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187. 나쁜 뉴스는 독감과도 같다
1.
평일이었지만 리안은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대신 카이 황이 집으로 찾아왔다.
“여기도 오랜만이죠?”
리안이 말했다.
기간만 따지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는 카이 황은 수십 년 동안 매일 살던 집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한 달에 많아야 두세 번 오면 많이 올 정도였다.
카이 황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제가 평생을 보낸 곳인데 이제 좀 낯서네요.”
카이 황의 눈빛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저는 지금이 좋은데요. 전부터 아저씨가 제 곁에 있는 것은 재능 낭비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리안의 말에 카이 황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원했던 일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어쨌든 저는 지금이 좋아요. 그리고 지금처럼 밖에서 아저씨 능력을 발휘하는 게 제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는 것보다 저나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이고요.”
카이 황이 독립 아닌 독립을 한 것은 작년 W&R의 대표가 되면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리안의 집사로 일했던 것은 리안을 곁에서 보좌하기 위해서였는데 W&R의 대표가 되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제가 하는 일이 도련님께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카이 황을 잠시 바라보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여전히 저를 과보호하시네요. 굳이 오늘 출근을 막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 아닌가요? 저 출근 못 하게 하려고 제 밑에서 일하던 팀원들에게 모두 재택근무를 지시하는 것은 조금······.”
리안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그가 오늘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카이 황이 리안의 팀원 모두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W&R을 리안 집안의 재산으로 여기고는 했지만, 대표는 카이 황이었다.
직원들이 없는데 리안 혼자 출근하는 것도 뻘쭘했다.
“돈보다 도련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였다.
“저도 몸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인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 상황은 좀······.”
리안이 카이 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답답했다.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카이 황은 이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범죄라고 하면 확신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련님은 도련님의 위치를 조금 더 자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도련님이 곧 가문입니다. 자칫 감염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3년 전에 조류인플루엔자로 여섯 명이 사망했지만, 시간이 지났습니다. 작년에도 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했지만, 무사히 넘어갔습니까. 연구에 의하면 실제 인체 감염률도 낮고요.”
카이 황이 리안을 회사 출근을 막는 이유는 얼마 전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닭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인체 감염률은 낮지만 한 번 걸리면 사망률이 30~60%일 정도로 치명적인 병입니다. 실제 3년 전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사람은 겨우 18명이었지만 그중에서 6명이 사망했고요. 확률이 낮은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고 설사 1명이라도 그 사람이 도련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카이 황이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련님은 혼자가 아니십니다. 당장 여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만 해도 모두 도련님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홍콩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몇십 배나 되는 사람이 도련님과 가문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이 황의 말에 따라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적으로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리안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저씨 말을 따르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예방할 수도 없는 재해입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낫죠. 미리미리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리안은 오늘따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가문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대를 이어 가문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굳어진 어깨를 풀기 위해 잠시 팔을 움직인 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제 에드릭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카이 황이 오늘 직접 온 이유는 회사를 재택근무로 바꿔 투자 회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선진국 시장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매도 포지션을 유지하고 아시아 쪽도 한국만 빼고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매수 포지션을 유지하자고 이야기하더군요. 한국은 요즘 한국 정치 상황에 더해서 미국 마이크론의 가이닉스에 대한 인수가 실패할 것 같다면서 하락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것이 확실합니까?”
카이 황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정말 홍콩도 매수 포지션을 유지하자고 이야기하던가요?”
카이 황이 홍콩 투자를 꼭 집어서 물었다.
홍콩 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카이 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홍콩 상황을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기는 하죠.”
카이 황이 리안에 대해서 조금 유별난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홍콩 시민 중에는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홍콩 주민은 3년 전 감염된 18명 중 6명이나 사망한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한창 시내가 사람이 북적일 시기였지만 거리에 사람들이 눈에 띌 정도로 적었다.
중국 최대의 명절인 춘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기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무엇보다 최대 명절을 앞두고 준비했던 기업들에 큰 타격이었다.
감기가 전염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나쁜 소식이 퍼지는 것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홍콩의 사정이나 분위기는 잘 모르더군요. 그래서 제가 홍콩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럼 홍콩도 하락 포지션으로 바꾸자고 하더군요.”
말 그대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홍콩 항셍 지수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에드릭은 리안이 말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전체적인 지표만을 가지고 투자 판단을 한 셈이었다.
“에드릭 님이 홍콩에는 신경을 쓰실 시간이 없나 보네요.”
카이 황의 목소리에 조금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상승을 예상했다가 하락하면 그 손해는 배가되는 셈이었다.
홍콩 항셍 지수에 투자하고 있는 금액을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 걸린 투자였다.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수천만 달러를 벌 기회를 날리고 오히려 수천만 달러를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무슨 일인지······. 전화 목소리가 조금 정신이 나간 사람 같더라고요.”
리안은 에드릭과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예전의 리안이라면 자신이 말하기 전에 홍콩에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영향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그럼 지금 에드릭 님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여전히 동남아 머물고 계신 겁니까?”
“아뇨. 지금은 서울에 있다더군요.”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2.
“지금 한국 정부는 말 그대로 패닉 그 자체입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렇겠죠. 지금 여당의 햇볕 정책과 완전히 부정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 낸 현 정부가 내세우는 최대 성과는 이른바 외환 위기 극복과 북한과의 평화 분위기 조성이었다.
그중에서 외환 위기 극복은 지금 여당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평화 분위기 조성은 현 한국의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가장 중점적으로 주장하고 오랫동안 구상한 정책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이 그런 햇볕 정책을 전면에서 부정하는 말을 연두교서에서 꺼낸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햇볕 정책에 대한 성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것이 1년 반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한국의 대통령이 포기할 수 없는 정책인데 미국 대통령이 그런 정책을 발표했으니······. 야당의 비판과 공격도 연일 계속되고 있고요.”
엘리어스 말했다.
그는 아주 골치 아프다는 듯 손을 이마에 대고 있었다.
“엘리어스 사무관님은 햇볕 정책이나 북한에 부정적이신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엘리어스와 나는 몇 달 전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을 막아서 북한이 한국과의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엘리어스가 지금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에 대해서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고 느꼈었다.
“그렇기는 하죠.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북한 정권을 좋아할 수가 없죠.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본국과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이가 껄끄러워지면 곤란한 것은 우리 같은 주한 대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대로라면 제가 지난번에 한 일이 헛수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래서 해결책은 있는 겁니까? 당장 20일에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상회담 전에 조율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부시 대통령의 동아시아 삼국 방문은 본래 지난 9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911 테러로 미뤄졌고, 다시 곧 있을 예정이었다.
이번 달 중순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정상회담 전에 의제를 조율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게 제가 미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협상한 것 대부분이 엎어지게 생겼습니다. 물론 전에도 백악관 쪽에서 한국의 햇볕 정책에 대해서 탐탁지 않아 했지만, 지금은 부정적인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꼭 집어서 악의 축이라고 이야기했다.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고 더 나아가 정권 교체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특히 지금은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이 거의 끝나 가는 시점이었다.
미군은 미국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 중의 하나였다.
미국이 일단 꺼낸 칼이었다.
한번 휘두른 칼을 다시 휘두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당장 북한을 상대로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자칫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피해를 볼 수 있으니까요.”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1953년 휴전협정 이후 50년을 전쟁 준비만 해 온 국가였다.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건 미국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엘리어스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세 국가 중에서 전쟁한다면 그건 아마도 이라크가 되겠죠.”
악의 축 세 국가 중 가장 만만한 국가는 아무래도 이라크였다.
인구도 가장 적었고 그건 군사력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걸프전 때 궤멸한 이라크 정예부대는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제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이미 백악관과 미국 국방성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거의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특히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이 911 테러 다음 날부터 이라크를 응징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은 현재 정부 내에서 CIA에 가장 견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반 부카드나 엘만과 이야기할 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대통령의 방한 때 적당히 한국 정부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조율되고 있습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지금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햇볕 정책을 지지하며 이산가족 상봉도 환영한다는 정도에서 합의문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 정부가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까? 당장에야 햇볕 정책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앞으로도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이상 돌아가면 북한에 대한 각종 규제를 발표할 텐데요.”
악의 축은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내용이었다.
설사 진짜 목표가 이라크라고 해도 앞으로는 악의 축 국가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한 각종 제재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재가 발표될 때마다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반발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국 정부는 세계 20위 권 안에 드는 강국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안정화하고 이라크를 공격하자면 한국 정부의 협조도 필요했다.
“그래서 제가 에드릭 씨를 급히 뵙자고 한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없으십니까? 한국 정부에 줄 적당한 당근이요.”
엘리어스가 말했다.
엘리어스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본 눈빛이었다.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활동할 때 자주 접한 모습이었다.
엘리어스가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도 엘리어스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통령에게 선물 하나 하죠.”
내가 말했다.
“선물이라면?”
엘리어스가 조금 전보다 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