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 177화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한 번뿐이다.
1.
“여기는 다니엘 펄(Daniel Pearl)이라고 하네. 월 스트리트 저널 동아시아 지부장이네.”
“다니엘 펄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기자분이시라고요?”
나는 고개를 돌려 이반 부카드를 바라보았다.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하는 요원이네. 지금은 인도 델리에 머물면서 파키스탄에 숨어 있는 911테러에 관여한 자들을 추적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아까 말했던 사에드는 물론이고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halid Sheikh Mohammed) 같은 자들 말이야.”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라면 911테러를 계획했다고 알려진 인물 아닙니까?”
“맞아. 실행은 알카에다가 했지만, 작전을 계획한 것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지.”
“대단한 일을 하시는군요. CIA의 외주를 받아서 일하고 있는 수이진이라고 합니다.”
후사인은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뵈니 반갑습니다.”
“제 이름을 들으셨다고요?”
“CIA 아시아 지부에서 일하면서 에이전트 에스 팀과 그 팀을 대리하는 수이진 씨를 모르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내가 가 본 적도 없는 인도까지 내 가명이 알려졌다니······.
부담스럽고 불안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반 부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자네에 대한 보안 등급이 올라가서 어지간한 보안 등급으로는 자네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네. 여기 있는 다니엘 펄은 특수한 경우라서 알고 있는 것이고 말이야.”
믿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별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보안 등급이 오른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그전에는 당연히 아무런 보안 등급에 제한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에이전트 에스 팀에 대한 정보에 보안 등급이 있는 지금 상황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이엘 펄의 말대로 아시아에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이름을 아는 요원은 없다고 봐야 했다.
“명단이나 보죠.”
내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워졌다.
“여기 있습니다.”
다니엘 펄이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전화를 받고 서류를 따로 분류해서 가져온 듯했다.
나는 요원들의 명세를 빠르게 살핀 나는 서류를 일단 내려놓았다.
“어때, 방법이 있겠나?”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내가 내려놓은 서류에 가 있었다.
2.
“몇 가지 방법이 생각나기는 합니다.”
“몇 가지나? 말해 보게.”
“우선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 정부가 나서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일단 당장 전쟁의 발발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설득한다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도와 파키스탄 지도부 모두 전쟁을 원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핵을 사용하지 않고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인도의 압승이었다.
국경이 맞닿아 있어 지상군 파견이 쉽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쉽게 끝날 수도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국력은 그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파키스탄군 군 참모총장이었고, 1998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패한 경험이 있었다.
인도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에서 파키스탄과 전쟁하는 것은 인도에 얻을 것이 없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전쟁 명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 파키스탄에는 다국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인도가 파키스탄과 전쟁을 하게 되면, 자칫 이 다국적군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더구나 의도가 무엇이든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방해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전쟁에서 이긴 후에 대책이 없다는 부분이었다.
두 나라 사이의 과거와 감정을 생각하면,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인도가 파키스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안정화를 위해서 지출한 금액은 최소 20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예상되었다.
인도가 아무리 경제력이 나아졌다고 해도, 인구 1억 7천만 명이 넘는 파키스탄을 인도가 안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전쟁에 이기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이겨서 무샤라프 다음 대통령이 탈레반의 오마르 같은 이슬람 과격파가 될 가능성이 컸다.
“인도와 파키스탄 국내 여론이 나쁜데 두 나라가 미국 말을 듣겠나?”
이반 부카드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당연히 두 나라에 휴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죠. 시간을 두고 충분한 지원을 한다면 인도와 파키스탄 두 국민도 상황을 받아들일 겁니다.”
“문제는 돈이군. 그렇지 않아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안정화에 들어가는 예산을 생각하면 의회에서 추가 지출 표결이 통과돼야 하는데······.”
전쟁은 말 그대로 돈을 먹는 하마였다.
지금 미국이 하는 방식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안정화에 추가로 들어갈 자금도 막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떻게 미국 국민의 합의와 의회에서 예산 지출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911테러를 통해 미국인이 받은 충격과 분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인도 파키스탄 전쟁을 막는 데까지 추가 지출을 하는 것은 백악관에 정치적 부담이었다.
말을 하던 이반 부카드의 시선이 내가 내려놓은 서류에 다시 향했다.
3.
“자네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서류를 요청한 것 아닌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역시 그랬군. 그 방법이 뭔가?”
“솔직히 말해서 파키스탄 국민을 설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까는 분명히······.”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파키스탄 국민을 설득할 명분이 필요하다고 말했죠. 하지만 까놓고 무샤라프 대통령이 파키스탄 국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샤라프는 독재자였다.
그것도 3년 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력을 장악하고, 올해 여름에는 대통령을 물러나게 스스로 대통령직에 오른 독재자.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여론을 신경 써야 하는 인도의 총리나 집권당과는 처지가 달랐다.
나는 이반 부카드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독재자들도 국민의 여론을 신경 쓰기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기관의 장악이죠. 파키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기관은 파키스탄군 정보부이고요.”
“더 말해 보게.”
“이번 일은 그 파키스탄군 정보부 일부가 무샤라프의 지시를 어기고 벌인 일입니다. 사령관 해임과 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도운 것에 대한 정보부의 항명이죠. 정보부 전체가 가담한 일은 아니겠지만요.”
“그렇기야 하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테러가 목적이 인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는 파키스탄이 다국적군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돕는 것을 막는 것이겠지만, 다른 숨겨진 목적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숨겨진 목적이라면 어떤 목적이 있다고 말인가?
“인도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패전한다면 무샤라프 대통령이 버틸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
현대에 와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무너진 경우는 대부분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경우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군사정권이 그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그랬다.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수십 년간 굳건하던 군사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금 파키스탄 분위기에서 무샤라프가 제거된다면 다음에 정권을 잡은 자는 이슬람 과격파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네는 이번 테러 배후에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관련된 자들이 있다는 생각하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돌려 다니엘 펄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니엘 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테러에 관한 한 천재입니다. 알카에다 내에서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지난 10년간 알카에다가 저지른 굵직한 테러에는 모두 그가 배후에 있습니다. 세이드도 MI6를 감쪽같이 속일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고요. 만약 소문처럼 오사마 빈 라덴이나 탈레반의 오마르가 파키스탄에 이미 잠입한 상태라면······.”
다니엘 펄이 말을 흐렸다.
지금은 미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나 오마르 모두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아무리 막대한 재산이 있다고는 하지만, 10년 만에 알카에다라는 가공할 테러 단체를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탈레반의 오마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해도 탈레반을 결성하고 몇 년 만의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소련이 10년이 넘는 동안 군사력을 쏟아 붓고도 하지 못한 일을 단 몇 년 만에 해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전략가들이었다.
“시간을 주면 안 되겠군.”
이반 부카드의 말에 다니엘 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시간을 주면 그사이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다니엘 펄의 대답을 들은 이반 부카드게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이야기했던 미국이 두 나라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고 반대급부로 뭔가를 주고 이런 것은 자네 스타일이 아니었지. 말해 보게. 자네가 생각한 진짜 방법은 뭔가?
4.
나는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자로 하죠.”
나는 서류를 이반 부카드에게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뭘 하자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그는 아직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뭐긴 뭐겠습니까? 파키스탄 정부 아니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마침 서류를 보니 형과는 달리 정보부 내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하는 처지더군요.”
“그러니까 지금 이자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되물었다.
“인도 의회를 공격한 카슈미르 단체가 민간인을 공격했다. 이보다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 민간인이 행정을 책임지는 내무부 장관의 동생이라면요.”
파키스탄 내무부 장관의 동생은 공식적으로는 정보부 소속이 아니었다.
현 내무부 장관은 경찰력을 동원해서 반미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내무부 장관의 동생이 파키스탄 내 무슬림 과격파의 테러 대상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 이야기에 이반 부카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무부 장관의 동생을 공격하자는 말인가? 그것도 그리고 그걸 이번 인도 의회를 공격한 단체에 뒤집어씌우고? 자네 진심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명분의 진실이나 그 명분에 파키스탄 국민이 동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죠.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내세울 명분과 군 정보부의 항명에 수습할 시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도우면서 얻을 수 있는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지지와 지원입니다.”
“자네 변하지를 않는군.”
이반 부카드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으며 다니엘 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단기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합니다. 다만······. 자칫 우리가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파키스탄군 정보부의 보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파키스탄 정보부는 당연히 내무부 장관의 동생을 공격한 것이 이번 테러를 저지른 단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당연히 진짜 공격의 배후가 누구인지 조사할 것이다.
파키스탄 내에서 정보부의 눈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생각하면 미국이 배후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보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다니엘 펄과 대화를 나누던 이반 부카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반 부카드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의견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하는 결정권은 이반 부카드에게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흥미진진했다.
지난번에 나 계획을 반대했던 이반 부카드가 내 계획을 받아들일지······.
물론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걸라고 하면 나는 당연히 받아들인다는 것에 걸 것이다.
한 사람만 희생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두 핵보유국 사이의 전쟁을 멈출 수가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이반 부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 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 제안은 안 받아들일 수가 없네.”
“그럼 제가 할 일은 끝난 건가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도 자네 도움이 컸네.”
나는 이반 부카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면 1년에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죠. 이번 일은 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내 인사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는 이번 일은 1년에 오직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예외적인 일로, 내 도움을 또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두 번째는 크리스마스에 불쌍한 사람을 향해 적선하는 것처럼 도운 것뿐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이반 부카드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