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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거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1.
나는 이반 부카드의 연락을 받은 즉시 그를 만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이반 부카드를 만나기로 한 곳은 싱가포르였다.
나로서도 잘된 일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슬림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번 납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번 사건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이반 부카드가 호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다니엘 펄이 살해당한 것은 확실한 겁니까?”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살해당했네. 듣기로는 목이 잘렸다고 하더군.”
“동물 취급을 한 것이군요.”
이슬람 율법에는 동물을 도살하는 자비하 법이 있다.
자비하 법은 동물의 눈을 가리고 발을 묶은 상태에서 목을 단번에 자르는 것이다.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자신이 죽이는 상대를 동물 취급하면서 모욕하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봐야지.”
이반 부카드가 대답했다.
“도대체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반 부카드의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다니? 다른 게 뭐가 있겠나, 기자로 활동하는 우리 쪽 요원이 테러범을 추적하다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고 그들의 요구를 미국 정부가 거절하자 살해당한 거지.”
이반 부카드가 대답했다.
그는 무슨 어리석은 질문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그의 대답을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제가 선배님께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반 부카드와 나는 꽤 많은 일을 같이했다.
물론 토미 수하르토 같은 돌발 변수도 있었지만, 현재 인도네시아 정치 지형에는 내 몫도 꽤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도 몸조심하라는 의미에서 주의 사항을 이야기해 주려고 불렀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이반 부카드가 여전히 부인했다.
“까놓고 말하죠. 저는 다니엘 펄이 납치됐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기자가 취재 중 사망하는 일은 비극이지만 아주 드문 일은 아니네. 매년 취재 중에 많게는 수십 명의 기자가 목숨을 잃고 있지.”
“그렇지만 다니엘 펄은 단순한 기자가 아니죠. 제가 알아보니 다니엘 펄은 처음에는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했더군요. 그런 경력을 봤을 때 처음부터 CIA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CIA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죠.”
CIA는 미국 국내 활동이 엄격하게 금지된다.
그런데 다니엘 펄은 기자 생활 초반에는 미국 국내에서 주로 활동했고 기사들도 국내 문제를 다뤘다.
CIA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문제를 다루는 기자 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것을 봐서는 나중에 특채로 CIA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CIA가 관리만 해 준다면 국내 활동을 위장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현재 다니엘 펄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원이었다.
다른 기자처럼 의욕만 앞서 위험한 취재에 나서는 기자가 아니었다.
영화나 TV에서는 스파이들이 매번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요원은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전략 자산이었고 특히 현장 요원은 더더욱 그랬다.
공식적으로 CIA 현장 요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비공식인 발표에 의하면 2만여 명에 가까운 CIA 직원 중에서 현장 요원은 겨우 2천 명이었다.
현장 요원 한 명의 가치는 적어도 수백만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였다.
그런 요원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움직이다가 납치되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다니엘 펄은 유대인이더군요. 아니, 정보기관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베테랑 기자인 다니엘 펄이 파키스탄에서 유대인이 테러를 조사하는 일이 위험한 일인지 모를 리가 없죠. 분명 충분한 안전장치를 하고 취재에 나섰을 텐데 납치라니요?”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납치범들이 짠 함정이었고 배신이었다고 말이야.”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납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니엘 펄은 파키스탄에 얼마 전 파리에서 출발하는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대한 자살 폭탄 테러범의 배후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파키스탄 내 과격파 유력자와의 인터뷰를 제안했다고 한다.
다니엘 펄은 그 제안을 처음에는 수상하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확인을 받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자리에서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다.
완전하지만 않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완전히 믿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납치를 당한 것이 사실이니 그 점은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실수를 하는 법이지.”
2.
나는 어깨를 움직이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생각했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물을 차례였다.
“제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납치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다니엘 펄이 살해당했다는 부분입니다.”
“911 테러를 잊었나? 그놈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은 놈들이네.”
“저도 나도 납치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니엘 펄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일단 다니엘 펄은 납치한 인질범들 처지에서는 아주 유용한 인질이니까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다니엘 펄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아시아 지부장이라는 위치에다가 아이비리그를 나온 부유한 유대인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인질입니다.”
“······.”
“실제 납치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꽤 많은 언론이 그의 납치를 주요 기사로 다뤘고요.”
납치는 단순한 테러보다 실행하는 데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른 테러처럼 납치를 위해서는 납치 현장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테러와는 달리 납치는 범죄를 저지르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범죄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를 하는 것이다.
최근 테러가 무서운 점은 도주나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납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납치를 한 이후 인질을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납치를 한 이후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협상을 전문적으로 배운 상대와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해야 했다.
특히 다니엘 펄의 납치는 납치범들 처지에서도 이반 부카드의 말을 그대로 믿더라도 꽤 공을 들인 일이었다.
납치범들은 다니엘 펄이 믿는 누군가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어야 했다.
다니엘 펄이 과연 아무나 믿고 납치될 장소에 나갔을까?
기자나 스파이 모두 상대의 말을 쉽게 믿는 자들이 아니었다.
“본국의 대통령께서도 백악관 회의에서 그의 구출에 관해 이야기했고 심지어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도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경찰에 내렸죠. 이런 상황을 봤을 때 다니엘 펄은 살아 있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인질입니다. 이런 인질을 왜 벌써 살해하죠? 살해당한 것이 사실입니까?”
치밀한 준비를 통해 납치를 실행한 자들이었다.
다니엘 펄의 살해는 그런 자들이 벌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내 추궁에 이반 부카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네 말대로 살해당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는 하지······.”
이반 부카드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니엘 펄은 확실히 살해당했네.”
“증거라도 있는 겁니까?”
“여기 오기 전에 사에드 세이크에게서 확인한 사실이네.”
“예?”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아흐메드 오마르 사에드 세이크······.
전에 이반 부카드가 이야기했던 인물이었다.
런던 정경대 출신의 영국 정보부와 파키스탄 정보부의 이중 첩자.
파키스탄 정보부의 자금이 911 테러리스트에게 흘러가는 데 관여해서 현재는 수배 중인 인물이었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사에드 세이크가 바로 다니엘 펄을 납치한 사람이니까.”
상황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에 파키스탄 정보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만약 사에드 세이크가 여전히 파키스탄 정보부 소속이고 그런 상태에서 다니엘 펄을 납치했다면 납치는 말 그대로 단순한 납치가 아니었다.
지난번 작전에 대한 보복일 수도 있었다.
“우리도 그가 여전히 영국 정보부 소속인지 아니면 파키스탄 정보부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네. 본인도 모를 수도 있고······.”
이반 부카드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게 도대체 뭔 소리입니까? 사에드 세이크가 영국 정보부를 배신하고 파키스탄 정보부로 넘어간 것 아니었습니까?”
“영국 정보부에서 파키스탄 정보부에 위장으로 전향을 시킨 것이라면? 영국 정보부에서 훈련받고 바로 다른 곳으로 넘어갈 정도로 영국 정보부가 만만한 곳이 아니지.”
“인도에서 영국 관광객을 납치했다고 5년이나 감옥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 납치됐던 관광객들 모두가 무사히 풀려났지.”
“그럼 여전히 영국 정보부 소속이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니, 그렇다고 보기도 어려워. 그래서 내가 본인도 자신이 어디 소속인지 모를 수 있다고 한 것이네.”
“그럴 수도 있습니까?”
“이중간첩이라고 해서 꼭 한쪽을 배신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이 바닥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알고 보면 두 개의 정보기관에 동시에 소속된 인물도 꽤 많아. 전직 요원 중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예도 많고 말이야. 물론 자네들처럼 전속 계약으로 외부 팀으로 일하는 예도 있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3.
이반 부카드의 말을 듣던 나는 문득 그가 예전에 사에드가 우리와도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설마 다니엘 펄을 배신했다는 사람이 사에드 세이크입니까?”
내가 물었다.
“배신이라······. 이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납치하고 살해를 했으면 그게 배신이지 뭐가 배신이라는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네를 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만······. 납치를 한 것은 사에드 세이크가 맞네. 하지만 다니엘 펄을 살해한 것은 그가 아니야. 만약 자신이 다니엘 펄을 죽였다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사에드 세이크가 다니엘 펄을 납치하고 얼마 후에 정보부에서 들이닥쳐서 다른 자들에게 다니엘 펄을 넘겨줬다고 하더군. 그리고 2월 1일 다니엘 펄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사에드 세이크가 우리 쪽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해 왔네.”
이반 부카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공시적으로는 사에드 세이크를 비롯한 납치범들이 FBI와 파키스탄 경찰들의 추격으로 체포된 것으로 다음 주에 발표될 거네.”
듣고도 상황이 진행되고 돌아가는지 잠깐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에드 세이크가 다니엘 펄을 납치했지만, 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다니엘 펄을 데려갔고 그 후에 살해됐다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사에드 세이크는 우리 쪽에 연락해 온 것이고요.”
“맞아. 간단히 정리하면 그렇지.”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데? 왜 우리에게 신변 보호 요청을 한 거지?’
파키스탄 정보부는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이반 부카드의 말에 따르면 사에드 세이크는 여전히 영국 정보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이런 경우 영국 정보부에 먼저 연락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해 줄 상황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에드 세이크가 우리와의 관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울 경우였다.
그가 나름 공인된 이중간첩이라면 삼중 간첩이 아닐 이유가 없었다.
만약 사에드 세이크가 CIA의 협조자였다면 납치에 대한 의문도 풀린다.
‘납치까지는 작전이었고 일이 잘못되어 다니엘 펄이 사망한 것이라면?’
최근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있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조직원들을 전쟁 포로가 아닌 ‘비합법적 전투원’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명 기자가 파키스탄에서 납치되고 그들이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있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석방을 요구한다.
이건 테러범들이라서 제네바 합의에 규정된 전쟁 포로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고개를 들어 이반 부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유독 얼굴이 어두운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저절로 욕이 나왔다.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사람을 동물 취급하면서 참수형을 하는 테러범들과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다시 한번 CIA를 서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지난 1년간 한 일이 그렇게 떳떳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구상한 작전 중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렇지만 사람은 날 때부터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였다.
적어도 위에서 일방적으로 지시에 따랐다가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임무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
선택할 권한이 없는 사람은 거지나 노예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