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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1.
존 베비스에게 연락하고 얼마 후 이반 부카드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세이드 세이크가 곧 파키스탄 법정에 출석해서 다이엘 펄이 살해당했다고 자백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파키스탄에 파견된 FBI와 파키스탄 경찰이 세이드 세이크가 다니엘 펄의 석방 조건으로 파키스탄 테러범을 석방하라는 협박 메일을 추적해서 잡은 것으로 발표될 거네.
이반 부카드의 말은 내가 했던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도대체 굳이 FBI와 파키스탄 경찰에 공을 몰아 줄 이유가 뭐라는 말인가?
나는 다이엘 펄이 위장 납치 작전 중에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반 부카드에게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내가 묻는다고 대답해 줄 리도 없지만 내가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CIA를 그만두기까지는 최대한 내가 만나는 CIA 동료들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달 초에 토미 수하르토가 살인 교사죄로 기소될 예정이네.
“잘됐군요.”
-다시 말하지만, 몸조심하게. 내가 알기로는 자네에 대한 정보는 저쪽에 넘어가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겠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담히 말했지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니엘 펄이 납치된 이후에 조금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에이전트 엑스 팀의 존재는 아시아 지부 사이에서 꽤 알려졌지만, 실제 내가 지난 1년 동안 만난 CIA 요원을 그리 많지 않았다.
많아야 열 명 정도였다.
그 열 명도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변장도 했고 가명도 쓰고 차명 여권도 사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변장을 했더라도 나를 만나서 이야기해 본 것과 아닌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이엘 펄은 나를 직접 만난 사람 중 하나였다.
더구나 그는 베테랑 기자였다.
나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상대방에 내 정보가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다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반 부카드가 나를 그에게 소개해 주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을 문제였다.
2.
내가 서울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엘리어스였다.
“내일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께서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어떤 내용입니까?”
“간단하게 줄이면 악의 축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의사가 없지만,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민주 정부로 교체하는 것이 중동의 최우선 목표라고 발표할 겁니다.”
내 질문에 엘리어스가 대답했다.
“예상대로 이란이나 북한은 이라크의 들러리네요.”
“그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란과 북한의 정권이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어스의 말대로였다.
구색 맞추기든 뭐든······.
미국의 대통령이 연두교서로 발표한 내용이었다.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넘겨 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현재로서는 이라크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야 하죠. 이란과 북한도 목표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요.”
악의 축 발언은 말 그대로 911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 변화를 알려 주는 상징적인 발언이었다.
당장 미국이 두 나라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박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있는 이상, 이란과 이라크 북한은 앞으로 전방위적인 미국의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처럼 불안하겠습니까? 듣자니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유엔에 특사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어떻게든 전쟁만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네요.”
내 말에 엘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이번에는 걸프전 때처럼 무사히 넘어가지는 못할 테니까요.”
콜린 파월 장관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해도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정권 교체가 최우선 목표라는 말을 한 상황이었다.
후세인 대통령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후세인보다 더 강하게 반미를 외쳤던 리비아는 911테러 직후에 10년이 넘게 끌어 온 펜암기 추락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했다.
여전히 펜암기 폭파에 리비아 정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엄청난 거액을 보상하기로 했다.
미국의 다음 공격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다음 주에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다시 한번 이번 파월 장관의 발언을 재확인할 예정입니다.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도 포함해서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물론 말치레겠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죠.”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 발언 전에도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에 부정적이었다.
하물며 악의 축으로 지목한 이후였다.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진심으로 지지할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미국 정부로서는 나름 할 만큼 한 거죠. 악의 축 발언으로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지만, 체면치레는 해 준 셈이니까요.”
말 그대로 체면치레였다.
한국 정부가 준비하던 월드컵을 전후한 제2차 정상회담을 준비했다고 하던데 추가 정상회담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엘리어스 사무관님은 하실 만큼 하신 셈이죠.”
내 칭찬에 엘리어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주한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모아서 한 일이지 제가 혼자 한 일은 아니죠.”
“뭘요, 여기는 우리 둘뿐인데 굳이 그런 말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허버드 대사님이 동아시아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이 정부에 발언권이 있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뭘요.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엘리어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정했다.
작년 9월 부임한 허버드 현 주한 미국대사는 아시아 전문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90년대 중반 북한 중수로 협상을 주도했고, 그런 경력을 인정받아서 작년 9월에 한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렇지만 허버드 대사는 클린턴 정부에서 외교 자문으로 일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민주당 정권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더구나 전형적인 외교관이라서 백악관에 무슨 요구를 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국무부와 백악관을 움직이는 데는 내 눈앞에 있는 엘리어스, 정확하게는 미국의 있는 그의 아버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인맥이었다.
3.
“전에 말했던 것 생각해 보셨습니까?”
“전에 말한 것이라면 CIA를 그만두고 싶으시다는······?”
“예.”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조금 의외네요. 제가 보기에는 에드릭 씨는 이 일을 아주 잘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이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은 다른 법이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여기서 능력이 없다고 주장해 봐야 그건 내가 바보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돌아가셔서 경력을 좀 더 쌓고 그만두셔도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내심 저와 함께 국무부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야?
물론 엘리어스가 말하는 경력이 예전 내가 바라던 경력이기는 했다.
CIA에서 경력을 쌓고 하원이나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일하거나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것······.
하지만 그건 지금처럼 돈을 벌기 전의 일이었다.
물론 CIA의 일은 나름 재미있었고 잘할 자신도 있었다.
내가 이런 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알려지면 욕을 먹을 일을 하면서도 가슴이 흥분으로 뛰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CIA의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겪는 한계를 동시에 겪었다.
지난 1년간 나는 지부에서 부르면 달려가야 했고 혹시 내 진짜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면서 살아야 했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굳이 이런 생활을 계속할 이유는 없었다.
“저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최근에 하는 일이 더 재미가 있더군요.”
“하긴 그 일이 보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어떻게 위에 말씀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한번 부탁했다.
“글쎄요. 말은 해 보겠습니다만······.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전에 이야기를 해 봤는데 요즘 CIA에 베테랑 정보분석 요원이 많이 모자란다고 하더군요.”
엘리어스가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베테랑은 아니죠. 더구나 지금 제 처지가 말이 아시아 전문가를 키우는 과정이지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고요.”
나는 공식적으로는 이른바 지역 전문가 육성 과정 중에 있었다.
하지만 말이 전문가 육성 과정이지 내가 하는 역할은 CIA의 주요 정보 자산이 에디 미첼을 돕는 일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지원은 없었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 CIA가 내게 지원한 것은 류오린이라는 직장과 몇 만 달러에 불과한 연봉을 계속 지급한 것뿐이었다.
AAM에 투자됐던 2천만 달러는 CIA에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에디 미첼이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맡긴 투자금이었다.
에디 미첼과 하던 일이 CIA의 업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공치사가 아니라 내가 지금처럼 돈을 번 것은 에디 미첼이 준 투자금과 기회를 살린 내 능력이지 CIA의 지원 때문이 아니었다.
“CIA가 어떤 지원을 했느냐는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제가 아는 에드릭이라는 정보 분석 요원은 뛰어난 능력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일을 도와주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외교관인 제가 유능한 요원이 그만두는 것을 돕는 것은 조금······. 저희 아버님도 에드릭 씨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오히려 작년에 설립된 국토안보국에 추천하는 것
을 고려하시더군요.”
엘리어스의 말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장난하나! 그동안 내가 도와준 것이 얼마인데······.’
지난번에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듯한 분위기였다.
마치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오늘 완전히 태도를 바꾼 것이다.
심지어 국토안보국에 추천이라니······.
국토안보국은 사실상 미국 정보기관을 산하에 둔 대통령 직속 부서였다.
조만간 국토안보부라는 이름을 정식 부서가 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국토안보국에 들어가면 내가 단기간에 퇴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국토안보국에 들어가는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지난 1년간 했던 일이 모두 밝혀질 가능성이 컸다.
4.
엘리어스가 태도를 바뀐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제가 원하는 게 있습니까?”
내가 질문에 엘리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제 아버지께서 홍콩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니 에드릭 씨가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유명하고 유능하시더군요. 작년에 팀장이었던 부서에서 엄청난 수익률을 기록하셨다고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엘리어스는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럼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류오린 3팀장으로서의 실적이었다.
하여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나에게 직접 돈을 달라는 것은 아닐 테니 확실한 투자 정보나 나에게 돈을 투자하려는 의미일 것이다.
엘리어스의 아버지는 부시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에 거액을 지원한 후원자였다.
큰돈이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에 엘리어스는 자신의 말대로 국무부 직원······.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대사관의 직원.
그런데 돈을 주면 내가 CIA를 그만두는 것을 돕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돈을 더 버는 것보다는 자유가 더 소중했다.
“일단 투자 정보를 하나 알려 드리죠. 5개월 안에 최소 50%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50%라는 말에 엘리어스의 눈에서 욕심이 스치고 지나갔다.
“50%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라 나쁘지 않네요.”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이 정보 하나로 끝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야 웃어라.’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흔히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은 공짜로 얻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는 공짜는 없었다.
모든 것은 값을 치르게 마련이었다.
그게 지금이든 나중이든······.
언젠가는 엘리어스와 그의 아버지에게 값비싸게 받아 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