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184. 세상은 멀리서 봤을 때 더 아름답다
1.
리안은 조민과 함께 베란다에 앉아서 한가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 전망 정말 좋네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민이 말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이 집을 포기할 수 없었지.”
아버지가 캐나다로 떠나고 홀로 남아 숨죽이고 살 때조차 집은 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에서 홍콩 중심가인 센트럴과 그 너머 바다를 내려다볼 때마다 오히려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고는 했었다.
이곳에서는 홍콩이 마치 발아래 있는 것 같았다.
“저도 이 근처에 한 채 사고 싶네요.”
“이 근처 집은 매물이 거의 없어서······.”
더 피크의 집 중에서도 센트럴과 홍콩만이 내려다보이는 집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집 주인들 대부분이 집을 팔 이유가 없는 부자들이었다.
더 피크에 집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홍콩에서는 하나의 신분이나 다름없었다.
“옆집 나왔을 때 샀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조민이 아쉬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때 샀으면 내가 이사했을 것 같은데?”
지금이야 조민과 같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지만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리안은 조민을 부담스러워했다.
만약 그때 조민이 옆집에 이사 왔다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요. 지금 옆집 주인은 홍콩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잖아요.”
옆집 주인은 에드릭이었다.
그는 지금 서울에 있었다.
홍콩에 살 때도 한 달에 반 정도는 해외에 나가 있었다.
“내가 처음 옆집을 에드릭에게 권한 이유는 옆집에 살던 집주인 아들이 매일 사람들을 불러들여 시끄러웠기 때문이거든.”
“그런 생각이었다면 성공한 셈이네요. 에드릭 씨가 참 조용한 이웃이기는 하니까요.”
조민의 말에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조용한 이웃인지는 모르겠네. 요즘 하는 것을 봐서는 다른 곳에서는 꽤 시끄러운 것 같아서 말이야.”
“인도네시아에서의 일 이야기하시는 거죠?”
조민이 물었다.
“맞아.”
리안은 에드릭에게 연락을 받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에드릭이 보내 줬던 기사는 인도네시아 정계를 강타하는 태풍으로 발전했다.
아직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크바 탄둥을 조사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지만 현재 인도네시아의 분위기로는 당장 내일 인도네시아 검찰에서 조사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골카당이 어떤 당이야, 인도네시아를 30년 넘게 지배해온 당이잖아. 정권을 잃은 지금도 제1야당이고 말이야. 미국에서 기사가 났다고 그런 제1야당의 대표이자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지.”
아크바 탄둥이 정치적인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누군가 배후에 있는 게 분명했다.
“에드릭 씨가 직접 주도한 일은 아닐 테고, 에드릭 씨가 인도네시아에서 알게 된 사람이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겠죠.”
“그렇더라도 나는 이번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에드릭이 굳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야 돈이겠죠. 지금으로 봐서는 인도네시아 주가지수가 적어도 8%는 상승할 것 같아요. 8%만 올라도 1천만 달러 이상 버는 거잖아요.”
조민의 말에 리안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돈 많이 벌고 있잖아. 천만 달러가 큰돈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리안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조민이 입을 열었다.
“에드릭 씨가 걱정되시는 거죠?”
“걱정은 무슨······.”
“다른 나라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걱정스러운 거잖아요.”
조민이 말했다.
“걱정한다기보다는 에드릭이 나 때문에 홍콩 밖을 떠도는 것 같아서 말이야.”
2.
리안은 에드릭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W&R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이유 전부는 아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건 마치 자신이 에드릭을 홍콩에서 쫓아낸 기분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가가와 에드릭 씨는 서로 돕는 것뿐이니까요. 에드릭 씨가 가가와 카이 황 아저씨의 도움이 없이 직접 W&R을 이끌었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어요.”
“에드릭은 나나 아저씨가 없어도 성공했을 거야.”
“물론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외지인이 승승장구할 정도로 홍콩이 만만한 곳은 아니잖아요.”
조민이 말했다.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W&R은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자기 자금만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원칙상으로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리안이나 카이 황을 방패로 내세우지 않았다면 W&R은 지금쯤 수많은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지난 1년간 홍콩은 물론이고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의 주요 투자은행들이 큰 타격을 입고 정리 해고를 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승승장구하는 투자회사가 있다면 질시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에드릭이 대표였다면 홍콩 당국의 대대적인 조사를 받았을 것이다.
자기 돈으로 투자하는데 무슨 문제일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투자는 타이밍이었다.
정부의 대대적인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W&R이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류오린이라는 보호막과 리안 집안이 가진 영향력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예상한 건가?”
리안은 처음 망설이던 자신을 설득해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에드릭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드릭은 자신이 홍콩에서 투자로 돈을 벌었을 때 벌어질 일을 이미 처음부터 예상한 것이다.
하여간 대단한 판단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베란다로 집사가 들어왔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리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손님? 약속도 없이?”
“그게······.”
집사가 막 이름을 이야기하려고 하자 리안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됐어요. 누군지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지 정식으로 회사를 통해 약속을 잡으라고 하세요.”
리안은 약속도 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만남을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W&R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리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티에 참석하면 말 그대로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투자를 부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투자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나마 파티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나았다.
문제는 무작정 리안을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리안의 아버지가 중국 상하이방과 대립하고 있을 때 상하이 방의 손을 들어준 사람들이었다.
장쩌민 주석의 임기가 끝나가고 리안이 빠르게 W&R을 성장시키면서 위협을 느끼고 자들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물론 리안은 순순히 그 화해의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3.
막 돌려보내라고 다시 말하려고 할 때 집사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찾아오신 분이 옆집에 사시는 에드릭 씨입니다.”
“찾아온 사람이 에드릭이라고?”
우연이라면 너무나 공교로웠다.
마침 에드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에드릭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다니.
더구나 에드릭은 지금 홍콩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예.”
“에드릭이면 그럼 그냥 집에 들이면 되지 뭘 물어보고 그래. 당장 가서 문 열어 줘.”
리안의 지시에 집사가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릭 씨가 언제 홍콩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게.”
리안은 에드릭이 홍콩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더구나 갑자기 전화 한 통 없이 집을 찾아온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뭔 일이라도 있나?”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리안은 조민과 함께 거실로 들어갔다.
에드릭이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홍콩에는 언제 들어온 거고?”
리안이 빠르게 물었다.
“집에서 가져갈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어왔어.”
“언제 도착했는데?”
리안의 질문에 에드릭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 3시간 정도 됐나?”
“왔으면 연락을 해야지?”
“그냥 물건만 가지고 가려고 연락하지 않았어.”
에드릭의 시선이 조민에게 향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약혼자들이 일요일 오후에 집에서 만나고 있는데 끼어들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 눈치가 있는 사람이 갑자기 집을 찾아온 이유는 뭐야?”
리안이 물었다.
물건만 가지고 돌아간다는 사람이 굳이 자신의 집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뭔가 큰일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됐다.
“중요한 일이지.”
“중요한 일?”
“그래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일이야.”
“목숨이 오갈 정도로 중요한 일이 뭔데?”
리안이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먹을 게 없어. 오전부터 쫄쫄 굶었더니 뱃가죽이 등에 닿을 정도야.”
“장난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장난이라니,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누구 말대로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야.”
“그 큰 집에 먹을 게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 찾으면 먹을 게 어디 있을지도 모르지만, 식사를 준비해야 할 사람이 없네. 그렇다고 차려 먹기도 그렇고 시내로 나가기도 그래서 네 집에 찾아온 거야.”
“아!”
옆에 있던 조민이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리안이 조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 아는 것 있어?”
“에드릭 씨 집 하녀들이 필리핀에서 왔나요?”
“무슨 이야기야?”
리안이 다시 물었다.
“그게, 얼마 전에 홍콩에서 일하는 필리핀 하녀 임금이 14% 정도 내렸거든요. 그에 대한 항의로 홍콩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오늘 총파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리안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홍콩에 필리핀에서 온 하녀들이 많다는 사실은 리안도 알고는 있었다.
리안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대로 그의 집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중국 본토에 있을 때부터 인연이 이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리안이 다시 에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사실이야?”
“그런가 보네.”
“넌 몰랐던 일이야?”
에드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왔는데. 내가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돈을 직접 주는 것도 아니고······.”
에드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리안이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돈도 많은 놈이 필리핀 직원들을 왜 써? 더구나 식사 준비를 하녀가 한다는 것은 또 뭐냐? 요리장 고용하는 데 얼마나 든다고.”
리안이 보기에 에드릭은 돈을 쓸 줄 몰랐다.
1년 사이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돈을 벌어서 특별히 쓰는 일이 없었다.
부자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은 전부터 했지만 둘 다 바쁘다 보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난 우리 집에 있는 하녀들이 필리핀 사람인지도 오늘 처음 알았어.”
“그게 할 말이냐? 집 안에 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데 어느 나라에서 온 지도 몰라!”
“그러게······. 앞으로는 신경 좀 써야겠네.”
에드릭이 말했다.
“내가 아저씨에게 말해 줄까?”
“됐어!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에게 그런 일까지 부탁할 수야 있나.”
“어떻게 하려고?”
리안이 물었다.
“요리장은 전에 갔던 식당에서 고용하려고······.”
“하녀는? 계속 고용할 생각이야?”
“아니, 이미 신뢰가 깨졌는데 계속 갈 수는 없지. 어쨌든 파업을 하더라도 미리 연락을 줬어야지. 그리고 하녀 세 명이 모두 한꺼번에 쉬는 것은 좀 아니잖아.”
“사람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일하는 분들 보내 줄까?”
“됐어, 내가 직접 구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