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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
1.
“한국 대통령에게 무슨 선물을 하면 좋을지는 오늘 생각해 보고 내일 이야기해 보죠.”
나는 엘리어스를 만나러 오기 전부터 한국 정부를 어떻게 회유할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도 내일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은 엘리어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내일 어떤 제안을 하는지를 통해서 그가 가진 영향력이나 능력을 알아볼 기회였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서둘렀네요.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죠.”
내일 이야기하자는 말에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돌아와서 하성철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하성철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번에 얼마나 손해를 봤죠?”
엘리어스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연두교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나는 꽤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조금 큽니다. 악의 축 발언 이후 겨우 엔저 충격에서 벗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던 한국의 주식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성철이 말을 이었다.
“급하게 포지션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선물에서 꽤 많은 이익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요?”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지수 선물의 수익률은 겨우 1%가 조금 넘고 개별 주식에 투자 중 절반 정도는 손해를 보고 팔았어야 했습니다.”
“걱정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한국 코스피가 많이 올라서 차익 매물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런 돌발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홍콩 본사는 선물은 하락 포지션을 바꾸면 된다고 해도 문제는 우리입니다.”
선물과 옵션을 통해서 홍콩의 본사와는 달리 한국 지사는 개별 주식에 투자하고 있었다.
한국은 공매도가 활성화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가격이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한국 지사가 마땅히 이익을 얻을 수단이 없었다.
“하긴 악재가 미국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도 있었죠.”
“예.”
하성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미국 마이크론의 가이닉스에 대한 인수는 무산될 것 같습니다. 가격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와서······.”
마이크론이 가이닉스를 인수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산 과잉 상태인 반도체 물량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반도체 산업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던 인수였다.
하지만 인수는 몇 주째 진전이 없었다.
처음에는 가이닉스 인수 가격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가이닉스 노동조합이 마이크론의 인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가이닉스 인수가 반도체 물량 조절인 만큼 인수가 끝나면 구조 조정이 필연적이었다.
가이닉스 노동조합이 인수를 반대하는 이유였다.
여기에 한국에서는 첨단산업으로 분류되는 가이닉스가 미국 기업에 인수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진 한국 국민이 많았다.
현재 가이닉스의 경영권을 사실상 행사하고 있는 한국 정부로서는 이런 국민의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이닉스 주식을 거래해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던 한국 지사로서는 엄청난 악재였다.
“일단 투자를 줄이죠. 시기가 나쁘면 쉬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한동안은 확실한 호재가 있는 기업들 위주로 조금씩만 투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아시겠지만 2주 후에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면 뭔가 돌파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하성철이 대답했다.
2주면 긴 기간은 아니었다.
2.
다음날 나는 종로에서 엘리어스를 다시 만났다.
나는 엘리어스가 묻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한국 대통령에게 무슨 선물을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엘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국무부에서 파월 장관이 직접 미국이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권 교체를 위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한국 대통령에 대한 선물이 독일, 스페인, 프랑스가 부시 대통령의 중동 정책 전반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기 때문 아닙니까? 듣기로는 심지어 영국도 중동 정책에 대해서 부시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악의 축 발언은 해외에서 전반적으로 동의를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일단 미국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꼭 집어서 악의 축이라고 분류한 근거가 부족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의 정권이 정상적인 국가라기보다는 세 국가 외에도 문제가 많은 국가가 많은데 굳이 세 국가만 꼭 집어서 이야기한 것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외교 정책에서 가장 든든한 동맹인 영국에서조차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건 악의 축에 대한 해명일 뿐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전부 바보도 아닌데······. 파월 장관이 악의 축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게 한국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한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파월 국무장관의 움직임까지 파악한 것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작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 에드릭 씨는 다른 생각이 있으십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한국 대통령이 아무리 햇볕 정책을 중시한다고 해도 정상회담을 앞두고 선물을 주려면 좀 더 대통령에게도 이익이 될 직접적인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직접적인 선물이라면 어떤······?”
엘리어스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꽤 어려움에 처해 있다죠?”
내 질문에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들들은 물론이고 측근이 줄줄이 비리로 수사를 받거나 감옥에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달에는 검찰총장이 가족과 관련된 의혹으로 물러났고요.”
정권 말기였다.
레임덕 현상으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눌러 왔던 측근 비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작년부터 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대통령과 정권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줘야 제대로 된 선물 아니겠습니까?”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선물이라니? 정확히 뭘 말하는 겁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대통령이 가장 걱정하는 게 뭐겠습니까? 엘리어스 씨가 대통령이라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뭘 가장 걱정하겠습니까?”
“그야 연말에 있을 대선 아니겠습니까? 자칫 정권이 넘어가면 지금 수사를 받는 측근은 물론이고 자신에게까지 검찰의 칼끝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현재 대통령의 측근은 물론이고 아들들이 모두 재판을 받고 있거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만약 정권을 잃게 되면 그 대상은 측근이나 아들들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재 야당의 가장 강력한 대선 주자가 지난 대선에서 맞붙었던 상대더군요.”
현재 야당의 대표이자 가장 강력한 대선 주자는 바로 지난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가 대선에 나온 인물이었다.
연말에 있을 대선에서 가장 당선 가능성이 큰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들으니 지난번 대선에서 당시 여당이 국세청을 동원해서 대선 자금을 모았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는 이걸 세풍이라고 하던가요?”
“저도 얼핏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에 부임하기 전이라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국세청을 동원해서 기업들을 협박해서 정치자금을 모아서 대선 자금으로 썼다고 하더군요.”
“아······. 좀 악질적이네요.”
“질이 나쁘죠.”
“죄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미 끝난 문제 아닙니까?”
“그때 기업을 직접 협박해서 돈을 받아 낸 사람이 당시 국세청 차장입니다. 중요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처벌을 아직 받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국세청 차장이 기업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냈는데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잡혀야 처벌을 받는 거죠.”
“그럼 처벌을 받기 전에 어떻게 되기라도 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조사를 받기 직전에 미국으로 출국해서 현재도 미국에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한국 대통령과 여당에는 좋은 선물이기는 하겠군요.”
잘하면 상대방 후보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큰 건이었다.
“그렇죠.”
“미국에 있다면 정확히 어떤 상태인 겁니까?”
“인터폴에 수배가 된 상태이고 듣자니 여권도 만료되어 불법체류자 신세라더군요.”
내가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엘리어스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미국에서 도망자 신분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인데 대통령이 방한하는 때까지 행방을 찾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불법체류자는 체포되는 즉시 추방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강화된 법은 불법 이민자에 대해 더욱 엄격했다.
불법 이민자인데도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법기관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그 불법체류자의 행방을 몰라서 추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무관님은 도대체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911 테러로 체면이 많이 상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정보기관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입니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이야기군요.”
엘리어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소재를 파악하고 있죠. 세풍 같은 주요 사건의 관계자입니다. 더구나 세풍에 관련된 인물 중에 중요한 인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단순한 불법체류자라면 정보기관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의 주요 정치인에 대한 약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사정은 달랐다.
엘리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
엘리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지금으로서는 차기 한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입니다. 세풍은 그 차기 대통령의 가장 큰 약점이고요.”
국세청을 이용해서 기업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낸 사건이었다.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방법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체포된 사람이 현 야당 대표가 직접 관련됐다는 인터뷰라도 한다면 엄청난 타격이었다.
“써먹을 곳이 많은 인물인데 당연히 언제든지 신병을 확보할 준비가 되어 있죠.”
내가 덧붙였다.
이미 정보망을 통해서 확인한 내용이었다.
“말씀대로라면 좋은 선물이기는 한데 그런 인물을 지금 써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인물을 지금 써먹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그는 조금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이 데리고만 있어도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별문제 없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써먹기 좋은 시점인지도 모르죠. 어차피 당장 체포해도 한국으로 송환하려면 최소 1년에서 많게는 2~3년 걸립니다. 현 야당 총재를 길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하긴······.”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어스가 멈추더니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한국에 송환되는 것이 빨라야 내년이라면 그때는 이미 지금 대통령은 물러난 상태일 텐데······. 그러면 선물로는 약한 것 아닙니까?”
엘리어스가 물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이 카드는 우리가 한국 대선에 개입하기 위해 쓰는 카드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대선에 개입하다니요. 내정간섭입니다. 할 수도 없지만 해서도 안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말했다.
엘리어스가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기는 하죠.”
처음에 대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대선에 개입하는 것은.
“처음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선물이라고요. 그 이상은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 됩니다. 겨우 임기가 1년도 안 남은 레임덕 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공격을 조금 무디게 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풍을 주도했던 인물이 미국에서 체포되면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야당 대표와 그 측근은 한동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체포된 인물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에 관심이 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체포됐다는 소식이 한국에 알려지면 아마도 야당에서 대사관이나 국무부를 통해 접근할 겁니다.”
“그렇겠죠. 자신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미국에서 체포된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저쪽에서 접촉을 시도할 겁니다.”
“맞습니다. 엘리어스 사무관께서 하실 일은 그 일에 어떤 식으로든 사무관님이 관여해서 주도권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이빨 빠진 레임덕 대통령보다는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가 더 써먹을 곳이 많죠.”
“감사합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뭘요. 서로 돕는 거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엘리어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엘리어스와 헤어지고 돌아와서 한국에 들어올 때가 가지고 들어온 와인을 마셨다.
이번 일은 꽤 만족스러웠다.
비록 돈은 손해였지만 엘리어스를 통해서 CIA를 그만둘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 블랙베리가 울렸다.
그곳에는 단 두 마디만 쓰여 있었다.
Pearl Cut!
납치당했던 다니엘 펄이 사망했다는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