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183. 균형이 무너지면 혼란이 뒤를 따른다
1.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던 나는 다시 홍콩으로 향했다.
누가 지시를 내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CIA 정보망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홍콩에는 그 궁금증을 풀어 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홍콩에 돌아왔지만, 출근하지는 않았다.
이미 3팀의 투자 지침은 리안에게 전했기 때문에 특별히 갈 일이 없었다.
대신 나는 장샤오이를 밖으로 불러냈다.
“최근에 서울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홍콩에 언제 오셨어요?”
장샤오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홍콩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됩니다.”
나도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지난번 장샤오이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중국 투자를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일이 우리 둘 사이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전화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에요? 신규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존 투자한 국가가 아니라 다른 국가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왜 저에게?”
장샤오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3팀과 의논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3팀과는 상관이 없는 투자라서요.”
“3팀과 상관없는 투자라면?”
장샤오이가 물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W&R의 투자금을 관리하기 전부터 저에게 투자금을 맡기신 고객이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AAM이잖아요.”
“맞습니다. 현재 AAM의 투자금이 약 3억 달러 됩니다. 이 투자금을 장샤오이 팀장님을 통해서 투자하고 싶습니다.”
“3팀이 아니라 저희 팀에게요?”
장샤오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시겠지만 AAM은 6월까지 류오린을 통해서 투자하도록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3팀이 아니라 왜 저에게? 작년까지만 해도 3팀을 통해서 투자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장샤오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3팀은 지금 투자를 관리하는 데도 힘에 겨워서요. 사실 몇 달 전부터 쭉 그랬죠.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AAM이 작년까지 3팀을 통해서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AAM에 투자했던 국가가 다른 투자자인 W&R이 투자하는 곳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주로 아시아에 투자했으니까요.”
“지금은 같이 투자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인가요?”
“맞습니다. 이번에 제가 투자하고 싶은 국가는 기존 투자처가 아닌 국가들입니다. 지금 거래도 겨우 처리하는 3팀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W&R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렇게 일이 많은가요?”
“W&R이 직원을 계속 구하고는 있지만, 경력직이라고 해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는 없으니까요.”
“투자하려고 하는 국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브릭스(BRICs) 국가들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브릭스라면 작년에 골드만삭스에서 이야기한 러시아, 브라질, 인도, 중국 그리고 남아프리카를 말하는 건가요?”
작년 골드만삭스는 다섯 국가를 하나로 묶어 앞으로 투자 전망이 밝은 국가들로 지칭했다.
“맞습니다. 브릭스 다섯 국가 중에서 중국을 제외한 4개국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골드만삭스에서 지적하듯이 인구나 자원이 풍부해서 경제 전망도 밝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작년 환율이 꽤 많이 내려갔더군요. 투자로 큰 이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환차익만 해도 꽤 될 것 같더군요.”
작년 세계 경제가 불황을 겪으면서 신흥시장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안전 자산을 찾아서 미국이나 유럽 연합으로 흘러갔다.
자금이 빠져나간 신흥 국가들의 환율이 내려가고 미국과 유럽의 환율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새롭게 유통되는 유로에 대한 기대로 유로화가 강세를 보였다.
환율이 떨어진 국가에 투자하면, 경제가 회복한 이후에 이들 국가의 환율이 정상화되는 것만으로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기존 3팀이 투자하던 국가들과는 다르기는 하네요.”
브릭스 다섯 국가 중에서 기존 3팀이 투자하던 국가는 러시아뿐이었다.
브릭스 국가들은 지역도 아시아, 남미, 동유럽, 아프리카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당연히 주식시장이 개장하는 시간도 달랐다.
W&R 직원이 아무리 늘어나도 그 직원들을 데리고 투자를 하는 것은 3팀 직원들이었다.
“3팀은 기존 투자도 겨우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브릭스 투자까지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죠.”
내가 이야기에 장샤오이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팀보다 2팀을 우선하여 생각해 주신 것은 감사해요. 하지만 2팀도 여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더구나 아시겠지만 2팀은 해외 투자가 아니라 중국 투자가 중심이고요.”
우회적인 거절이었다.
그녀의 거절이 아주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아시아 유가증권팀이 세 개로 나눠질 때 1팀은 중국 본토 자본의 해외 투자, 2팀은 해외 화교들에게서 자금을 모집해서 중국에 투자하고 내가 속한 3팀은 홍콩 고객들의 자금을 투자하는 것으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기는 했다.
“이미 3팀의 거래를 대행하면서 투자 지역 구분은 사라진 것 아닌가요?”
2팀은 3팀을 도와서 한국, 일본, 타이완에 투자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나스닥은 물론이고 독일 DAX 선물이나 주식을 거래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도는 어떻게 투자한다고 해도 남미의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에 투자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지금도 나스닥과 독일 투자를 커버하느라 팀 내에서 소규모 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개장 시간이 다른 투자처를 늘리면······.”
장샤오이가 말을 흘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브라질이나 남아프리카에 추가로 투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리안에게서 장샤오이가 팀원들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장샤오이는 배경이나 본인의 능력이나 모두 뛰어났지만, 팀원을 다루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나마 본토 출신은 나았다.
태자당 출신이라는 배경만으로 어느 정도 누를 수 있었다.
중국 본토 출신들은 태자당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팀의 팀원 중 절반 정도는 홍콩 출신이었다.
본토 출신이야 태자당 출신으로 알려진 장샤오이가 공주처럼 느껴지겠지만 홍콩에서 나고 자란 나머지 팀원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장샤오이는 낙하산 출신치고는 능력이 좋고 3팀과의 거래로 팀원들에게 큰 수입을 안겨다 준 상사였다.
하지만 그 이상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팀 내에서 일부를 떼어서 브라질과 남아프리카 거래를 맡기는 것에 장샤오이가 난색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돈이 목적이라면 다르겠지만 태자당 출신인 장샤오이가 돈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존 팀원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면, 다른 팀에서 이번 거래를 맡길 직원을 데려오면 해결될 것 같은데요?”
“다른 팀에서 직원을 데려오자고요?”
“예. 류오린 내에는 수는 적지만 남미나 아프리카 쪽 거래를 맡은 직원들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하네요. 하지만 기존 팀에서 순순히 보내 줄까요?”
류오린 투자의 중심은 아시아팀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팀도 직책상은 장샤오이와 같은 팀장이었다.
“제가 이번에 브릭스 4개국에 투자하려고 하는 금액은 2억 달러입니다. 이 정도 투자 규모라면 류오린 임원진에서도 다른 팀장들이 반대해도 어떤 식으로든 지원을 보내 일단 직원을 보낼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2팀도 새로운 직원을 채용하면 되고요. 제 말은 이번 투자는 되도록 다른 팀에서 직원을 차출해서 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정 안되면 1팀
에서 팀원을 임시로 데려오는 방법도 있고요.”
“1팀요?”
장샤오이가 되물었다.
“예, 1팀요. 제가 알기로는 1팀의 팀원들이 남미나 아프리카 쪽 광산이나 유전 투자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와 기업이나 광산 인수는 다르지만, 남미나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전에 주식에 투자한 경험도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팀이 다른데······.”
“제가 알기로는 지금 1팀과 2팀의 수익이 꽤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차이라면 더는 굳이 팀을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1팀 팀장님도 팀에 별로 애정이 없어 보이고요.”
“그렇기는 하죠.”
장샤오이가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하나의 팀을 1팀과 2팀을 나눈 것은 두 팀을 경쟁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경쟁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실적이 좋은 3팀은 6개월 후에 회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럼 1팀과 2팀 실적을 비교해야 하는데······.
1팀이 한국과 아프리카에서 몇 건의 인수를 성공하게 하기는 했지만 2팀의 실적은 1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2팀의 실적이 3팀의 실적에 묻어 가는 부분이 있지만, 실적은 실적이었다.
3팀이 사실상 류오린 소속이 아닌 상황을 감안하면 2팀의 실적은 회사 전체 내에서 독보적이었다.
더구나 정작 팀원 차출이나 통합에 반대해야 할 1팀의 팀장인 웬지하오는 요즘 해외 인수보다는 홍콩과 상하이 내 투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반면 정작 1팀 업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웬지하오의 목표는 상하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류오린에서 실적을 내서 돌아가기보다는 상하이 출신 기업인을 도움으로써 꽌시를 통해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장 투자를 시작했으면 하는 게 가능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제없어요. 마침 1팀이 자금 문제로 한동안 업무가 정지된 상태니 국외팀에서 인원을 보충받고 1팀의 팀원들을 동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장샤오이가 말했다.
내가 기다렸던 대답이었다.
내가 기다렸던 대답은 당장 투자가 가능하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브릭스에 투자하는 문제만이었다면 서울에서 전화로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굳이 홍콩으로 와서 직접 장샤오이를 마주한 것은 장샤오이의 얼굴을 보고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팀에 자금 문제가 생겼습니까?”
내가 물었다.
내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장샤오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은행 쪽에서 문제가 좀 생겼어요.”
“1팀에 자금 지원하는 은행이라면 중국은행인데······. 중국은행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중국은행(Bank of China, BOC)은 이름만 들었을 때는 중국의 중앙은행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중국의 4대 은행 중 하나로 상업은행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은행이기도 했다.
중국의 은행 중에서 홍콩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은행으로 홍콩의 상징적인 건물이 중국은행 타워일 정도였다.
류오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바로 명목상 류오린의 중국 쪽 최대 주주가 바로 이 중국은행이었다.
무엇보다 1팀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해외 기업 인수 자금을 대는 곳도 바로 이 중국은행이었다.
“큰 문제는 아니고 특혜 대출 문제로 잠시 투자가 중지된 것뿐이에요.”
장샤오이가 서둘러 해명했다.
“혹시 왕셰빙 전 은행장과 관계된 일입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장샤오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국 금융 당국에 아는 사람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정보 출처는 CIA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둘러댄 나는 말을 이었다.
“왕셰빙 전 은행장이 미국 지점장으로 있을 때 특혜 대출을 받은 문제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왕셰빙은 거물이었다.
중국은행장이었다가 지금은 중국건설은행장으로 상하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다.
“휴, 맞아요.”
장샤오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미국 금융당국에서 적발한 내용이라서 본국 정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요. 이미 주석과 총리 두 분도 왕 행장의 사임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은행장의 사임에 중국을 움직이는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의 이름이 나온 것은 왕셰빙이 주룽지 총리의 최측근이자 장쩌민 주석의 아들과도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왕셰빙은 개인적으로는 주룽지 총리 아들과 친구였고 장쩌민 주석의 아들이 대만 기업을 인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이런 정도 인맥을 가진 인물이 부정부패로 낙마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중국에서 은행 관리가 부정 대출로 처벌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은행뿐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며 중국 내에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인구가 많은 만큼 부정부패로 적발되는 인원도 많아서 최근 발표에 의하면 7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막강한 인맥을 가진 왕셰빙이 처벌을 받고 낙마한 이유는 바로 그 부정부패가 적발된 곳이 미국이라서 천하의 장쩌민과 주룽지도 발표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도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들은 정보에 따르면 부정 대출이 이뤄진 것은 왕셰빙이 중국은행 미국 지점장으로 일하던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
금액이 2,300만 달러로 많기는 하지만 7~8년 전 일을 굳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미국 금융 당국이 발표한 정황은 석연치 않았다.
무엇보다 정보를 들은 출처가 바로 CIA였다.
만약 CIA가 관련됐다면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분열과 혼란······.
장쩌민 주석이 중국 내에서 인기가 높은 주룽지 총리를 견제한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셰빙은 적어도 중국 은행권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부정 대출로 걸린 인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왕셰빙은 나름 선을 지키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균형과 기준이 되는 인물이 사라지면 혼란이 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더구나 주석이 바뀌는 시점은 앞으로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상하이방으로서는 한몫 챙길 욕심을 부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