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 175. 큰소리로 협박하는 사람은 겁쟁이뿐이다
1.
투자 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경기가 여전히 침체인 상황이었다.
엔저에 시장 반응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세계 증시 대부분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지난주까지 많이 상승한 타이완 주식과 한국의 반도체 주식도 정리했다.
대만 증시 전체가 이주 사이에 거의 20% 이상 올랐고 특히 투자한 반도체 관련 기업은 30% 이상 오른 일도 있었다.
아무리 인텔과 시스코의 실적이 개선되고 마이크론과 가이닉스의 전략적 제휴가 성과를 거둔다고 해도 상승률이 너무 가팔랐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는 회사에 출근하며 팀장 자리를 리안에게 넘길 준비를 했다.
외부적으로는 리안에게 팀장을 넘기고 한국으로 파견 가는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이런 인사 조처가 발표되면 여러 가지 말이 나올 것이다.
최근 우리 팀은 류오린은 물론이고 홍콩 금융가에서 꽤 알려져 있으므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한국계인 내가 한국으로 파견 간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이 나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리안이 드디어 전면에 나선다고 생각할 것이다.
류오린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리안에게 밀려서 한국으로 쫓겨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W&R의 투자금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그 투자금을 관리하는 팀으로 소문이 나면서 너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자주 홍콩을 비웠으니 망정이지 아마 계속 홍콩에 머물렀다면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고 CIA에 근무하는 상황에서 유명해지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다.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늘어날 뿐이었다.
2.
나는 회의가 끝나고도 홍콩에서 떠나지 못했다.
리안에게 팀장직을 넘기는 류오린의 인사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인사 명령이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카이 황에게 물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요?”
“에드릭 님이 팀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기회로 봤는지 팀장을 욕심내는 사람들이······. 특히 중국 본토 쪽에서 팀장을 자신들 쪽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게 안 된다면 팀원이라도 보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1팀과 2팀의 팀장이 본토 쪽이니 팀장은 자신들도 무리라는 사실을 알 테고 결국 팀원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네요.”
“맞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리안이 류오린의 대주주 중의 한 명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류오린의 인사 결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많은 지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류오린의 지분 절반은 중국 본토 소유였다.
왕웬준, 웬지하오, 장샤오이에서 보듯이 중국 본토 지분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계파에 따라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홍콩 부호들이 나누어 가진 절반의 지분에 비하면 의견 통일이 잘되는 편이었다.
“중국 본토 쪽에서 보내오는 직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W&R의 의사와는 달리 직원을 억지로 팀에 보내면 두 회사 사이의 계약을 파기한다고 통보하세요.”
어차피 류오린과의 결별은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까지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3.
리안이 급히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굉장히 다급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봐!”
리안은 벽에 걸린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렸다.
CNN에서는 긴급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보이는 무장 괴한들이 인도 국회의사당을 공격해서 1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지난 몇 주간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건 전혀 상황이 달랐다.
인도는 의원내각제 국가였다.
그런 나라의 국회의사당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상대의 심장부를 공격한 것이었다.
인도 처지에서 보면 미국이 당한 911 테러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어떡하냐? 파키스탄 투자 협상 진행되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냐?”
이미 몇 주간 카슈미르에서 두 나라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벌이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와 파키스탄은 적대 국가였다.
“네 생각은 어때?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대규모 전쟁만 이미 세 번이나 치른 사이잖아. 가깝게는 1998년 벌어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잖아.”
지금 파키스탄의 독재자인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당시 군 참모총장이었던 자신을 해임하려는 총리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998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는 이미 핵 개발을 마친 상태였고 어느 정도 실전 배치도 끝난 상태였는데······. 만약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이건 세계에서 최초로 핵보유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잖아.”
“쉽게 핵을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그러니 하는 말이야. 네 생각은 어때? 이 정도 일로 전쟁이 벌어질까?”
국회의사당이라는 상징성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자는 13명에 불과했다.
이번은 국회의사당이었지만 인도, 특히 카슈미르 인도 점령 지역에서는 테러는 흔한 일이었다.
“사망자는 적지만 테러가 전쟁의 명분이 된다는 사실을 지금 미국이 보여 주고 있잖아.”
지금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 중이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명분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가 알 카에다를 숨겨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유는 사실 예전이라면 전쟁을 벌이기에는 무리한 명분이었다.
미국도 현재까지는 알 카에다를 테러의 배후라고 주장할 뿐 탈레반을 911 테러의 배후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밀어붙이고 동맹국을 그 전쟁에 끌어들이고 무슬림 국가들의 반발을 누른 것이 바로 미국의 힘이었다.
“지금 미국은 테러를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이 명분에 따르면 인도는 파키스탄을 군사 공격할 충분한 명분을 가진 셈이지.”
“그래도 인도 정부도 파키스탄이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설마 전쟁까지 갈까?”
“자국에 대한 테러를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이니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힘의 우위가 확실하면 현재 상황에서는 가능한 일이기도 하잖아. 너도 알다시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력 차이는 꽤 크고 말이야. 이미 지난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기기도 했고······.”
파키스탄도 객관적으로는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약한 나라는 아니었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였고 핵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파키스탄의 경제력을 압도했고 역시 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특히 인도는 내년 초에 의회 선거가 있어. 지금 인도 집권당은 인도 국민회의와 비교하면 호전적인 힌두교 정당이기도 하고······.”
민주주의적인 선거로 정치 지도자를 뽑는 나라에서 선거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행사였다.
“하긴 다른 때라면 불가능한 일도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는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홍콩에 사는 나로서는 남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리안이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재선이 확정된 둥칭화 홍콩 행정장관을 생각하는 듯했다.
홍콩은 그전에도 자신의 손으로 홍콩 총독을 뽑은 것은 아니었다.
“네 말대로 평상시라면 아무리 지금 인도 집권 여당이 호전적이라고 해도 핵보유국이자 현재 미국과 협력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일 생각은 하지 않겠지. 그렇지만 인도는 의회 선거를 앞두고 있고 내가 알기로는 몇 달 전 지방선거는 집권당의 참패로 끝났어.”
“핵보유국 사이에 전쟁이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홍콩에서는 꽤 떨어져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주 먼 나라는 아니었다.
“투자 포지션을 다 하락으로 바꾼 것이 다행이네.”
리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넌 내가 파키스탄 투자에 대해 걱정하니 지금이 투자를 이야기할 상황이냐고 하더니······. 너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냐?”
“넌 투자를 아직 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우리는 이미 투자를 했고······. 완전히 상황이 다르지.”
“다르기는 뭐가 달라!”
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4.
리안이 돌아가고 얼마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블랙베리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의 이반 부카드였다.
나는 보안 처리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오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마지막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 나야 뭐 그렇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잘 지내는 거죠.”
- 내가 연락한 이유는 말이야.
“혹시 인도에서 일어난 테러 때문입니까?”
- 역시 바로 아는군. 그 일 때문이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무슨 도움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 지금 파키스탄으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도 지금 파키스탄 카라치로 와 줬으면 하네. 정확한 장소는 내가 알려 주지.
내키지 않았다.
지난번 일도 그렇지만 지금 파키스탄은 전운이 감도는 상황이었다.
“정식으로 본부에서 내려온 명령입니까?”
- 본부를 통해서 연락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네.
“그럼 정식 명령도 없는 거네요?”
- 시간이 없네. 자네라면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텐데?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가 파키스탄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바빠서요.”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반 부카드가 다른 요청을 해도 꺼릴 상황인데 나보고 전쟁, 그것도 핵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파키스탄으로 오라니······.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자네 개인적 감정으로 이런 중요한 일을 외면하겠다는 건가? 나중에 이 책임을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나.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꽤 날카로웠다.
마치 협박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이 상황에서 협박을 해 봐야 내가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항상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뿐이다.
지금 이반 부카드가 하는 협박은 그가 당황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중요한 일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희 팀 사정도 있는데 무조건 업무 지원을 하라는 요구 자체가 무리한 요구죠. 외부 팀이 외부 팀인 이유가 있는 건데요.”
- 자네 팀은 CIA 아시아 지부 소속 아닌가? 이 일은 현재 아시아 지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네.
“뭔가 잘못 아시고 계시네요. 저희 팀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지 어디 지부 소속은 아닙니다. 본부 직속이죠. 더구나 설사 아시아 지부 소속이라고 해도 저희 팀이 CIA 아시아 지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여할 수도 없지만 관여해서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이반 부카드는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단번에 자신의 요구를 거절할 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만약 내가 외부 팀이라는 위장을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CIA는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이었다.
보수적인 게 당연했다.
국가 안보를 지키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검증된 안전한 방법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기존에 하던 일을 하고 기존에 하던 장비를 쓰고 기존의 시스템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007 시리즈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장비를 받고 실전에서 사용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국가 안보는 고사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데 검증되지 않은 장비를 어떤 미친 요원이 쓰겠는가?
뭐······.
영화 속에서 보이는 제임스 본드는 요원으로서는 미친 것이 맞기는 하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 정말 안 되겠나?
“제가 필요하면 자료를 가지고 직접 저를 찾아오시죠. 제가 현장 요원도 아닌데 굳이 파키스탄까지 갈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예전이야 내가 찾아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내가 외부팀으로 활동한 지도 1년 정도가 지났다.
이제 나도 내 가치를 알고 있었다.
더 급한 사람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