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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 자리에 사람이 맞춰야 할 때도 있다
1.
단테 패트릭과 헤어지고 나는 일단 한국으로 귀국했다.
생각 같아서는 곧바로 홍콩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추적을 피하고자 일본에 입국할 때 차명으로 된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홍콩에 입국할 때는 원래 내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
내 출입국 기록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홍콩에는 많았다.
나는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특히 이 사무실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한국에 한동안 머무실 생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만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실제 거래에 들어가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요.”
“실제 매매야 돈만 주면 잘하는 사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에드릭 님 같은 분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 그게 좋을 것 같아서요. 특히 리안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처리할 일도 있고 내년 독립을 대비하자면 저보다는 리안이나 카이 황 씨가 회사 전면에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입니다. 특히 제가 홍콩에 계속 남아 있으면 리안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옆에서 잘못 모신 결과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제가 예전부터 리안에게 되도록 맡기려고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 리안에게 말했던 것처럼 점점 W&R과 같이하는 일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리안의 조직 장악력을 높이려는 것도 있죠.”
이건 홍콩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리안을 내 정체와 사업을 보호하는 방패로 이용하기 위한 사업적인 판단이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군요?”
카이 황이 물었다.
“리안에 대한 내 개인적인 배려도 있죠. 리안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움츠러들고 소극적으로 행동하고는 하더군요.”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 중국 상하이방과의 갈등으로 한순간에 영향력을 잃고 홍콩을 떠났던 것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문을 자신이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도 부담을 느끼고 있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리안의 이런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리안은 능력도 뛰어났고 홍콩 내에 많은 재산과 선대로부터 내려온 인맥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곁에서 리안을 카이 황 씨께서 많이 도와준 덕분이고도 하고요.”
“지금까지라면 앞으로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카이 황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내년에 W&R의 간판이 되어야 하니까요.”
지금 대표인 카이 황도 능력이나 인맥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리안 가문의 가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카이 황은 리안 가문의 가신이자 대리인이었다.
이런 인식은 굉장히 바뀌기 어려웠다.
카이 황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들에게 그는 리안 가문의 가신이었다.
차라리 리안이 아버지와 함께 홍콩을 떠났으면 가신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안은 여전히 홍콩에 남아서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설사 리안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고 반대로 카이 황이 독립해서 성공했다고 해도 홍콩 상류층들은 카이 황을 여전히 리안 가문의 가신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낙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반정에 성공해서 왕을 갈아 치운 반역자들이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도 전대 왕조의 왕족들을 멸족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카이 황이 이런 이미지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리안 가문이 홍콩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카이 황은 리안과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이 더더욱 카이 황이 가진 리안 가문의 가신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결정적으로 카이 황 본인이 리안 가문의 가신이라는 직책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설사 계속해서 카이 황이 대표를 맡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W&R의 상징적인 존재는 리안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리안에게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바뀔 시간을 주고 싶지만 그게 어려워졌습니다. W&R이 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내년 여름 우리 팀이 독립할 시점에는 지금보다 W&R의 규모가 커져 있겠죠.”
기업이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되면 그 자체로 지역사회와 국가에 영향을 주게 된다.
더구나 그게 거대 금융 기업이라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실제 영향은 더 클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선물이나 주식에만 투자한다면 현재의 리안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W&R의 규모가 단순히 주식시장에서 처리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다른 투자회사들처럼 개별 선물이나 주식시장이 아닌 기업 그 자체에 투자해야 할 시점이 오겠죠. 그러
자면 대표가 나서서 이런 일을 진두지휘해야 해야 하고요.”
“리안은 아직 그럴 준비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리안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옆에서 카이 황씨가 도와주시면, 제가 아는 리안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네요.”
카이 황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2.
카이 황과 리안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리안과 조민을 카이 황의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리안이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홍콩에는 언제 온 거야?”
“막 도착했어.”
“홍콩에는 무슨 일인데?”
“네가 한 이야기 때문에 온 거지.”
“엔저?”
리안이 고개를 돌려 조민을 바라보았다.
“맞아.”
“확인한 거야?”
리안이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들었는데 네 말대로 엔저가 현실화할 것 같아.”
옆에서 듣고 있던 조민이 끼어들었다.
“정말요? 어느 정도나 지속할 것 같아요?”
“최소 내년 초까지는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더군요.”
“내년 초요? 그럼 단순히 엔론 파산 때문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네요.”
조민이 말했다.
“그렇다고 보더군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사실상 일본 정부 방침이라고 합니다.”
단테 패트릭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환율 시장 개입을 별로 숨길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환율 조작으로 시세 차익을 보려는 투자자가 아니었다.
다른 경제정책도 마찬가지지만 환율 정책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시장 참여자들이 정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투자자들이 엔저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시세차익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비용은 비용대로 나가면서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엔화 하락 폭이 작더라도 주식시장에 영향은 바로 나타나겠네요.”
조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일본 정부가 엔화 평가절하에 나선다고 해도 그 실질적인 영향력이 나타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다른 경제정책과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선물이나 주식시장에는 영향은 곧바로 나타난다.
“그럼 한국 주식시장은 다음 주에도 하락할 가능성이 크겠고······ 일본은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지난주에 닛케이 지수가 0.8% 오르기는 했지만 크게 의미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차이고요.”
“글쎄요. 일본 닛케이 투자는 조민 씨에게 넘긴 지 꽤 됐고 엔저를 조사하느라 주식시장에 대해서는 조사를 못 해서요. 특별한 재료가 없는 이상 이번 주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롱 포지션을 잡든 숏 포지션을 잡든 큰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하긴······. 엔저가 현실화하더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몇 주 전부터 닛케이 지수는 횡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닷컴 버블기와 붕괴기 그리고 올해까지 주식시장이 등락이 심했던 것이었다.
일주일에 미국이나 유럽 일본 같은 규모가 큰 주식시장에서 일주일에 1%로 이내로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엔화를 평가절하하려는 일본 정부 방침이 알려지면 큰 충격을 받을 한국이나 타이완 그리고 홍콩의 주식시장과는 달리 정작 일본 주식시장에 줄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이미 일본 경제는 오랜 시간 무기력한 상태였고 이 정도로 활력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모였으니 다음 주 투자 회의를 여기서 지금 하는 것은 어때?”
“여기서? 지금?”
“어차피 투자 회의라고 해 봐야 여기서 브레이크 하나 더 있는 것이잖아.”
“브레이크를 이 자리로 부르면 되나?”
“브레이크는 지금 일 때문에 독일에 가 있어.”
“독일에는 왜?”
“그게······.”
리안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브레이크가 투자한 회사 중 하나가 유령 기업이었다나 봐.”
리안이 말했다.
나는 리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령 기업? 유령 기업에 어떻게 투자했다는 거야? 직접 투자를 했다는 말이야?”
브레이크는 지수 독일 선물과 주식에 나눠서 투자하고 있었다.
어떻게 유령 기업에 투자했다는 것인지?
“참 이게 나도 듣고도 황당했는데······. 러시아 회사 중에 뉴웩스라는 기업이 있나 봐. 그 기업 주식이 독일 지방 작은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었고, 브레이크는 거기에 투자한 거지.”
러시아 기업 중에는 해외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이 꽤 있었다.
특히 얼마 전까지 러시아가 경제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자금을 투자받기 위해 러시아 정부도 자국 기업의 해외 주식시장 상장을 장려했다.
아마 브레이크가 그 기업 중 하나에 투자한 모양이었다.
브레이크는 얼마 전까지 러시아 전문가였으니 자신에게 익숙한 기업에 투자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독일에 상장된 러시아 기업에 투자한 거잖아? 그게 왜 유령 기업에 투자야?”
주식시장, 그것도 해외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이 유령 회사라니?
“그 뉴웩스라는 러시아 기업이 알고 보니 유령 기업이었다더라고······.”
“러시아의 유령 기업이 러시아 주식시장도 아니고 독일 주식시장에 상장됐다고? 아무리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지방 주식시장이라지만 그게 가능해?”
기업이 다른 나라의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아무리 지방의 군소 주식시장이라고는 하지만 그 철저하다는 독일에서 유령 기업이 상장되고 거래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말했잖아, 황당한 사건이라고······. 듣고 보니 이해는 안 되는 데 있을 수도 있는 일이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유령 기업 주식이 다른 나라 주식시장에서 주식이 거래됐는데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고?”
“브레이크에게서 어제 전화가 와서 들었는데 뉴웩스라는 기업이 처음부터 유령 기업은 아니었다고. 독일 주식시장에 상장될 때는 실체가 있는 기업이었고 나름 철저하게 조사하고 상장시켰다고······.”
“그럼 나중에 유령 기업이 됐다는 말이야?”
“맞아. 뉴웩스가 러시아에서 부도가 나고 사라졌는데 독일 주식시장에서는 거래가 된 거야. 부도가 난 이후에 거래가 오히려 활발해지고 가격이 오히려 올랐다더군.”
“브레이크는 그 주식을 선거고?”
내가 물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해가 얼마나 되는데 브레이크가 독일까지 간 거야?”
“어마 안 돼. 10만 달러 정도던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 전 확인했을 때 브레이크가 운용하는 투자금 규모는 1억 8천만 달러였다.
“문제는 브레이크의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 것 같더라고. 러시아 전문가인데 완전히 사기를 당한 셈이니까. 더구나 그 주식을 사라고 권한 사람이 브레이크와는 꽤 오래 알던 사이라고······.”
리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