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185. 이성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
1.
홍콩에 들렀다가 필리핀 메이드들의 파업으로 리안의 집에 가서 식사를 얻어먹고 일주일 후.
나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었다.
필리핀에서 메이드를 직접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며칠 전 필리핀에 거액을 투자하고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본래는 직접 올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분위기가 나 같은 20대의 한국계 미국인이 있기에 조금 껄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승준이라는 한국의 유명 가수가 입대를 앞두고 갑자기 미국 국적을 취득하는 사건 때문이었다.
외국에 살던 나는 모르지만, 가수였지만 한국에서는 이미지도 좋고 엄청난 인기를 가진 가수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의 이런 행동은 한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텔레비전에서는 유승준에 관한 이야기만 나왔다.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내가 한국 교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며칠 사이에 내가 한국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영주권자였다가 시민권을 얻은 유승준과는 달리 나는 미국 국적자였기 때문에 내가 한국 군대는 갈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나나 유승준이나 다름없게 보이는 듯했다.
이를테면 유승준은 나라를 어제 버렸지만 나는 조금 일찍 버린 사람으로 보는 느낌?
당장에라도 나에게 군대에 관해 물어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한국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한국은 복수 국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한국 군대에 가려면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데······.
CIA 직원이 미국 국적을 포기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겸사겸사해서 필리핀으로 온 것이었다.
이른바 유승준 충격에 빠져 있는 한국과는 달리 필리핀은 축제 분위기였다.
내가 예상했던 분위기였고 바로 이런 분위기를 예상했기 때문에 필리핀에 투자한 것이었다.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주가는 나라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내가 필리핀에 투자한 것은 오늘이 1년 전 필리핀 국민이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몰아낸 피플파워 1주년이었기 때문이었다.
피플파워를 통해서 대통령이 된 아로요 대통령은 피플파워 1주년 기념식에서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 아로요 대통령의 현 상황은 좋았다.
대통령이 된 직후 실행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군과 경찰을 장악했고 경제도 나쁘지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산업생산은 조금 내려갔지만, 경제성장률도 나쁘지 않았고 무역수지나 경상수지 모두 흑자였다.
이슬람 반군인 아부사야프의 납치 사건으로 잠시 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그 아부사야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알 카에다가 911 테러를 저질러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911 테러 직후 미국에 대한 지지 선언을 통해서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바로 며칠 전에 아부사야프 소탕을 위해 필리핀군을 훈련한다는 명분으로 미군 선발대 680명이 필리핀에 파병되었다.
아로요 정권은 안정적이었다.
필리핀 내에서 조금씩 아로요 대통령이 다음 선거에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2.
나는 집에서 일할 메이드 고용을 리코에게 지시했다.
“홍콩 보스 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신다고요?”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홍콩에서도 따로 메이드를 구할 생각이기 때문에 일은 많지 않을 겁니다.”
내가 굳이 필리핀에서 메이드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홍콩에서 채용한 직원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안에게는 일하는 메이드들이 필리핀에서 온 것을 몰랐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본래 처음 집을 구할 때 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구해 준 것은 카이 황이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이 리안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리안 집안과 관계가 있었다.
나는 경호원을 시작으로 그 직원들을 하나둘씩 교체했다.
리안과 카이 황을 믿지만, 그들에게 내 집 안을 맡길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둘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당장 홍콩 집 비밀 공간에는 지금도 비밀 통화를 하는 전화기와 무기 그리고 여권과 달러 뭉치 같은 것들이 있었다.
“따로 요리장을 둘 생각이지만 음식을 잘하면 좋겠죠. 요리할 때는 추가 수당도 지급할 생각이고 전체적인 보수는 걱정하지 마세요. 필리핀 메이드 수준이 아니라 홍콩 현지인 수준으로 지급할 생각이니까요.”
홍콩에서도 메이드를 구할 생각이었다.
집안일을 리안 쪽 사람에게 모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리코가 보낸 사람에게 다 맡길 수도 없었다.
“그 정도 임금 수준이라면 필리핀 특급 호텔에서 일하는 호텔 직원도 가능합니다.”
“호텔 직원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필리핀에 조금 더 투자할 생각입니다.”
“투자요?”
“예. 요즘 한국에 머물고 있는데 한국 학생 중에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중에는 필리핀으로 오는 사람도 있고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직원 중에도 한국인을 상대하는 어학원에서 일하다가 오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학원이나 콜센터나 능숙한 영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보니 교류가 있는 듯했다.
“잘됐네요. 필리핀 대학들과 연계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어학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상대하려면 콜센터에 한국인을 고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보스가 원하면 해야죠.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조만간 투자금을 늘릴 예정이니 자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필리핀 투자로 이익은 그게 얼마가 되든 그대로 필리핀에 재투자할 생각이었다.
3.
리코에게 지시를 내린 나는 엘만 지부장을 찾아갔다.
내가 찾아갔을 때 엘만 지부장은 상당히 바빠 보였다.
이번에 파병된 미군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부분이야 대사관에서 담당하지만 모든 것을 대사관에 맡길 수는 없었다.
이번에 파병된 미군의 목적은 알 카에다와 연계된 아부사야프의 토벌을 위해 필리핀군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미군은 훈련만 담당할 뿐 직접적인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군대가 다른 나라에 주둔하면서 그 군대가 겉으로 드러난 목적만 수행하는 경우는 없었다.
필리핀은 미군이 작전하면서 신경을 쓸 정도의 강국이 아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필리핀 내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므로 미리미리 준비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엘만 지부장을 만나고 돌아가던 중에 오랜만에 조엘 요원을 만났다.
그는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내가 알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냐고 물어야 하는데······. 보기에는 그렇게 잘 지내시지는 못한 것 같네요.”
조엘 요원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초췌해 보였다.
“덕분에요.”
조엘 요원이 말했다.
그는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스쳐 지나쳐 갔다.
나중에 듣기로는 잠입 작전 중에 뎅기열에 걸려서 꽤 고생했다고 한다.
잠입 작전 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상태가 악화하였다고 한다.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현장으로 끌어들이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도 꽤 관계가 좋았을 것이다.
필리핀 주가지수는 10% 이상 올랐다.
나는 그 수익 중에서 1천만 달러 정도를 리코에서 추가 투자했다.
4.
그렇게 투자를 마치고 필리핀을 떠날 준비를 하던 때 이반 부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 자네 지금 어디에 있나?
이반 부카드의 목소리는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필리핀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 전에 우리가 만났던 안전 가옥에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 혹시 모르는 그때 사용했던 안전 가옥에는 절대 가지 말게. 그 안전 가옥과 관련된 흔적도 모두 지우고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 전에 거기서 같이 만났던 다니엘 펄이 오늘 납치되었네.
다니엘 펄이라면 월 스트리트 저널 아시아 지부장이었다.
“예? 그게 사실입니까?”
- 내가 그럼 거짓말을 하겠나.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자세한 일은 아직 확실하지 않네. 하지만 파키스탄에서 납치된 것은 확실하네.
“어쩌다가······?”
내가 물었다.
정보부 간부의 암살로 파키스탄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나는 물론이고 이반 부카드도 예상한 일이었다.
다니엘 펄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기자이기만 하다면 모르지만, CIA 요원이었다.
아무런 안전조치 없이 파키스탄에서 활동했을 리가 없었다.
- 자세한 일은 나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네. 지금으로서는 같이 일하던 현지 협조자가 배신한 것 같네.
배신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 내일 내가 필리핀으로 갈 테니 일단 만나세.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이반 부카드가 필리핀으로 날아왔다.
나는 이반 부카드를 만날 때까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이반 부카드를 보자마자 물었다.
“신문사와 가족들에게 온 메일이네.”
이반 부카드가 출력된 메일을 건넸다.
그곳에는 현재 미국에 수용된 파키스탄 ‘전사’들을 전원 석방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었다.
만약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니엘 펄을 처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스파이로 일하다 보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이미 알고 있었다.
외부에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CIA 요원이 임무 중에 사망하면 별도로 그 희생을 추모한다.
죽은 이후에도 요원의 신상은 비밀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에서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내가 했던 일 중에는 예전 작전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일도 있었다.
보고서에는 당연히 요원들의 사망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요원이 납치된 것은 처음이었다.
말이 납치지 미국이나 파키스탄 정부가 그 요구 조건을 들어줄 가능성은 없었다.
죽더라도 아마 요원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다니엘 펄은 언론 기자였다.
정부 기관의 요원이 언론사 기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당장 미국의 언론들이 다니엘 펄이 예전에 쓴 기사들에 대한 검증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무엇보다 다니엘 펄이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미국 언론사 기자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메일을 읽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조심하게. 가능성은 낮지만, 다니엘 펄이 자네에 대해서 저들에게 말했을 수도 있네.”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CIA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상대가 아무리 훈련이 잘되고 투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CIA가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도 정보를 얻어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바로 상대가 무엇을 아는지 모를 때······.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