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70화 (171/270)

(170)

#  171. 모든 만남에는 함정이 있다

1.

“오늘부터 가이닉스를 집중적으로 거래할 생각입니다.”

“가이닉스요? 어제 미국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가 하락했는데 괜찮겠습니까?”

하성철이 이야기하는 반도체 지수는 필라델피아 증권거래소가 반도체 설계 공급 제조 판매와 관련된 미국 주요 기업들의 주가를 모아서 지수화한 것이다.

다른 지수와 마찬가지로 결과를 모아놓은 것이지만 지수화되어 발표되는 지수 자체가 반대로 주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국 밖에 있는 반도체 기업들 주가에는 큰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다음 주에 발표될 인텔과 시스코의 3분기 실적이 시장 예상보다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야······.”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아니어도 가이닉스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큽니다.”

“무슨 다른 정보라도 있습니까?”

“마이크론의 스티브 애플턴 회장이 주말에 한국을 방문한다는 정보입니다.”

하성철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이크론 테크널러지의 애플턴 회장이요? 사실입니까?”

“지금으로서는 거의 확실합니다.”

내가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에 투자한 이유는 인텔과 시스코의 실적 개선과 함께 타이완의 여당인 민진당이 선거에서 선전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가이닉스와 타이완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의 차이는 인텔과 시스코의 실적 개선은 같은 조건이지만 각각 여당의 승리와 주요 경쟁 기업과의 제휴라는 조건이 달랐다.

“음······. 하긴 그런 소문이 있다는 정보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가이닉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을 비난하던 마이크론이 지난주부터 갑자기 잠잠할 때부터요.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한국을 그것도 애플턴 회장이 직접 찾아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현 한국 정부는 정권 교체를 이뤄 내고 얼마 후 재벌 기업 간의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이른바 ‘빅딜’이라고 불리는 정부의 인위적인 구조 조정이었다.

가이닉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탄생한 기업이었다.

가이닉스는 단숨에 디램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도약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대현의 가이닉스는 17조나 되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반도체 호황이 지속하였다면 가이닉스는 대현 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는 경기가 분명한 업종이었다.

가이닉스가 탄생하고 얼마 후 반도체 경기는 바로 이런 불황기에 접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서 닷컴 버블이 붕괴했고 전 세계 경기가 하강기에 접어들었다.

가이닉스가 지고 있는 17조 원이나 되는 부채를 갚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나마 대현이 예전처럼 하나의 기업이라면 어떻게 자체적으로 가이닉스를 처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지만······.

지금 대현은 선대 회장의 사망 직전에 벌어진 이른바 형제의 난으로 몇 개의 기업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당연히 쪼개진 대현으로서는 17조나 되는 부채를 가진 가이닉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대현은 가이닉스를 계열 분리라는 방법으로 그룹에서 떼어 냈다.

현재 가이닉스는 국책은행이 주요 주주였고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겨우 버티는 기업이었다.

바로 이런 한국 정부의 지원을 미국의 마이크론은 불공정하다면서 맹렬하게 비난했다.

가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주력 제품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마이크론의 가이닉스에 대한 비난이 싹 멈췄다.

그리고 며칠 전 가이닉스의 대표가 다른 업체와의 협력 가능성을 들고 나왔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겠죠. 어쨌든, 사실이라면 좋은 기회입니다. 더구나 가이닉스라면 설사 소문이 사실이 아니어도 손절매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고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주식은 바로 가이닉스였다.

몇만 원대였던 주식이 몇 달 전에는 몇백 원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지금은 회복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액면가 이하였다.

여기에 워낙에 규모가 큰 기업이고 주인이 없는 기업이다 보니 시장에 유동성도 풍부했다.

그리고 벌어진 것이 바로 이른바 도박판이었다.

현재 한국 주식시장에서 가이닉스 거래량의 비중은 적은 날도 50%가 넘었고 많은 날은 60%가 넘는 날도 있었다.

한국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가이닉스의 주식을 사고판다는 의미였다.

엄청난 거래량이었고 비중이었다.

가이닉스 주식은 한국에서는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도박판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가이닉스 주식에 투자하는 데는 장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이라면 바로 충분한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익을 빼내는 것이 가능하고 최악의 순간에도 손절매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주가가 올라도 그 주식을 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정보가 틀려서 인텔의 3분기 실적이 예상보다 나쁘고 마이크론의 애플턴 회장의 한국을 방문하지 않아도 주식을 팔지 못해서 끝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두 정보가 모두 빗나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 보죠.”

곧바로 나는 하성철과 함께 가이닉스 주식거래에 참여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성철은 이미 한국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W&R의 지사를 이끌고 있었고 내가 하성철이 이끄는 팀에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한 것이었다.

2.

정보는 맞았다.

정확한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토요일 열린 타이완 입법원 선거에서 천수이볜이 이끈 이 민진당은 초반에 무려 20석 가까운 의석을 더 확보했다.

하지만 민진당보다 의석수를 더 많이 늘린 것은 신생정당인 친민당이었다.

2000년에 생긴 친민당은 선거 전에는 의석수가 한 석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의석수는 있었지만 그건 국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무려 최소 46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반면 선거 전에 114석이었던 국민당은 68석으로 46석이나 잃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민진당의 승리라기보다는 국민당의 패배였다.

지난 총통선거의 재탕이었다.

친민당의 당수인 쑹추위는 국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다가 지난 총통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왔었다.

기존 국민당의 표는 쑹추위와 국민당의 후보였던 렌잔으로 분열되었고 결국 타이완의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뤄 냈다.

그 일이 이번에도 반복된 셈이었다.

민진당은 여전히 225명인 입법원 과반인 113석에는 모자라지만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월요일이 시작되자 타이완의 증시는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총통인 천수이볜과 가깝다고 알려진 에버그린 그룹의 주식이 상한가까지 올랐다.

나는 에버그린 해상의 주가가 상한가까지 오르자 홍콩에 전화를 걸어서 매각했는지 확인했다.

- 상한가에 오르자마자 바로 팔았어요. 좀 아쉽게는 하네요. 지금 기세라면 더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타이완은 상한가까지 올라도 겨우 7%라니······.

장샤오이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다른 주식에서 그 아쉬움을 만회하면 되죠. 반도체 주식 중심으로 매입해 주십시오.”

-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인텔 실적 발표가 오늘 밤이던데······.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처럼 실적이 괜찮은 것이 맞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이번 주 발표될 산업생산지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 다행이네요.

“듣자니 인도네시아는 경제지표가 좋지 않지만 싱가포르 쪽은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더군요.”

- 그래요?

장샤오이가 물었다.

“예. 바쁘신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나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 알려 줬으면 장사오이도 싱가포르에서 꽤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와의 거래 외에도 실적을 어느 정도는 올려 줘야 장샤오이의 자리가 더 확고해질 수 있었다.

지난 주말과 일요일 타이완에서만 좋은 소식을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하성철이 급하게 내 자리로 찾아왔다.

“팀장님의 그 정보가 정확했네요. 일요일 한국을 방문한 마이크론의 애플턴 회장이 오전에 가이닉스의 대표와 함께 두 회사 간의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디램 시장에서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38%가 넘던가요?”

“예. 디램 시장은 수요 부족으로 가격이 하락한 상태이니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회사가 전략적 제휴를 통해서 공급량을 조절한다면 가격을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겁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나 블룸버그 통신에서는 세계 경기가 바닥을 찍고 회복하고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더군요. 만약 전망이 사실이라면 이번 제휴는 두 회사에 모두 큰 이익이 되겠죠.”

우리 둘의 시선은 가이닉스 창으로 모였다.

“오늘은 특히 더 미쳤네요. 이미 거래량이 2억 주가 넘었네요. 이런 추세라면 오늘 5억 주가 넘게 거래되겠는데요. 거래 대금도 1조 2천억은 넘겠고요.”

현재 가이닉스의 시가총액은 2조 4천억 정도였다.

그런 회사의 하루 주식 거래 대금이 1조 2천억 원이라는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한국에 온 지 몇 달 됐는데도 가이닉스 주식 거래 창을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그나마 주당 2천 원 선이 회복되어 거래소 비중이 0.8%가 되지만 한때는 비중이 0.1%도 되지 못했던 때도 거래량은 절반이 넘었으니까요.”

“도박판이라니까요. 특히 한국에서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이라는 것이 보급되면서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더군요.”

이야기를 나누던 하성철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같은 전문가들이야 나쁠 것이 없죠. 주식을 싸게 팔아 주고 비싸게 사 주고······. 최악의 순간에도 물량을 받아 내 줄 분들인데요.”

한마디로 하성철에게 한국의 개인 투자자라는 존재는 호구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별로 동정심은 가지 않았다.

주식시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더구나 저들은 누가 억지로 전쟁터로 떠밀려 온 사람들도 아니었다.

스스로 전쟁터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전쟁터에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이 뛰어든 상대에게 자비나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3.

엘리어스와 지난번 만났던 바에서 다시 만났다.

토요일 저녁이라서 그런지 지난번과는 달리 사람이 꽤 많았다.

술집 여기저기에서 오늘 낮에 있었던 월드컵 조 추첨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축구 좋아하십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저는 별로······.”

“저는 좋아합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주변에서 축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쭉 운동하기는 했지만 그건 내 나름의 이민자로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이었다.

특히 미국에서 축구를 하는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자나 하는 스포츠라거나 남미나 아시아계가 주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이민 2세라는 한계를 벗어나려는 나에게 축구는 별로 도움이 되는 운동이 아니었다.

“이번 월드컵에는 16강에 올라가야 하는데 조 편성 때문에 조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포르투갈 같은 강팀도 문제지만 한국은 개최국 아닙니까. 그나마 폴란드 하나가 만만한데······. 예선에는 두 개 팀만이 올라가니 걱정입니다. 한국전이 이번 월드컵 16강 진출에 가장 중요한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낮에 정윤호가 폴란드와 미국을 그나마 상대할 만한 팀이라고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났다.

정윤호도 미국전을 가장 중요한 경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이왕이면 한국과 미국 두 나라가 올라갔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좋겠지만 포르투갈에는 그 피구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배신자 피구는 싫어하지만, 그 실력만은 뭐라고 할 수 없는 선수입니다. 피구가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한참 동안 축구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나의 잘못은 잘못된 시기에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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