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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다치기 전에 울어서는 안 된다
1.
마닐라도 그랬지만 방콕도 공항은 물론이고 시내도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1월은 필리핀이나 태국 모두 건기로 여행 성수기였다.
다니엘 펄의 죽음이나 일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날씨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당연히 다니엘 펄의 납치였다.
하지만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일은 처리해야 했다.
내가 방콕에 온 이유는 리레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이유는 당연히 예정되었던 중국 공장 건설이 연기됐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레이는 내가 태국에 가지고 있는 주요한 전략 자산이었기 때문에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중국 공장 건설이 어렵다는 말씀이시죠?”
“그렇게 됐습니다. 이것 죄송하네요. 제가 먼저 같이하자고 말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리레이에게 중국 진출에 투자하겠다고 먼저 이야기한 것은 바로 나였다.
나로서는 장샤오이를 통하면 중국 진출이 쉽다고 생각해서 추진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었다.
“아닙니다. 에드릭 씨 잘못이 아니라 중국 내부 사정 때문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리레이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제안이 없었더라면 그냥 진출하셔도 됐을 텐데 지금은 그게 어려워지지 않았습니까.”
나나 리레이나 장샤오이를 통한 중국 진출이 어려워졌다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중국에 진출하는 것은 장샤오이나 그녀와 관계된 이들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장샤오이의 배경을 생각하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리레이 혼자서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리레이가 중국 내에서 협력자를 찾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어떻게 진출한다고 해도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태자당, 그중에서도 혁명원로들의 후손은 홍색 귀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중국의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그들의 영향력을 영원하다고 봐야 했다.
다치기 전에 울어서는 안 된다지만 다칠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어쩔 수 없죠. 지금 생각해 보면 의욕이 앞서서 서두른 부분이 있습니다. 더구나 투자 규모도 제 기업 규모와 비교하면 너무 컸고요.”
리레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제가 더 미안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태국 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듣자니 지금 태국 내 공장 규모가 작고 장비 때문에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태국은 정부 차원에서 자동차 산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자동차 회사 현지 법인에 태국의 자동차 부품 회사들이 부품을 조달하는 구조였다.
즉 태국 업체들은 하청 업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일본 회사들이 태국 회사들에 요구하는 기준은 엄격했고 당연히 그런 엄격한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시설이 필요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최근 일본 경기 불황으로 태국에 진출한 일본 부품 회사 중에서 일부 철수하려는 기업도 있다면서요?”
“그렇기는 합니다.”
“철수하려는 회사 중에 리레이 씨가 보기에 괜찮은 기업도 있습니까?”
“자동차 내장재를 만드는 기업 중에 괜찮은 기업이 있기는 합니다만······.”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기업을 확장할 욕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그 회사를 리레이 씨가 인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추가로 일본에서 장비를 수입하는 것이나 판로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던데요?”
내가 말했다.
기업 인수 자금까지 투자하겠다는 말에 리레이가 당황한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중국 투자가 연기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중국 진출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제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결과가 좋아서 조금 흥분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연기된 것이지 무산된 것도 아니고요.”
“아닙니다. 저를 단지 미안한 마음 때문에 거액을 투자할 정도로 생각하셨다니······.”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투자하려는 이유는 태국의 자동차 산업의 장래를 밝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태국의 주요 산업은 전자 부품 산업이지만 앞으로는 자동차 산업이 태국 제조업의 중심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아세안을 상대로 한 자동차 생산 거점으로 가장 경쟁력이 있는 나라가 바로 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태국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외에서 수입되는 자동차에 대해서 60%가 넘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태국 자동차 산업에 투자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각종 특혜를 제공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특혜가 아니었다면 중국인인 리레이가 태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지금 상태라면 태국의 자동차 산업이 성장한다고 해도 태국 자체 상표가 아니라 태국에 진출한 해외 자동차 회사들에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 공장 중심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현재 태국 제조업 중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전자 부품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자동차 산업은 유발 효과가 큰 산업이었다.
태국이 자동차 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려고 하는 이유였다.
“감사합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리레이가 마침내 고개를 숙이며 내 투자를 받아들였다.
예전 중국에 투자한다고 할 때와도 다른 반응이었다.
“뭘요, 가능성 있는 투자처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내가 말했다.
2.
자동차 산업의 전망을 떠나서 리레이는 괜찮은 투자처였다.
중국 본토에서 온 이민자 출신인데도 태국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리레이에게 투자하는 이유는 회사를 경영하는 리레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맥과, 그런 인맥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어떻게 친분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리레이는 태국 자동차 업계의 거물과도 친했고 현재 태국의 여당인 타이락타이당의 인물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탁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믿음은 바로 돌아왔다.
다음 날 리레이가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말했다.
“다음 주에 타이락타이당이 군소정당들을 합당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요?”
리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릭 씨도 보셨군요. 왜 총선 승리 축하 파티에 다른 당 소속 정치인들이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리레이의 말에 탁신을 한번 보겠다면서 찾아갔던 파티가 생각났다.
정작 탁신은 보지 못하고 솜키드 교수, 아니 지금은 장관이 됐으니 솜키드 장관을 만났던 파티에는 다른 정당 소속의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때 그분들이 합류하는 겁니까?”
“예. 총선 파티까지 참석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에 와서 합당하는 것이니 오히려 늦은 거죠.”
총선 직후에 다른 정당의 축하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은 이미 그 당에 협조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합당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다른 당으로 있으면서 정책적으로 협조하는 것과 합당을 하는 것은 다른 의미였다.
완전히 탁신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기는 하죠. 총선 직후에는 탁신이 총리 자격이 있느냐의 여부가 문제가 됐었고요.”
리레이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당시만 해도 선거에서 대승에도 불구하고 탁신이 총리가 될지는 불확실한 상태였다.
탁신 현 총리는 당시 총선을 몇 달 앞두고 공직자부패방지법으로 고소를 당해 기소 중인 상태였다.
만약 그 혐의가 유죄로 결정되면 탁신은 총리는 고사하고 의원 자격도 잃을 위기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탁신은 무죄를 받고 총리로 취임했다.
탁신이 태국 왕실이나 태국의 기존 기득권층과 사이가 껄끄럽기는 하지만 탁신 하나 날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탁신이 총리가 되지 못하더라도 타이락타이당이 당시 의회에서 얻은 의석수는 몇 명만 끌어들이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말씀대로 군소정당을 합친다면 말 그대로 여당이 안정적인 의석을 가지게 되는 셈이네요.”
지난 총선에서 지금 여당이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절반을 넘은 것은 아니었었다.
몇 석 정도가 모자랐었다.
물론 그 정도도 생긴 지 겨우 2년이 넘은 정당이 얻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대승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과반에 가까운 의석수와 과반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큰 차이였다.
특히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과반이 넘는다는 것은 정부가 원하면 무슨 정책이든 밀어붙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3.
리레이를 정보를 들은 나는 홍콩으로 전화를 걸었다.
-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거야? 서울에 전화했더니 거기는 없다던데? 아직도 필리핀에 있는 거야?
“일이 있어서 태국에 와 있어.”
전화기 너머로 리안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태국에는 또 무슨 일로?
리안이 물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 너도 참 어떻게 한 곳에 두 주 이상을 계속 있지 못하냐?
“일이 있으니까 온 거지. 발로 뛰는 팀원에게 팀장이 격려는 하지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리야? 발로 뛰어서 얻은 정보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대박을 터트렸고 필리핀에 투자해서 초대박을 치고 있잖아.”
- 난 모르지. 나는 나스닥에 신경 쓰기도 바빠서 말이야. 필리핀에 투자해서 돈 벌어 봐야 우리보다는 장 팀장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너 이렇게 나올래?”
- 미안!
리안의 형식적인 사과 후에 말이 이어졌다.
- 그래 태국에서는 뭘 알아냈는데?
“태국 여당 의석수가 늘어난다는 정보. 합당이 있을 예정이라는 정보야.”
- 그래? 요즘 그쪽 지도자들이 번갈아 잘나가네. 지난주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적이 날아가더니 이번 주에는 필리핀 대통령이 파티하면서 한껏 즐기더니 이제는 태국이야?
리안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물론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은 운이 아니라 미국과 CIA의 도움이었지만 태국은 아니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고 CIA도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태국 CIA 지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번 합당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탁신은 근본적으로 서민층을지지 기반으로 가진 대중정치인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런 대중정치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래서, 장 팀장에게 필리핀 주식 팔고 태국에 투자하라고 전해 줘?
“그래.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다음 투자도 이야기하자.”
- 알았어. 지난주에는 네 말대로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과 홍콩 증시는 내렸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괜찮았고······.
“이번 주에도 비슷할 것 같아. 한국과 타이완만 빼고 다른 곳은 매도 포지션을 유지해 줘.”
- 알았어. 그런데 한국과 타이완은 왜?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도 미국 나스닥이 좋지 않으면 두 곳도 어려울 것 같은데?
리안이 물었다.
“미국에서 마이크론이 한국 가이닉스에 대해서 인수 제안을 한다는 소식이 있어. 만약 인수가 성사되면 반도체 공급 조절이 가능해진다는 말이지.”
- 아! 한국이나 타이완이나 반도체 관련 회사들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니 주가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뭐, 많이 오르지는 않더라고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지. 포지션을 바꾸는 비용 생각하면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 알았어. 한국이나 타이완이나 조민 담당이니 말해 둘게.
“그럼 다음에 보자.”
투자 결정을 마치고 나는 태국에서 잠시 휴가를 즐겼다.
대통령의 의회 연설이 있기 전까지는······.
물론 여기서 말하는 대통령은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이었다.
이른바 연두교서였다.
미국의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초에 국가의 전반적 상황을 분석 요약하여 기본 정책을 설명하고 필요로 하는 입법을 요청하는 연두교서를 나는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1년 동안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CIA에서 근무하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연두교서는 처음에는 주로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승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건 약속 등등······.
그러다가 갑자기 대통령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거론하면 악의 축이라고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 다음 목표가 선택되는 순간이었다.
이란, 이라크는 그렇다고 해도 북한은 한국에 머무는 나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전화기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