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91화 (192/270)

(191)

#192. 후회를 하느니 미리 조심하라

1.

에드릭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온 엘리어스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세종대왕 동상이 내려다보였다. 그 너머에는 세종문화회관이 보였고 그 앞에는 여느 때처럼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 중에는 거의 대사관 앞에서 매일 열리는 집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엘리어스는 아니었다.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삶의 가장 치열한 현장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집회는 갈등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전쟁터였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긴장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엘리어스가 집회를 통해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을 때 부하 직원이 노크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사무관님을 찾는 전화가 여러 번 왔었습니다.”

부하 직원이 보고했다.

“그래?”

엘리어스는 손을 들어 책상을 가리켰다.

“그 위에 메모를 두고 나가게.”

“바로 연락을 해 달라고······.”

부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거기 놔두라니까!”

엘리어스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후에 대사님과 회의가 있네. 급하지 않으면 그 후에 연락한다고 자네가 양해를 구하게.”

“그게······.”

엘리어스의 지시에도 부하 직원은 메모를 손에 든 채 우물쭈물했다.

“중요한 사람인가? 왜, 국무부 장관님이나 백악관에서라도 전화가 왔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대사님과의 회의를 미룰 정도는 아니군.”

“사무관님의 아버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엘리어스는 놀라 몸이 잠시 멈췄다.

아버지가 전화했다고?

이 시간에?

더구나 곧바로 연락하라고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에?”

지금은 서울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있는 휴스턴은 오후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예.”

부하 직원이 대답했다.

엘리어스는 창밖에서 떨어져 부하 직원에게 급하게 다가갔다. 동시에 부하 직원이 들고 있던 메모지를 거칠게 낚아챘다.

세 번이나 전화했다.

“무슨 말씀 없으셨나?”

엘리어스가 급하게 물었다.

“예. 그냥 수고하라고만······.”

“알았네. 나가 보게!”

엘리어스가 말했다.

“예?”

부하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엘리어스를 바라보았다.

“나가 보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부하 직원은 사색이 되었다.

엘리어스가 그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하 직원이 나가자 엘리어스는 책상을 열어 전화기를 꺼내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접니다. 전화하셨다고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 만났느냐?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였다.

‘놀랐군. 정말 이 시간에 연락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니······.’

미국 휴스턴에 있는 본가 저택은 성과 같았다.

그 성과 같은 저택에서 아버지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성에 머물면서 텍사스에서 손에 꼽히는 석유 업체를 운영했다.

막대한 재력과 공화당에 대한 거액의 후원으로 엘리어스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항상 승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킹메이커로 불렸다.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꼴통이나 바보’라고 불렸던 지금의 대통령을 텍사스 주지사로 만들고 결국에는 백악관까지 입성시키는 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그전에도 아버지는 텍사스 정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가 가진 정확한 선택이었다.

아버지가 후원한 사람들은 당선했고 후원을 중지한 사람들은 낙선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아버지는 그런 미지의 공포를 적절히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엘리어스도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엘리어스는 아버지가 일개 말단 CIA 직원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궁금했다.

“오늘 에드릭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그래, 뭐라고 하더냐?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말 CIA를 그만두려고 하는지 떠보았습니다.”

- 그래서?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물었다.

“만약 자신의 퇴직을 도와주면 투자 정보를 넘기겠다고 하더군요.”

- 투자 정보?

“예, 몇 달 안에 50% 정도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정보라고 하더군요.”

- 꽤 베팅이 크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네 생각에 어떠냐?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 너에게 에드릭이 어떤 상태가 되는 게 이익이 되느냐는 말이다.

엘리어스에게 아버지는 에드릭이 CIA에 계속 근무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CIA를 그만두는 것이 나은지 묻는 거였다.

“그야······.”

엘리어스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에드릭이 CIA에 계속 근무한다고 해도 일단 본부로 귀환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에 비해 엘리어스는 내년까지는 한국에서 더 근무해야 했다.

에드릭이 CIA 계속 근무해도 본부에서 근무한다면 엘리어스에게 별다른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에 비해서 에드릭이 CIA를 그만두면 계속 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전에 이야기를 나눈 바에 따르면 에드릭은 CIA를 그만둔 뒤 한국에서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엘리어스 자신이 한국 대사관에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나중에도 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저야 에드릭이 CIA를 그만두는 게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조건을 내건 것은 찜찜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에드릭이 CIA를 그만두려고 하는 이유나 홍콩에서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말이겠지.

“예.”

엘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콩에서 에드릭이 함께 일하고 있는 쩡 가문이나 고객이라는 W&R에는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에드릭이 홍콩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다는 리안 쩡, 쩡웨이지앙은 홍콩의 명문가인 쩡 가문의 후계자였다.

중국이나 홍콩의 명문가는 벽을 쌓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무엇이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친분을 가지지 않는다.

쩡웨이지앙은 그런 명문가의 후계자였다.

아무리 가문이 상하이방과 사이가 나빠서 가세가 많이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일개 파견 직원과 친분을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에드릭이 관여하고 있다는 투자사인 W&R은 더더욱 수상했다.

아무리 뛰어난 투자 감각이 있더라도 자본금 몇십만 달러로 시작한 회사가 단기간에 알려진 것만 몇억 달러로 투자금을 늘릴 수가 없었다.

엘리어스는 그 늘어난 투자금이 중국 고위층이 빼돌린 자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쩡 가문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후진타오의 공청단과는 사이가 꽤 좋았다.

- 에드릭이 너에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W&R의 늘어난 투자금은 투자에서 얻은 이익이 아니라 중국 고위 간부들의 비자금이라는 것이 오히려 논리적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비자금을 빼돌리는 팀에 CIA 직원인 에드릭이 있는 것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건 엘리어스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리 에드릭은 홍콩에서 임무 수행 중이었다는 의미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임무 수행 중인데 배신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에드릭의 퇴직을 돕는 것은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산당 고위 관리의 비자금을 세탁하던 CIA의 직원이 갑자기 퇴직하려고 한다?

이건 배신이고 변절을 의미했다.

이런 추측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엘리어스의 국무성에서의 미래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공화당의 큰 후원자 중의 하나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네 말대로라면 퇴직을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죠.”

엘리어스의 의심이 맞는다면 에드릭은 이미 배신자였다.

퇴직을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 계속 조직에 남아 있으면 더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예.”

중국에 완전히 넘어간 이상 오히려 CIA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나았다.

- 그런데 네 의심대로라면 굳이 우리에게 자신의 퇴직을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

엘리어스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CIA를 나가서 합법적으로 사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 그건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 부탁을 거절하면 에드릭이 네 적이 된다는 거야.

에드릭에게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에드릭은 이미 자신의 퇴직을 부탁했다.

심지어 큰 투자 정보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럴까요?”

- 그래. 너도 알 텐데?

엘리어스가 정보기관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어스가 아는 정보기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고 자신이 당한 것을 잊지 않는 자들이었다.

특히 자신이 당한 것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모든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었다.

이건 성격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였다.

만약 당하고 참고 넘어가면 그렇게 참고 넘어간 사람이나 기관은 모든 정보기관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가장 충실히 지키는 기관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사드였다.

가장 유명한 것이 뮌헨 올림픽 참사에 관여한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 동안 추격해서 암살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거의 모든 정보기관과 정보기관 종사자들의 원칙이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에드릭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에드릭의 적이 된다는 의미였다.

“음. 그건 좀 겁나네요.”

에드릭은 흐름을 보고 그 맥을 짚는 데 굉장히 뛰어났다.

그리고 그 맥을 어떻게 끊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에드릭이 마음만 먹으면 엘리어스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로 중국 고위층이 배후에 있다면 엘리어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 후회하느니 미리 조심하는 게 좋지.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은 순간 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네요.”

에드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선택권이 없는 데도 처음 제안을 받고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투자 정보는 어떻게 할까요?”

- 투자 정보는 굳이 받을 필요 없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큰돈을 벌 기회인데요?”

50%의 수익률이라고 해서 꼭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50%가 오른다고 해도 투자금이 작다면 수익은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드릭은 엘리어스의 아버지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상대에 걸맞은 투자 정보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몇천만 달러를 벌 기회였다.

- 됐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지.

아무리 큰 기회라도 받아도 되는 기회가 있고 받아서는 안 되는 기회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에드릭이 배신자라면 퇴직을 돕는 대가로 투자 정보를 받는 것은 배신에 가담하는 일이었다.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 집안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았다.

엘리어스는 예전에 패자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승자의 노예가 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살아남는 사람과 가문이 결국에는 승자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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