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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권력이 정의를 만든다
1.
지난번에 의견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이반 부카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청년은 동아시아계답지 않게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수이진이라고 이름을 밝혔지만 진짜 이름은 아니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외부 팀 소속으로 소속은 아시아 지부가 아니라 본부 직속이었다.
평소에 어떤 임무를 하는지, 에이전트 에스 팀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팀인지 적어도 아시아 지부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본부에 있는 줄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본부에서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알려진 것은 아시아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정보 분석과 현장 요원이 결합한 태스크 포스 팀이라는 정도였다.
CIA 내에서 정보분석팀과 현장 요원 사이의 갈등은 오래된 일이었고 둘을 통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에이전트 에스 팀은 그 통합을 시범적으로 운용해 보는 팀인 것 같았다.
누가 생각해 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보분석팀과 현장 요원 사이의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911 테러라는 참사를 맞은 것을 생각하면 앞서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팀에서 활동하는 눈앞에 있는 수이진은 911 이후 달라지고 있는 CIA보다는 과거의 CIA와 더 맞는 인물이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테러 조직은 냉전 시대 적이었던 소련과는 많은 점이 달랐다.
정부 부서도 없고 확실한 명령 체계나 조직도 없고 명확한 자금원도 없고 지역 센터도 없고 점조직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수이진은 정부나 조직을 상대로 한 정보전이나 심리전에 탁월했다.
작년 수이진이 했다고 알려진 작전 대부분이 아시아의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이진의 능력이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CIA의 임무 비중이 대테러전으로 옮겨 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작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냉전 시대였다면 지금보다 수이진이 훨씬 활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뿐이었다.
이번 파키스탄에서의 작전처럼 말이다······.
파키스탄 정부에 인도에 양보할 수 있는 명분을 주자는 목적에서 시작한 작전은 훌륭했다.
다만 방향이 너무 괜찮아서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이 욕심을 부린 것이 문제였다.
표적을 암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수이진만큼이나 이반 부카드도 많이 놀랐다.
작전을 수행한 군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아예 이번 기회에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를 원했고 정보부에 좀 더 확고한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미군으로서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은 끝나가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파키스탄의 협조가 절실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번 전쟁 전에도 소련과의 전쟁과 오랜 내전을 거쳤다.
더구나 전쟁은 마무리 단계지만 정작 알 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나 탈레반의 수장인 오마르는 잡지 못했다.
둘의 체포에는 파키스탄 정부 그리고 파키스탄 정보부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결국, 암살은 실행됐고 어쨌든 암살 이후로 당장에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았던 인도와 파키스탄 갈등이 수습되고 있었으니 군을 비난하기도 어려웠다.
위험에 내몰린 것은 미군이 아니라 파키스탄 내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이었다.
이번에 암살된 간부를 따르던 정보부 내 파벌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이반 부카드는 차라리 파키스탄 지부 파견이 연기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부카드도 이제 30대 후반이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독재자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실행된 암살 때문에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수이진은 어느 사이에 냉정함을 되찾은 듯 침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새로운 요청을 해 왔네. 우리를 무슨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 생각하는 것인지······.”
“무슨 일인데 그렇게······?”
“정적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달라더군. 화가 나기는 하지만 안 들어줄 수도 없으니 어려워도 해야 하는 상황이야.”
수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반 부카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제거해야 하는 상대가 누군지 이름만 이야기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2.
“정적을 제거해 달라······.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청이라고는 하지만 정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메가와티 대통령의 정적을 말하는 거겠죠?”
“맞네.”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메가와티 대통령의 정적이라고 할 만한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었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아버지 수카르노 정권을 무너트리고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한 독재자.
메가와티가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수카르노의 딸로 수하르토 대통령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이후 건강을 이유로 가택 연금 상태였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다른 가족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당장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웠다.
인도네시아 국민들 사이에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메가와티 대통령의 다른 정적이라면 당연히 메가와티가 쫓아낸 와히드 전 대통령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와히드 전 대통령은 굳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서 제거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탄핵 이유였던 부정부패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다.
대통령으로 있을 때도 당시 부통령이었던 메가와티 대통령을 권한대행으로 임명했을 정도였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려는 가장 이유는 다음 대선을 노리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수하르토나 와히드 모두 다음 대선에서 메가와티와 맞붙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제거하려는 정적이 누굽니까?”
“아크바 탄둥, 골카당의 대표네.”
골카당은 바로 수하르토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이끌었던 정당으로 현재 원내 2당이었다.
지난 와히드 탄핵 때는 메가와티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아크바 탄둥을 정말 싫어하기는 하나 보네요. 부통령 선거에서도 반대표를 던지더니 아예 제거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요.”
여당 다음 의석을 가진 골카당은 원내 2당이었다.
와히드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부통령인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된 이상 부통령은 골카당의 아크바 탄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 아크바 탄둥은 가장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지만 메가와티가 선택한 부통령은 이슬람계 정당의 대표였다.
“싫어할 만하지. 아크바 탄둥은 수하르토 정부 장관이 되기 전부터 메가와티 대통령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고 하더군. 무엇보다 의회 제1당의 대표인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못 된 것은 골카당이 메가와티가 아니라 와히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기 때문 아닌가.”
다음 인도네시아 대선은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는 직선제였다.
그렇지만 이전까지는 의회에서 선거로 뽑는 간선제였다.
수하르토가 무너지고 메가와티가 이끄는 정당이 원내 제1당이 됐을 때 사람들은 메가와티가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이라고 생각했었다.
제1당의 대표일 뿐 아니라 메가와티는 반 수하르토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내 2당이었던 골카당은 독자적인 후보를 내는 대신 소수 야당의 대표인 와히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 일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아크바 탄둥이었다.
이반 부카드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메가와티가 부통령에서 탄핵을 통해 대통령이 되지 않았나. 골카당에서 부통령이 나오면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죠. 일단 골카당에서 부통령이 되면 메가와티 한 명만 제거하면 바로 다시 정권을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골카당은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권력을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십 년간의 독재 동안 쌓아 온 군부와 재계 인맥은 말 그대로 콘크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적용되는 것은 다음 대선부터였다.
암살이든 뭐든 메가와티가 제거되면 다음 대통령은 부통령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골카당이 아니라 이슬람계 정당과 손을 잡은 메가와티의 선택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말이다.
“그렇지. 하지만 문제는 지금 메가와티는 골카당만이 아니라 이슬람계 정당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야.”
메가와티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내 이슬람계 정당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히 그녀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강력히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 지지의 대가로 메가와티는 미국의 경제 지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슬람 지도자와 그 지도자들과 이슬람계 정당의 반감을 샀다.
메가와티가 걱정하는 것은 다음 대선도 대선이지만 의회 내 탄핵 가능성이었다.
현재 산술적으로는 골카당과 이슬람계 정당들이 합친다면 탄핵도 가능했다.
지난번 작전으로 이슬람계 정당과 골카당 계열 정당 사이를 벌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기는 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부통령이 되리라 생각했던 아크바 탄둥은 부통령에 다른 사람이 임명된 이후 완전한 반메가와티 선봉에 서 있었다.
개인적인 불만도 불만이지만 부통령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당내 반발을 메가와티에 대한 반대로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골카당, 더 정확하게는 아크바 탄둥이 탄핵을 추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탄핵으로 메가와티를 끌어내린다고 해도, 어차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고 해도 와히드나 메가와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메가와티 쪽에서 바라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당장 아크바 탄둥을 제거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이반 부카드가 딱 잘라 말했다.
“자네 결정에 맡기겠네. 바로 제거해도 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압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러면 시간을 두고 다음 대선까지 끌고 가는 게 낫겠군요. 아크바 탄둥을 제거한다고 해서 골카당이 친 메가와티 정당이 될 리가 없으니까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다음 대선까지 아크바 탄둥의 발을 묶어 놓는 것을 메가와티 쪽에서도 바랄 겁니다. 그럼 수하르토 시절의 방만한 예산 운영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크바 탄둥이 장관이었던 시절 집행된 예산을 중심으로요.”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걸로 되겠나? 너무 약하지 않겠나?”
“시작만 그렇게 하는 거죠. 아직 대선이 2년 반이나 남았습니다.”
“다음 단계가 있다는 이야기군.”
“예. 처음에는 특혜성 예산에 대한 조사로 시작하면 아크바 탄둥은 분명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미룰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거의 모든 결정은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까.”
수하르토 정부 시절 수하르토 대통령은 말 그대로 독재자였다.
“책임을 미룰 수는 있겠지만 골카당 내에는 여전히 수하르토 전 대통령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죠. 아크바 탄둥이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면 당내에서 반발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당내 반발이 나올 시점에 아크바 탄둥이 특혜성 예산으로 대가를 받았다거나 예산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를 꺼내는 겁니다.”
“······.”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골카당 내에서 아크바 탄둥의 장악력은 완전히 무너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가능하겠나? 아크바 탄둥은 만만한 자가 아니야.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골카당을 수습해서 제2야당 지위를 유지했고 와히드 전 대통령이나 메가와티 현 대통령 모두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련한 정치인이네.”
“증거가, 증인이 있다면요?”
“설마······?”
“예. 그때 증거가 없다고요? 증거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증인도 당시 아크바 탄둥과 같이 일했던 자 중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사는 사람이 나온다면요?”
“그렇게 되면 아크바 탄둥이 나중에 무죄를 받더라도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자가 없겠군.”
“아크바 탄둥의 측근이 죄를 인정하고 실제 감옥에 갔는데 누가 그의 말을 믿겠습니까? 메가와티 쪽과 우리가 합치면 증인이나 증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죠. 힘이 정의를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 정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