 전문 분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