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75화 (176/270)

(175)

#  176화 누구의 편도 아니다.

1.

필리핀 마닐라.

나는 서둘러 필리핀까지 와야 했다.

나는 리코를 통해서 구한 안가에서 이반 부카드를 만나야만 했다.

이반 부카드가 진짜로 나를 찾아온다고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가 직접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찾아온다고 하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반 부카드는 냉전 시대를 거치고 중동에서 잔뼈가 굵은 요원이었다.

그가 나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렇다고 이반 부카드를 홍콩이나 서울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에게 익숙하고 리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인적 물적 자산을 동원할 수 있는 필리핀 마닐라가 내가 선택한 장소였다.

주위를 둘러본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마닐라로 부를 줄은 몰랐는데? 엘만도 자네가 여기 마닐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경험 많은 이반 부카드가 내가 진짜로 여기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이번 만남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내가 여기에 진짜로 사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반 부카드를 내가 사는 곳으로 오라면서 알려 준 장소가 필리핀 마닐라라는 사실이었다.

내 입으로 내가 여기 살지 않는다고 말하면 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CIA 필리핀 지부는 상관없는 일이라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선배님도 다른 나라에 가거나 다른 나라에서 작전할 때 그곳 지부에 모든 사실을 알리시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여기 오실 때 필리핀 지부에 연락하셨습니까?”

나는 내가 마치 진짜로 필리핀에 머무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자네에게 묻기 전에 그럴 수야 있나. 어쨌든 나도 알리지 않은 셈이군. 하긴 나라면 자네가 몰래 자카르타에 머문다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엘만 지부장은 다를지도 모르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내가 자신의 지시를 거부하고 마닐라까지 오게 한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불만을 드러냄으로써 내가 부담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가 마닐라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필리핀에서 작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만약 필리핀에서 작전했다면 엘만 지부장님께는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이반 부카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약점을 잡히느니 차라리 나에게 빚을 진 엘만 지부장에서 빚을 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여기는 필리핀 마닐라였다.

이반 부카드가 내가 여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2.

“일 이야기나 하지.”

당장 이 일로 약점을 잡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이반 부카드가 말을 돌렸다.

“좋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최근 일어난 친 파키스탄 카슈미르 단체의 인도 의회 테러 때문이네. 당장 내일이라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핵보유국 사이의 전쟁이라니······. 끔찍한 일이지. 더구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안정화에는 파키스탄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인 상황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정확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일단 인도에서 지목한 단체들은 자신들의 짓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던데요?”

“헛소리야! 그자들은 당장 10월에도 카슈미르 지방 정부 의회를 지금과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했어. 알카에다가 911테러를 저지른 것만큼이나 이번 일이 그자들의 짓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목적은요?”

테러는 고도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행동이었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테러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뭐긴 뭐겠나? 이번에 테러를 저지른 단체들은 카슈미르의 주권을 파키스탄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네. 최근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국지적인 전투가 진행되고 있으니 인도의 심장부를 공격한 거지.”

카슈미르는 이슬람교도가 전체 인구 중 85% 이상인 지역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진 이유가 종교라는 것을 생각하면 카슈미르는 파키스탄 일부가 되는 것이 맞았다.

문제는 영국이 물러가는 과정에서 국경선을 카슈미르가 갈라졌다는 것이었다.

현재 카슈미르 지역 중 65%는 인도가 지배하고 있고, 나머지는 파키스탄과 중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파키스탄(Pakistan)의 국명 중에서 K가 바로 카슈미르를 상징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 물러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인도도 어쨌든 자신들이 차지한 영토를 파키스탄에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자네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반 부카드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번 일을 저지른 단체들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목적입니다.”

“······.”

“설마 파키스탄에서 그것도 카슈미르의 친 파키스탄 단체가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눈을 피해서 인도 국회를 공격했다는 말을 제가 믿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파키스탄 군 정보부(ISI)는 파키스탄군 소속의 정보기관이었다.

파키스탄 군 정보부는 카슈미르에서 활약하는 테러 조직과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 정보부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조직이 인도 국회를 공격하는 것을 모를 정도로 허술한 조직이 아니었다.

파키스탄은 군사력이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군사력만으로는 조사에 따라서는 세계 20위권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파키스탄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군사 강국이었다.

지난 세 번의 인도 파키스탄 전쟁에서 항상 패배하는 것은 파키스탄이었다.

그리고 그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매번 승리하는 인도를 군사력으로 압도하는 국가가 중국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 군 정보부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현재의 알카에다 모태인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미국 CIA와 함께 키운 것이 바로 파키스탄 군 정보부였다.

얼마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탈레반도 바로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이런 파키스탄 군 정보부가 장악하고 있는 카슈미르 테러단체가 인도 국회를 향해 테러를 저질렀다.

파키스탄 군 정보부가 이런 공격을 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했다.

3.

“역시 자네는······.”

이반 부카다가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전임 사령관 해임에 대한 항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전임 사령관이 해임된 것이 911테러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였던가요?”

“맞네. 911 테러범 중 한 명에게 사에드라는 자를 통해서 10만 달러가 송금됐는데, 이 자금 출처가 바로 파키스탄 군 정보부라는 사실일 밝혀졌네. 군 정보부 사령관의 지시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는데 사에드라는 자가 현재 잠적한 상태라서 그 이상은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네.”

이반 부카드의 말대로라면 파키스탄 군 정보부가 911테러에 자금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사령관이 사에드라는 자에게 10만 달러를 준 이유는 조사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좀 복잡해. 파키스탄군 정보부는 사에드가 자신들의 요원이지만 본래는 영국 비밀정보부의 요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네.”

“영국 비밀정보부요?”

나는 갑자기 나온 영국 비밀정보부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국 비밀정보부······.

흔히 MI6라고 불리는 영국의 첩보 기관으로, 바로 007 제임스 본드가 소속되었던 것으로 유명한 조직이었다.

911테러에 관여한 자가 영국 첩보기관 소속이라니?

이건 무슨 의미인가?

“파키스탄 군 정보부는 사에드가 런던정경대에 다닐 때부터 비밀정보부에 소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실인 것 같더군. 그리고 최근에 알려진 일이지만 사에드는 우리 CIA하고도 관련이 있더군.”

MI6, ISI, CIA와 관련이 있고 심지어 911테러와도 관련이 있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혼종이라는 말인가?

문득 나는 사에드와 런던정경대라는 이름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혹시 그 사에드가 93년 인도에서 미국인과 영국인을 납치했던 그 사에드 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나?”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90년대 초에 영국에서는 꽤 유명한 일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대 재학생이 인도에서 납치범이 됐으니까요.”

런던정경대는 영국에서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비슷한 위상을 가진 대학이었다.

더구나 사에드는 내 기억이 맞다면, 부모가 파키스탄 출신이기는 했지만 정작 본인은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런 장래가 보장된 엘리트가 뜬금없이 인도에서 여행객을 납치했다가 감옥에 갇힌 사건이었다.

언론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말대로 작전 일부였을 것이다.

그게 영국 비밀정보부의 작전이었는지 아니면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작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CIA의 작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학을 다닌 사에드라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정보기관 세 곳을 농락한 일이 이해가 되었다.

“어쨌든 그 일로 파키스탄 군 정보부의 사령관은 불명예제대를 당하고, 우리 쪽에서 꽤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네.”

“테러와 관련됐다는 혐의는 밝혀내지 못했나 보군요.”

“맞아,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상대는 악명 높은 파키스탄 군 정보부 사령관이야. 연결 고리인 사에드는 어디에 숨었는지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증거도 증인도 없고 말이야.”

만약 파키스탄 군 정보부와 911 테러 사의 연관성 밝혀졌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지금처럼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인도 국회 테러는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이 뜻이 아니라, 파키스탄 군 정보부 일부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말이군요.”

“맞네.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로 당선된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인정과 정권의 안정을 위한 경제 안정이 절실하네. 그걸 우리는 줄 수 있지. 파키스탄 내 반대 여론에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돕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인도 국회에 테러를 지원할 이유가 없지.”

파키스탄 군 정보부는 예전부터 파키스탄 내에서 대통령이나 총리는 물론이고, 군 참모총장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파키스탄 내 또 하나의 정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아마 이번 테러는 사령관의 해임뿐 아니라, 군 정보부가 키운 것이나 다름없는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항명일 것이다.

인도와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 파키스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으니.

“상황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자네가 잘하는 정보전과 여론전이지. 지금은 파키스탄 정부나 인도 정부 누구도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네.”

무샤라프 대통령으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한 것으로 국내 여론이 나빠진 상황이었고, 인도 역시 내년에 선거를 앞둔 상황이었다.

국내 여론만 생각하면 인도를 물러나게 하기가 쉬웠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파키스탄 내 여론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도가 양보하는 것은 당장 미국 정부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설사 인도를 압박해서 전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인도가 테러를 당하고, 그 테러범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이 탈레반 정부에 오사마 빈 라덴을 요구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만약 인도가 물러난다면, 그건 미국이 명분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여론이 생길 수가 있었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가 양보할 명분을 만들라는 말씀이군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인을 제공한 것은 파키스탄이니까.”

“CIA에서 파악한 파키스탄 군 정보부 위장 요원 명단이 있습니까? 되도록 외부에는 군 정보부 소속이 비밀인 인물이면 좋겠는데요?”

“잠시만 기다려 보게.”

이반 부카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잠시 후,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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