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194. 같은 일을 한다고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1.
“부팀장님!”
한창 서류 작업을 하던 내 귀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민 씨가 내 사무실에는 무슨 일로?”
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조민이었다.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들어왔습니다.”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시고 공직에 들어가신다고.”
리안이 그사이에 말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곧장 말하는 것은 좀 곤란했다.
이번 일은 어차피 조민도 알아야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조민에게 전하는 것은 곤란했다.
언제 한번 주의를 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직에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닙니다.”
“그것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보다는 리안이 더 힘들었겠죠. 계속 연락이 온다고 하던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제가 죄송하네요.”
“욕심이 많은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죠. 일반적으로는 투자를 받는 게 더 나으니 제안 자체는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기도 하고요.”
W&R이 내 자금과 리안 그리고 카이 황의 자금만 관리하는 패밀리 오피스라면, 작년 4월 리안의 지인들에게 투자를 받아 설립한 RAM은 소수의 투자자 자금으로 투자하는 일종의 헤지펀드라고 할 수 있었다.
수익률만 따지면 당연히 W&R이 훨씬 높았다.
그렇지만 RAM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도 적지 않았다.
지금 추세만 유지해도 RAM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최소 1억 달러였다.
만약 RAM을 러시아 지수 선물에 단순히 묶어 놓지 않고 W&R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했다면 어땠을까?
RAM의 투자금 규모는 W&R의 초기 투자금보다 100배 정도 많았다.
50만 달러로 수익률 20,000%를 얻어도 1억 불이지만 5000만 달러는 수익률 2,000%만 얻어도 10억 불이었다.
RAM의 투자 조건이 수익의 20%를 받는다는 계약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W&R보다 수익이 높았을 것이다.
대부분 투자자가 억만장자가 된 다음에도 패밀리 오피스가 아니라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이유였다.
투자는 일반적으로는 자금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수익률은 떨어지더라도 투자금의 규모가 큰 것이 더 유리했다.
“그래도 부팀장님은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으신 거죠?”
“예. 지금으로서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기 싫네요.”
나에게는 거의 연락이 오지 않아 몰랐지만, RAM을 운영하는 동안 리안은 꽤 많은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불합리한 일이었다.
작년 세계 증시가 폭락하는 와중에도 RAM이 투자한 러시아는 작년 한 해 동안 주가가 90% 이상 올랐다.
4월에 투자를 시작했지만, 선물에 투자한 RAM의 수익률은 당연히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데도 리안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인제 와서는 계속 투자하겠다면서 다시 전화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리안이 막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우리가 류오린을 나가게 되면 그들이 전화할 사람은 리안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아깝지 않으세요? 투자를 받게 되면 말 그대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데요.”
“글쎄요. 제가 소심해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돈을 더 벌어도 쓸 데가 없더라고요.”
CIA를 그만두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는 있지만, CIA 일 자체는 흥분되고 재미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돈을 버는 것은 재미가 있지만 정작 마땅히 돈을 쓸 곳이 없었다.
리안은 돈은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별로 와닿지 않았다.
예전에도 가난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은 1년이 되지 않았다.
아직은 돈을 쓰기보다는 버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CIA와 정보조사국을 완전히 그만두기 전에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돈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나는 손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조민의 말을 막았다.
“조민 씨는 제 사무실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가 투자를 왜 받지 않느냐를 묻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닐 테고요?”
내 질문에 조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예전 엔론 공매도를 함께했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엔론 공매도를 함께했던 사람들요?”
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사람들과는 어떻게?”
“공매도에 참여한 투자사나 개인 중에는 엔론이나 앤더슨에 일했던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뭐, 내부 거래 혐의를 피하고자 직접 나서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기는 했지만요.”
“아······.”
법에서 금지하는 내부 정보를 이용한 셈이지만 별로 죄책감은 없었다.
조민이 근무한 앤더슨은 최근 엔론의 회계 부정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서 청산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작년 가을에 회계 부정을 주도한 것이 드러나서 엔론을 대표가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엔론 경쟁사 주식을 공매도한 것이었다.
엔론이나 앤더슨 모두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고 해도 하나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아니 투자는 그런 세계였다.
양심만 가지고 투자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특히 공매도는 자칫하다가는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거래였다.
그런 거래를 하는 데는 확신이 필요하고 내부인 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내가 조민의 말을 듣고 엔론의 공매도를 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던가요?”
“다이너지라고 기억하십니까?”
“다이너지라면 엔론의 경쟁사 아닙니까? 12월에 엔론을 인수한다고 나섰다가 포기했던······.”
“맞아요. 그 회사도 꽤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공매도하자고 하던가요?”
“예.”
“조민 씨가 저를 찾아오신 것은 그 정보가 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겠죠?”
내가 물었다.
“예. 엔론은 제가 앤더슨에 근무할 때 장부를 살펴보니 최근 10여 년간 본업인 에너지 거래에서 거의 이익을 얻지 못했어요. 수익 부분이 파생 상품 거래에서 얻은 수익이더라고요. 여기에 더해서 아시겠지만, 작년 석유업계가 꽤 불황이었어요. 그런데 다이너지가 발표한 실적을 보면 너무 좋다더라고요. 말이 안 되죠.”
“다이너지도 엔론처럼 회계 조작을 했다고 의심하고 공매를 하자고 제안했겠군요. 조민 씨는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거고요?”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의욕에 찬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조민에게 지난번 엔론 공매도 경험에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회사도 커지고 있으니 공매도로 투자를 확장하는 게 나쁘지 않겠죠.”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까?”
조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다이너지 공매도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예? 왜요?”
조민이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몇 가지나요?”
“예. 우선 엔론 공매도와는 달리 조민 씨가 다이너지에 대해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지난번 공매도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서 얻은 확실한······.”
“다른 사람이 준 정보지 조민 씨가 다이너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투자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남이 준 정보만 믿고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두 번째로 엔론에 이어서 또다시 텍사스주의 기업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텍사스의 에너지 기업들은 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입니다. 엔론이야 우리가 공매도에 참여하기 전에도 반년 이상 다른 기업들이 공매도한 상태지만 이번은 다른 사람들처럼 처음부터 공매도에 참여하실 생각이시겠죠?”
“아무래도 그게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그래서 반대하는 겁니다. 더욱이 공매도에 참여하는 다른 투자자들과 우리는 처지가 다릅니다. 만약 미국 증권조사위원회가 류오린이나 W&R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조민 씨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엔론의 파산은 부시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굉장한 부담이었다.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시 레이는 텍사스 주지사 시절부터 부시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웠다.
케네시 레이 회장은 부시 행정부 에너지 장관의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텍사스 소재 에너지 기업에 대한 대규모 공매도가 이뤄진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공매도가 불법도 아닌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이번은 내부 정보를 얻은 것도 아니고요.”
“이번은 그렇겠죠. 하지만 지난번 거래는요? 내부 거래 혐의를 완전히 벗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조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제가 엔론 감사에 참여했던 것은 몇 년 전 일이고 이번에도 엔론 공매도 때 제 이름은 철저하게 감췄는데요?”
“다른 때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에론 회계 감사에 몇 년 전에 엔론 회계 부정에 공범이라는 이유로 앤더슨이 미국 정부의 대규모 조사를 받고 있어요. 이미 엔론 회계에 관여했던 직원 명단은 인턴까지 모두 미국 정부에 넘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조금의 꼬투리라도 있으면 조사가 진행될 텐데······. W&R은 물론이고 류오린까지 조사가
들어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겁니까?”
엔론이나 앤더슨의 정보는 거의 전부가 미국 정부에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물론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조민의 정보를 찾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류오린은 투자회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고위 간부들의 돈세탁 통로였다.
이런 류오린의 성격은 다른 때라면 외부의 조사를 막아 주는 방패였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미국 정부가 호전적일 때는 오히려 족쇄가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엔론의 사태를 중국 기업들이 투자한 홍콩 투자회사가 엔론 공매도로 거액을 벌었다는 식으로 물타기 할 수가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중국 정부는 문제를 만든 나나 조민을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아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조사하기 시작하면 바로 W&R의 모든 투자에 제동이 걸린다.
내 판단으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다이너지의 공매도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되도록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는 투자는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요. 연락하셨다는 분들과 우리는 처지가 다릅니다. 하지만 투자처를 다양화하려는 노력하는 모습은 좋습니다. 혹시 다이너지 말고 다른 기업 주식을 공매도하는 것이 관심이 있으십니까?”
“다른 기업요?”
“예. 공매도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추천하고 싶은 주식이 있습니다.”
조민이 잠시 말이 없었다.
곰곰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해 보고 싶습니다.”
마침내 조민이 말했다.
“제가 공매도를 추천하고 싶은 기업은 휴렛팩커드입니다. 아시겠지만 몇 달 전부터 한창 컴팩을 인수하느냐 마느냐로 말이 많은 기업이죠. 휴렛팩커드에 투자한 연기금이 의뢰한 의결권 자문기관 결과가 며칠 후에 나옵니다.”
“의결권 자문기관에서 합병을 찬성하는 의견을 낼 것으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컴팩 인수는 휴렛팩커드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시장의 반응이죠.”
일반적으로 회사합병은 주가의 호재지만 인수하는 기업 쪽에서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00년 기업 역사상 가장 큰 합병이었던 AOL과 타임 워너의 합병은 완전한 실패였다.
얼마 전 AOL 타임 워너가 합병 손실로 처리한 금액만 600억 달러가 넘었다.
“그런데도 의결권 자문기관이 합병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휴렛팩커드 피오리나 대표는 정치력이 대단한 인물이죠.”
의결권 자문기관은 연기금 같은 공적인 성격을 가진 투자자가 투자한 기업의 주요 결정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언을 해 주는 기관이었다.
당연히 독립성을 가져야 하지만 의결권 자문기관이라고 해서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일반 주주보다 사회적 분위기나 정치적 파장을 더 많이 고려하는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피오리나는 미국 거대 기업의 최초 여성 대표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리 천장을 깬 최초의 여성 경영자였고 피오리나는 자신의 이런 위치를 교묘하게 이용할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렇기는 한 것 같더군요. 어지간한 영향력이면 최대 주주인 창업자의 아들이 반대하는데 합병을 지금처럼 밀어붙이지 못했겠죠.”
컴팩 인수를 반대하는 주요 주주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창업자들의 후손들이었다.
“맞습니다. 그게 제가 공매도할 기업으로 휴렛팩커드를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재 휴렛팩커드의 최대 주주인 월터 휴렉은 이번 합병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분은 5%밖에 안 되지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죠. 아마 연기금이 합병 찬성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합병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합병이 어려움에 빠지면 빠질수록 주가는 내려가겠
죠.”
“부팀장님의 말대로 의결권 자문 기관들이 합병의 손을 들어 주면 공매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조민은 의결권 자문기관이 합병을 찬성하는 의견을 낼 것이라는 내 말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의결권 자문기관의 발표가 나기 전에 공매도를 시작하면 조금 더 큰 이익을 얻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휴렛팩커드의 공매도는 컴팩 인수가 결정되기까지 몇 달이 걸리는 긴 싸움이었다.
어차피 조민도 준비가 필요할 테니 초반 약간의 손해는 감수할 수 있었다.
조민을 보내고 얼마 후······.
나는 이반 부카드를 만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그에게 받을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