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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불쾌한 일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낫다
1.
“국무부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INR)요?”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내 퇴직을 도와달라는 말에 엘리어스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아버지께서 알아보니 지금 CIA의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엘리어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911 테러는 CIA에게는 엄청난 위기였다.
더구나 현 국방부 장관인 럼즈펠드 장관이 계속 CIA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엘리어스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계획한 것처럼 존 베비스를 통해서 충분히 CIA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CIA를 그만두는 것보다는 일단 정보조사국으로 옮겼다가 반년 정도 후에 퇴직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정보조사국이라······.”
국무부 소속의 정보기관인 정보조사국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보기관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외교관들에게 정보와 그 정보의 분석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내가 미국 워싱턴에 있던 시절 하던 일과 하는 비슷했지만, 목적이 달랐다.
“만약 에드릭 씨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다음 달이라도 정보분석국으로 소속을 옮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권력의 힘이 대단하기는 하네요. 의무 복무 기간 중인데 그게 가능한가요?”
CIA는 의무 복무 기간이 있었다.
훈련을 받고 정식 요원이 되면 일정 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CIA를 그만둘 수 없었다.
특히 나는 CIA를 통해서 영국에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 기간이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더 길었다.
그나마 내가 퇴직할 수 있는 것은 존 베비스를 통해서 홍콩 파견 기간을 연수에서 파견으로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초가을쯤이면 내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났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정보조사국에서는 다른 부서에서 인원을 차출해서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다. 일단 차출로 신분을 바꿨다가 소속을 아예 바꾸고 시간이 지난 이후에 퇴직하는 단계를 밟으면 될 것 같습니다.”
“차출이라······.”
“차출이라고 해서 꼭 워싱턴에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근무지는 여기 한국의 대사관으로 이미 말을 맞춰 놓았습니다.”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나를 한국에 있는 대사관으로 배치한 것은 엘리어스의 생각일 것이다.
엘리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직을 그만두는 시간이 조금 더 늦춰진다.
그렇지만 CIA를 마지막 직장으로 그만두는 것과 국무부가 마지막 직장인 것은 차이가 컸다.
이렇게 보면 정말 좋은 제안이기는 하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이미 말했듯이 미국 외교관들이 필요한 모든 정보와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의 어느 정보기관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정보기관이었다.
문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보조사국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외교관들이 보낸 정보는 물론이고 다른 정보기관에서 보내 준 정보까지 분석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정보조사국이 매년 생산하는 보고서의 수는 3천 개에서 5천 개 사이였다.
하지만 정보조사국의 직원 수는 겨우 300명에 불과했다.
한 사람이 1년에 10개에서 20개의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보조사국 직원 한 명 한 명이 일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꽤 빡빡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내 질문에 엘리어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아버지께서 국무부장관과 직접 통화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콜린 파월 장관하고요?”
국무부장관은 일개 장관이 아니었다.
수석장관으로 미국 공직자 중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의전 서열을 가진 직책이었다.
사실상 행정부의 2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현 부시 정부에서는 부통령과 국방부장관에게 밀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행정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었다.
“콜린 파월 장관님은 군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와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전역한 이후에 집에도 몇 번 오신 적이 있고요. 행정부의 다른 분들보다 파월 장관님이 가장 아버지와 가깝죠.”
엘리어스가 백악관이나 국무부 고위층과 가깝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일 줄은 몰랐다.
나는 엘리어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바로 다음 달에 차출할까요?”
엘리어스가 말했다.
그는 꽤 서두르는 듯 보였다.
물론 나는 그의 페이스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음 달은 힘듭니다.”
내부적으로야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CIA 직원인 나를 차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는 민간인인 내가 주미 대사관에 고용되는 형태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류오린에서 그만둬야 했다.
“아, 제가 마음이 급했네요.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요?”
엘리어스가 물었다.
“5월 초가 좋겠네요.”
내가 말했다.
류오린을 그만두기 전에 나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AAM과 RAM이었다.
AAM은 류오린과의 6개월까지 계약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걸 해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W&R의 투자금 규모는 이미 AAM을 뛰어넘었다.
더구나 6월 이후에는 류오린이 아닌 다른 투자회사를 통해서 거래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W&R의 투자금을 잡으려면 조기 계약 종료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2천만 달러도 도이치뱅크에 갚아야 했다.
나는 이걸 4월에 조기 상환할 생각이었다.
4월 말에 도이치뱅크는 도이치뱅크의 새로운 은행장이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RAM도 마찬가지였다..
리안의 고객이었던 홍콩 부호들에게 투자받은 러시아 투자 계약 기간이 4월 끝난다.
리안에게 듣기로는 지금도 지속해서 투자 기간을 연장하자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내가 류오린을 그만두고 국무부의 직원이 되는 것은 회심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미국 국무부 직원이 되면 투자 연장은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거절할 기회였다.
2.
엘리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곧바로 홍콩으로 날아갔다.
나는 리안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리안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5월에 미국 국무부에 들어간다고?”
“정확하게는 한국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내가 말했다.
“나를 설득 좀 해 줄래?”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1년에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 놓고 무슨 백악관도 아니고 일개 대사관 직원이 되겠다고?”
내가 CIA라는 사실을 모르는 리안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홍콩으로 오면서 나는 리안에게 내 행동을 이해시킬 변명을 생각해 놓았다.
“너는 류오린이 나를 순순히 놔줄 것 같아?”
“안 놔주면? 누가 억지로 너를 류오린에 잡아 놓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억지로 강요하지는 못하겠지만 온갖 방법을 다 쓰기는 할 테지. 내가 류오린에 벌어다 준 돈이 한두 푼이 아니잖아.”
류오린이 AAM과 W&R을 통해 한 달간 얻는 수익은 1천만 달러 단위로 늘어 있었다.
아무리 류오린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투자회사라고 해도 이 정도 돈이면 주주들의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하긴 나도 류오린의 대주주 중 한 명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내가 W&R의 주주가 아니었다면 무슨 방법이든 찾았을 것 같기는 해.”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구나 RAM도 그렇잖아. 여긴 더하지. 지금도 연장하자고 연락한다면서?”
“그렇게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미국 국무부 직원이 된다는 것은 조금 뜬금없잖아.”
리안은 내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리안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주 뜬금없는 것은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내 전공이 국제정치학이야. 워싱턴에서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국무부에 들어갈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를 알던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내가 투자를 하는 것에 더 놀랄걸.”
“난 모르겠다. 회사를 그만두고 투자를 거절하기 위해서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야 한다는 게······.”
고개를 젓던 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한 미국 대사관에는 얼마나 있으려고?”
“5개월에서 6개월 정도?”
내가 이야기에 리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나저나 아저씨나 조민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도 네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데 그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 또 대인 어르신들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에게는 그냥 내가 이야기한 대로 이야기해. 투자자분들께는 내 원래 목표가 국무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내 전공이나 워싱턴에서 정치외교 관련 연구소에서 있었던 경력을 이야기하면 될 거야.”
나는 잠시 멈췄다고 말을 이었다.
“막말로 그분들은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 거야? 투자금 대비 이미 10배가 넘었어. 여기서 더 바라면 그건 욕심이지. 너는 그분들에게 할 만큼 한 거야.”
RAM의 투자금은 이미 초기 투자금 5천만 달러의 10배인 5억 달러가 넘었다.
리안이 어려울 때 투자금을 맡겨서 도와준 빚은 이미 충분히 갚은 셈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리안이 말했다.
“이왕 온 것 투자 이야기나 하자.”
내 이야기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2월 마지막 주인 이번 주는 대체로 네가 말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주가가 오르고 있어.”
“나스닥만 빼고는 말이지.”
내가 말했다.
“거참! 이걸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내 말에 리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이 미국 경제 회복세에 있다고 이야기한 이후에 주가가 급등했는데······. 어떻게 정작 나스닥만 내리냐. 주가 급등으로 우리 팀은 물론이고 회사 직원들이 다 웃고 있는데 나하고 우리 팀만 울상이라니까.”
“미국 소비자들은 앨런 그린스펀 말이 틀렸다잖아.”
경제가 회복된다는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의 말에도 나스닥이 하락한 것은 뒤이어 발표된 미국 소비자 신뢰지수의 영향이었다.
미국 소비자 지수는 한 달 사이에 5 이상 떨어진 94.1이었다.
100이 기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들 상당수가 지금이 불황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뒤이어 발표된 지난달 미국 주택 거래 현황도 앨런 그린스펀과 소비자 지수의 서로 다른 신호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기존 주택 판매량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데 정작 새로운 집의 판매는 2년 사이 최악이었다.
지금 미국은 헌 집은 팔리는데 새 집은 안 팔린다는 의미였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인지 나스닥은 1% 이상 떨어졌다.
나스닥에 투자하는 리안으로서는 혼자만 손해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했다.
“요즘 진짜 되는 일이 없다니까.”
“왜 무슨 일이 또 있어?”
“지금 본국에서는 파키스탄에 언제 투자하냐고 하는데, 지금 파키스탄에 투자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리안이 파키스탄 투자를 강요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어제 미국 영사관에 그 기자 목을 베는 영상이 배달됐다는 보도가 나오더라.”
다니엘 펄의 참수 영상이 미국 영사관에 배달되었다.
이미 처형됐다는 세이드 세이크의 법정 진술에도 파키스탄 정부가 수색을 계속하자 나온 반응이었다.
“그러니 말이야. 아니 기자를 납치해서 끔찍하게 목을 베어 죽이는 곳에 투자하라니······. 지금 상황에서 투자를 계속하려면 아저씨가 가야 하는데···. 나보고 아저씨를 사지로 보내라는 소리잖아.”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어야지. 당장 투자할 필요는 없잖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말했어.”
리안은 이번 파키스탄 투자 관련해서 중국 정부에 상당한 불만이 생긴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요해서 억지로 투자하는데 위험한 일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리안이 중국 정부에 충성심을 가지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불만을 품는 것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