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95화 (196/270)

(195)

#196. 고양이 손에 장갑을 끼우면 쥐를 잡을 수 없다

1.

마닐라로 온 나는 리코가 가르쳐 준 대로 알라방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하니 기다렸던 리코의 부하 직원이 나에게 집을 안내해 주었다.

집은 2층이었다.

알라방의 다른 주택들처럼 고급스럽고 개성 넘치는 저택이었다.

부하 직원은 나에게 내가 없는 동안에도 가사 도우미 두 명과 운전기사 한 명 근무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가사 도우미가 항상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저택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괜찮네.”

“차고에 벤츠 S클래스가 주차되어 있는데 사장님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다른 차량으로 바꾸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벤츠 S클래스라면 벤츠 세단 중에서는 최고 등급이었다.

눈에 띄기는 하지만 필리핀 같은 사회에서 얕잡아 보이지 않는 방패이기도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 주게. 안전하기만 하면 나는 굳이 차에 신경 안 쓴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리코 사장은 저녁때 온다고?”

“예, 오늘 공항에 직접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쁜 데 굳이 나올 필요 있나. 그런데 일이 바쁜가 보지?”

“최근에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겨서 그 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무슨 일인데?”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가······. 사장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하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았네. 그럼 나중에 듣지 뭐.”

리코의 부하 직원은 말 그대로 리코의 부하 직원이었다.

내가 투자자이자 사실상의 사주이기는 했지만, 리코가 아닌 나에게까지 충성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리코의 부하가 돌아간 후 나는 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필리핀에 도착했어?

“지금 막. 도착해서 바로 전화하는 거야.”

나는 리안에게 일정을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었다.

- 투자했던 사업들 단속하느라 바쁘네. 그런데 필리핀에는 굳이 갈 필요 없었던 것 아니야? 어차피 거기 사업은 네가 그냥 자금만 투자하는 거잖아?

“그럴수록 단속해야지. 태국 사업은 중국 진출 건이 걸려 있으니 내가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해도 문제가 없지만······. 여기는 네 말대로 자금만 투자한 거잖아.”

리코와는 돈을 주고받으면 성립된 관계였다.

소개를 통해서 만나고 화교 사회의 일원인 리레이와는 상황이 달랐다.

- 횡령이나 배신을 걱정하는 거야?

“처음부터 돈으로 묶인 관계잖아. 하는 일도 해결사였고······. 완전히 믿기는 어렵지. 현지에서 변호사 한 명을 고용해서 일단 붙여 놓기는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잖아.”

-하긴, 경찰 출신이라고 그랬지?

“맞아.”

- 조심해! 돈 가로채려고 사람이라도 보내서 널 어떻게 할지도 모르니까. 경찰 출신들이 돈맛을 보면 아주 바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더라.

리안이 말했다.

농담조로 말했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런 일을 벌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 그래. 경호원 항상 데리고 다니고······.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여기 필리핀은 뭔 일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라서 되도록 경호원과 함께 다니고 있어.”

구르카족 경호원이 오후 비행기로 마닐라에 올 예정이었다.

- 잘하는 일이야. 범죄는 예방하는 게 최고지.

“알았어.”

나는 대답을 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사소한 안부를 주고받았으니 이제 투자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뉴스를 보니까, 홍콩 정부에서 소비세 인상을 한다는 데 사실이야?”

소비세 같은 간접세의 신설이나 인상은 소비에 영향을 주고 결국에는 주가에 악영향을 주게 마련이었다.

-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한데······. 홍콩 장관이 거부할 거야.

리안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뉴스에는 그런 이야기 없던데? 뭐 들은 이야기라도 있는 거야?”

- 전화를 출처를 말하기는 그렇지만 확실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야.

리안이 말했다.

그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소비세 인상 거부가 발표되면 홍콩 주가는 오히려 오르겠네.”

- 그럴 것 같아.

리안이 말했다.

“그럼 이번 주는 미국 나스닥하고 인도 정도만 빼고 대충 상승하는 것으로 정하면 되겠네.”

미국 나스닥은 지난주에 7.9%나 올랐다.

아무리 그린스펀의 경기 회복 발언이 있었다고 해도 너무 큰 상승 폭이었다.

경계 매물이 나올 시점이었다.

인도는 구자라트에서 발생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충돌이 폭력 양상을 띠고 있었다.

강간, 방화, 살인이 주 전체에 확산되고 있었다.

현재 인도 주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의 수만 600명이었다.

더욱이 구자라트주 정부가 사실상 힌두교도의 이슬람교를 상대로 한 폭력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돕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주가가 내려가는 것은 당연했다.

- 브레이크는 독일도 조금 상황이 안 좋다고 이야기하더라고. 현 집권 여당이 곧 있을 지방선거에서 아무래도 패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 그렇다고 크게 주가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렇다는 말이지.”

투자하는 시장으로만 따지면 나스닥 선물과 홍콩 항셍 지수 선물에만 리안과 브레이크가 가장 적었다.

그렇지만 리안은 상반기가 지난 이후에 팀을 류오린에서 독립하는 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류오린 내는 물론이고 중국 본토와도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있었다.

더욱이 나스닥은 투자 금액이 컸기 때문에 투자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카이 황의 경우는 W&R을 운영하면서 홍콩 내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독일과 영국 두 곳에만 투자하고 있었다.

예전 팀원 중 가장 깊이 있게 시장을 분석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나는 굳이 그런 브레이크의 판단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럼 독일 투자는 브레이크 말대로 하자. 아무래도 나보다는 브레이크가 낫겠지.”

장래를 생각하면 자율성을 어느 정도 줄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브레이크라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다 낸 의견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 브레이크에게 그렇게 전할게.

리안이 말했다.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할게. 너도 일 생기면 전화하고.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메시지라도 남겨.”

2.

리코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오기 전에 해결할 일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리코가 말했다.

“일이 우선이죠. 그래 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다행히 잘 해결되었습니다. 좀 시간과 노력이 들기는 했지만, 해결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되물었다.

“전에 말씀하신 어학원 문제와 직원 교육을 책임질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문제였는데······. 상대방이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해서요. 제가 매달려서 오늘 겨우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둘 모두를 책임질 사람이라니······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둘 다 하기 어려웠다.

“유능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리코 씨가 그렇게 매달렸다니 말이죠.”

“에드릭 님도 전에 보셨던 적이 있을 겁니다.”

리코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요?”

“예. 에드릭 님의 이름을 말하니 바로 기억하더군요.”

내가 필리핀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해 봐야 리코와 CIA 직원들이 거의 전부였다.

CIA 직원들은 아닐 테니 누군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아는 마닐라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더구나 어학원과 직원 교육을 함께 책임질 사람이라면 외국어나 사람을 접대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말인데······.”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CIA 일을 하면서 가명을 댄 사람도 아니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인맥이 넓습니다. 마닐라에 있는 외국계 기업의 간부 중 모르는 사람이 없죠.”

“나이는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올해 30 중반이죠.”

“혹시 여행업계에 종사하나요?”

“정확히는 호텔리어입니다.”

호텔리어라는 말에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와 리코가 동시에 아는 호텔리어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혹시 그 사람이 키가 큰 편이고 눈이 샴고양이를 닮지 않았나요?”

“샴고양이요? 그러고 보니 눈이 닮기는 한 것 같네요. 얼굴형도 삼각형에 가깝고 걷는 모습도 비슷하고요. 그런데 자주 본 것도 아닌 데 꽤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역시 예전 처음에 봤던 호텔 직원인가 보군. 사라 펠리시아노라고 했던가?’

글로벌 호텔 체인 출신의 직원.

호텔 체인들은 고객 정보 관리에 철저하다.

해당 고객이 체크아웃할 때의 객실 상태나 주로 이용한 서비스 그리고 주로 이용하는 시간 등등······.

내가 아무리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습관까지 매번 바꿀 수는 없었다.

CIA 작전 수행 중일 때는 다른 호텔 체인을 이용하지만 역시 유명 호텔 체인을 이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신분으로 호텔에 많이 가는 나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나요?”

내가 물었다.

“당연하죠. 말이 투자자지 사실상 사업의 사주 아닙니까?”

리코가 말했다.

“그렇죠······.”

나는 내키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다른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다른 직원을 구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BPO 사업은 해외 기업들을 얼마나 고객으로 유치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갈리는 사업이었다.

유명 호텔 체인 직원이었던 사라 펠리시오는 그런 점에서 최적의 후보였다.

더욱이 사라 펠리시오라면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객대응팀의 팀장이었다.

까다로운 고객을 누구보다 많이 상대한 경험이 있었다.

“딱 맞는 직원을 구했네요.”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미 카드사 중 한 곳과 고객 상담 서비스를 계약한 상태입니다. 아직은 필리핀에 온 여행객만 상대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는 글로벌 서비스 센터를 유치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전체 고객 서비스 부분을 맡으면 좋겠지만 아직 우리의 BPO 사업은 시작 단계였다.

필리핀 현지 고객 상담 서비스를 계약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수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몇 달 후면 제가 한동안 필리핀 사업에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리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예. 이번에 내가 필리핀에 온 것은 그 일로 리코 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나는 리코에게 5월에 미국 국무부 정확하게는 주한 대사관에서 한동안 근무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태국에서 리레이에게 끝까지 이야기를 못 하고 떠나온 것과는 달리 리코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별 부담이 없었다.

리레이에게 나는 투자자라기보다는 동업자에 가까웠지만, 리코는 단순 투자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관 직원이 되신다니 놀랍네요.”

“직원이라고 해도 자문 비슷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임시직에 가까워서 길어야 6개월 정도 근무하고 그만둘 예정이고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라니, 대단하네요.”

리코는 미국 대사관 직원에 대해 동경이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인데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일이니 아이러니했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리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도 미국 대사관이나 미국 국무부에 아는 사람이 있겠네요?”

리코가 물었다.

“그야 그렇죠.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혹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간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리코의 입에서 나왔다.

“예?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라면 지금 횡령, 배임으로 조사받고 있지 않나요? 필리핀에서 공직자의 횡령, 배임은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큰 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사람이 미국요?”

필리핀의 공무원 사회에서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다.

외국인이 필리핀에서 사업이나 무언가를 할 때 뇌물이 아니면 제대로 된 일 처리를 못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필리핀에서 공무원의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은 엄격했다.

만약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고 그 금액이 높은 경우에는 사형이 구형될 수도 있었다.

특히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처럼 거액일 때는 사형이 구형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사형이 실제 구형되느냐는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재판을 받는 에스트라다가 미국으로 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최근에 사정이 조금 변했습니다.”

“어떻게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변호사가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상당수의 증거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요? 대단하네요!”

아로요 대통령 쪽에서 꽤 공을 들였을 텐데도 증거를 무효로 하다니, 변호사가 대단히 능력 있는 것 같았다.

“예. 대단하죠.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유죄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법조계의 판단입니다.”

법조계가 저렇게 생각한다면 아무리 아로요 대통령이라도 무조건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흠······.”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정부가 에스트라다를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미국으로 망명을 허용한다는 이야기가 마닐라에 파다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셨군요. 미국으로 망명이라······.”

“제가 확인해 보니 실제 국회에서 그런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제 비슷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과 같은 작년에 탄핵당하여 물러난 인도네시아의 와히드는 각종 혐의에도 불구하고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리코를 떠나보내고 나는 곧장 필리핀 엘만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옥에 있는 에스트라다는 장갑을 낀 고양이와 같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다시 쥐를 잡는 고양이가 된다.

그는 여전히 필리핀 서민층 사이에서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에스트라다가 풀려나는 일은 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스트라다에 대한 유감은 없었다.

단지 그가 감옥에 있는 것이 내게 더 이익이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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